< 제 56화. >
전 삶, 김유중이 자금난에 시달리며 분식회계를 미친 듯이 감행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리하지 못한 유동자금 확보를 위해 가장 처음으로 매각했던 계열사 힐튼호텔.
지금 그 힐튼호텔의 로비와 연회장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SKY그룹의 초대장을 받은 대기업 회장들만 모두 40여 명, 그 아래 중견기업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거의 100명을 헤아렸다.
그들 100명의 수행원까지 왔을 테니 북적이는 것은 당연했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도 모자라 ‘혼맥’이라 불리는 연줄까지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기득권 집단.
평소 친분이 있던 사이들끼리 뭉쳐 여기저기서 나를 씹었다. 그걸 과연 모를까?
이렇게 입장하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시선이 나와 할아버지에게 쏟아지니 모를수가 없다.
이곳에 온 한국 100대 기업의 수장들, 그들 모두가 적이라고 부르긴 애매하고, 모두가 갑질을 일삼는 재벌들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다. 분명, 깨끗한 사람도 있을테고 정직한 사람도 있을 터.
그러니 자연스럽게 우리 SKY그룹과 대한종합금융그룹에도 친화적인 사람들이 있다. 지금 할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하는 몇몇 사람들처럼.
“아이고, 회장님 이번에 정말 좋은 일 하십니다.”
“하하하, 여유가 있으면 챙겨야지 다~ 미래의 고객들 아니겠나?”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태진실업도 한 손 보태겠습니다. 경제위기로 여유가 많지 않아 큰돈은 아닙니다.”
“오, 그래 주면 우리야 고맙지.”
재계서열 44위의 태진실업 회장이 날 바라본다.
고개를 살짝 숙여 예의를 지켰다.
“음, 천우진 회장.”
어깨를 다독이며 말하는 그.
“고생 많았네, 앞으로도 가시밭길 일게야··· 어느 나라도 기득권은 새싹을 두려워하는 법이지.”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것이 느껴져 빙그레 웃을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이들을 초대한 이유를 밝혀야 할 때다.
정확히는 경고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겸사겸사 얻어 갈 것도 있고.
“반갑습니다. 귀빈 여러분.”
내 인사에 저마다 샴페인, 와인등을 들고 단상 위를 바라본다.
“먼저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초대는··· 협박이지···”
“후우, 없는 놈 서러워서 살겠나?”
여기저기 욕지거리도 들려왔다.
저들도 내가 듣고 있을 것이란 걸 안다. 그걸 숨길 생각없이 크게 토해내고 있으니까.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을 한 할아버지가 바쁘게 그런 이들을 스캔했다. 퍽 재미있는 상황인지라 절로 입꼬리가 들썩였다.
“불만들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내 언사도 거침이 없다.
원래도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힘이 있다. 잘못은 저들이 했고, 나는 내 나름대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 한다.
저들은 전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 이들 중, 재계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대현의 정상영은 물론, 그 아래 10위까지의 인물들이 저쪽 한켠에서 날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들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실적 부풀리기도 적당히 하셨어야죠? 오늘 타타다우의 김유중 회장이 검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다들 오늘 오전에 그 소식을 들었으리라 믿겠습니다.”
대부분의 인사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또 우리 SKY가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아니꼬우셨나 봅니다? 몇몇 기업인들은 제게 ‘살수’까지 동원하더군요?”
콕 집어 삼현이란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여러분이 여태껏 우리 SKY를 적대하셨던 적대하지 않으셨던, 아주 공평하게 ‘상생’할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단상에 제일 가까이 있던 SG그룹의 회장 차연호가 말했다.
“상생? 우리 계열사 두 개를 삼켜 놓고 상생을 하자?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자연스럽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차연호 회장님, SKY와 상생하지 않으면 분식회계로 뻥튀기한 그 실적을 가지고 주가 공격을 버틸 힘이나 있습니까? 계열사 두 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나머지 6개의 계열사도 흡수해 드릴까요?”
“크음···”
다시 고개를 들어 전부를 쳐다보며 말했다.
“상생이 아니면 절멸, 여러분의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절멸을 선택하신다면 좋습니다. SKY는 결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태껏 대출 한 번 일으키지 않고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앞으로 대출까지 끌어온다면 과연 그 자금력을 버틸 수 있는 분이 이곳에 계십니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니 부디, 상생을 택하세요.”
고개를 끄덕여 정호석에게 사인을 주었다.
정호석이 어디론가 또 사인을 보내고, 직원 몇이 바쁘게 움직이더니 내 뒤로 프로젝트 화면이 하나 떠올랐다.
[ 대기업이 함께하는 아이디어 뱅크, 힘없고 자본력이 부족한 기업들과 개인을 응원합니다.]
웅성웅성 곳곳이 시끄러워졌다.
