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55화 (55/458)

< 제 55화. >

탕!

테이블을 내려치며 꽤 고압적인 자세로 날 바라보는 황익현 검사.

“이제 겨우 성인이 된 사람이 250억 달러가 넘는 돈을 가지고 있어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변호사가 발끈한다.

“당신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면 말이 안 되는 일로 치부합니까?”

“대한민국 재벌들이라고 해도 결코 가지지 못한 돈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하, 정말··· 회장님 의미 없는 대화가 도돌이표처럼 돌고 도는 것 같은데, 이만 나가실까요?”

변호사의 말에 기지개를 켜며 답했다.

“그럴까요? 이제 좀 지루하던 참입니다.”

붉으락푸르락 안색이 변한 황익현 검사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