“우리 SKY그룹과 대한종합금융그룹이 함께 출자해 설립하는 일종의 ‘공익사업’에 여러분들의 기부를 받겠습니다. 나는 이 기부가 SKY와 함께 모든 기업이 ‘상생’의 길을 걷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이제는 돈을 내놓으라 협박을 하는가!”
SG회장이 울컥했는지 고성을 토해냈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황급히 말렸다.
그를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타타다우는 우리 SKY와 상생할 마음이 없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SKY는 그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나에게 주목하고 있는 모든 회장의 눈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한 달, 앞으로 한 달 안에 대한민국에 타타다우는 사라질 것입니다.”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대한민국 내에서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꽤 인지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 타타다우였다. 김유중의 공격적인 마케팅과 문어발식 사업 확장은 분명, 해외에서도 어느정도 인지도를 쌓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다 재계의 꼭대기까지 몇 걸음 남지 않은 시점.
그런 거대 공룡을 먹어치우겠다 선언했으니, 저들이 놀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아이디어 뱅크 사업에 ‘기부금’을 받는 시점은 정확히 오늘부터 앞으로 한 달까지입니다. 그 점 유의해주시고, 지금부터는 편하게 연회를 즐기십시오, 머지않아 SKY그룹의 소유가 될 이곳 힐튼호텔에서.”
마이크에서 떨어져 단상을 내려오자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샴페인을 내미셨다.
“이놈, 노인네들 한 번 눌러주겠다고 굳이 연회를 벌렸구나?”
“하하하, 뒷구멍으로 하도 말들이 많아 귀가 간지러워 이제 앞에서 욕하라고 자리를 깔아 주었습니다.”
“하하하하, 저 치들 자존심이 많이 상하겠어.”
“적자생존, 만고 불변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쯧쯧, 오늘 이 연회장은 가시밭일 것 같으니, 이 노인네는 들어가 보련다.”
“같이 가시죠?”
“오냐, 그러자구나.”
막 연회장을 벗어나려는데 할아버지가 다시 뒤돌아 주변을 살폈다.
“이건 그놈이 보이지 않는구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이건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았다. 뱀 같은 늙은이가 겁에 질려 바깥에 나오기 꺼리는 모양이다.
“뱀이 위협을 감지한 모양입니다.”
놈의 똥 씹은 표정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는데 살짝 아쉬웠다.
“허허허, 네 놈이 또 고약한 선물을 보낸 모양이구나.”
***
검찰과 정부가 이례적일 정도로 일 처리를 잘하기 시작했다. 희대의 분식회계라 불렸던 타타다우의 건이었다. 정부는 먼저 타타다우의 주식거래를 제한했다. 그 이후 검찰은 타타다우의 분식회계 규모를 발표했다.
그 금액은 무려 14조원.
원래의 금액은 41조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나마 현재는 초기였기 때문인지 그 규모가 원래 알던 것보다는 작았다.
여기저기 김유중 회장을 욕하는 사람들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덕분에 타타다우의 임직원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미지’를 챙기자고 IMF와 국가의 권고에도 구조조정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타타다우.
거대 공룡의 머리가 길을 잃으니 몸통과 팔다리가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땅으로 떨어지는 타타다우의 이미지와 다르게, SKY그룹과 대한종합금융그룹의 이름을 날로 높아졌다.
“쯧쯧, 딴따라가 따로 없구나, 딴따라가.”
할아버지의 마음에도 없는 푸념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말 할아버지 말대로, 지금 나와 할아버지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식당에라도 가면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정계라도 진출하시겠어요?”
“예끼!”
오늘도 농담을 하다 등짝을 후두려 맞았다.
“너무 유명해지고 깨끗해져도 이런게 문제구나? 이제 어디다 담배꽁초 하나 버리지 못하게 생겼으이···”
“많이 답답하신 모양이네요?”
“원래 노인네들은 고독을 즐기는 법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않은 겸양을 부리고 다니셔야 하니 여간 피곤하셨던 모양이다.
“마침 저도 미국 갈 일 있는데, 할아버지도 같이 가시겠어요? 우리 없다고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요.”
내 말에 할아버지가 잠시 고민에 잠기셨다.
“미국이라··· 그러고 보니 해외에 나가지 않은 지 꽤 되었구나, 미국도 서울만큼 바뀌었겠어.”
“가시는 거로 알고 비행기표 예약할게요?”
“오냐, 손주놈이 시켜주는 해외여행도 재미있겠구나.”
“돈도 많으시면서 할아버지가 해외여행 보내주셔야죠?”
“싫어, 이번에는 네 놈 돈으로만 다녀올게다.”
“예, 효도할 기회를 주신다니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훈훈한 대화를 나누며 뒤쪽에 서 있던 백철웅 사장을 쳐다보았다. 눈짓으로만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백철웅이 물었다.
“출국 날은 몇 일로 할까요?”
고개를 돌려 달력을 쳐다보았다.
“타타다우 일이 마무리 되는게 5월 26일이니까, 27일로 하죠.”
“예, 알겠습니다.”
헤이즐넛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디어디를 가느냐?”
“우선 LA에 가서 볼일이 있고, 다음에 뉴욕과 워싱턴에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
“L.A와 뉴욕은 알겠다만 워싱턴?”
“예, 거기서 미국 정치인들을 만나게 될 것 같네요.”
“으음?”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아버지.
“아무래도 군수기업은 예민한 문제인지라, 대통령이 특별히 조용하게 외교관과 함께 방문해주기를 요청하더라고요. 타타다우를 완전하게 흡수하고 가겠다고 따로 얘기해 놓은 상태입니다.”
“쯧쯧,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니, 정부 입장에서도 미국놈들과 확실하게 집고 넘어가고 싶겠지, 그나저나 결국 그 망할 사업을 하긴 하는구나.”
“인간이 발명한 첨단기술의 핵심은 모두 무기에 있습니다 할아버지, 거기서 파생될 기술들이 앞으로 인간 사회에 어떻게 쓰일지는 아무도 모르죠.”
“적당한 기술들 빼돌려 사업에 써먹겠다는 얘기구나.”
“하하하하, 맞습니다.”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뭐, 이 할애비도 주먹과 칼로 쌓은 부가 있으니 이런 말 하기가 조금 그렇지만, 굳이 얘기하자면 대놓고 총, 칼 들고 설치는 놈들치고 잘 된 놈들 몇 못봤다. 조심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비행건을 처리했는지 어느새 다시 다가온 백철웅이 말했다.
“회장님, 천가키즈 경호, 보안 1기생들이 곧 수료를 마칩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가키즈 경호, 보안 1기생들이란 나와 같이 축구를 하던 아이들을 일컫는다. ‘아이들’이라고 했지만 성인이 된 친구들도 꽤 많았다. 우리 천가키즈 프로젝트에는 갓 성인이 되었지만, 보육원을 벗어나 할 것 없는 친구들도 흡수했으니까.
“철웅이 네가 그렇게 말하니 믿어보마.”
“예.”
***
이건의 저택 집무실.
“회장님.”
남종현이 초췌해진 이건을 불렀다.
기력이 많이 달리는지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 이건.
“왜, 중요 업무들 아니면 따로 보고하지 말라니까?”
언짢아하는 언사에 남종현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금일이 ‘아이디어 뱅크’의 기부금 모집 마지막 날이라 부득이하게 찾아뵀습니다.”
“하! 상생이냐, 적대이냐를 고르는 기한이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뇌리에는 그때 자신의 침실에서 보았던 그 메모장이 아직도 선명했다.
아이디어 뱅크라 읽고 SKY그룹이 다른 그룹들에 찬조를 하라 협박하는 일. 쉽게 말해 기존의 기득권 재벌들에게 ‘삥’을 뜯는 일이었다. 힘이 없으니 내놔라 하는 것이었고, 이건은 그것이 못내 자존심 상했다.
전경련 전부가 ‘기부’를 가장한 헌납을 했다.
삼현이라고 버틸 재간이 없다.
SKY그룹을 적대하는 세력이 크다면 그곳에서 잠시 비라도 피해 볼 만 하건만, 거대 공룡 타타다우가 쓰러지는 마당에 감히 그들에게 엉겨볼 기업가는 없었다.
정확히는 자신들의 기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재벌 혹은 기득권이란 타이틀을 빼앗기기 싫어서라는게 옳았다.
까드득 이를 앙다물었던 그가 말했다.
“대현은 얼마를 했더냐?”
남종현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죽어도 고개 숙이기를 싫어하던 양반이었다.
군부독재시절 돈으로 꼬시면 꼬셨지 고개 숙이지 않던 인물, 모두가 벌벌 떨던 독재시절 정부를 무시하고 ‘밀수’까지 일삼았던 기업의 핏줄이 고개를 숙일 것 같아서였다.
“30억을 했습니다.”
“그 수준에 맞춰서 해.”
“··· 예.”
이건도 민망했는지 굳이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지금은 잠시 웅크리고 있을 때다. 이 몸이 굳이 바깥으로 나돌지 않는 것도 그 이유야.”
“예, 회장님.”
“종현아, 나 이건 아직 죽지 않았다 잠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자신의 눈에서 불안을 읽었을까? 앞을 내다보는 것처럼 말하는 이건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는 남종현.
“죄송합니다 회장님.”
“오냐, 불안에 떨지 말아라 삼현은 굳건하다. 이 나라의 기둥 중 하나가 분명하다.”
“예.”
“타타다우의 정리가 끝나면 다시 보고해.”
“예!”
문을 닫고 집무실을 나온 남종현이 작게 혼잣말을 내뱉는다.
“SKY가 무섭긴 무섭구나··· 하늘은 하늘인가.”
< 제 5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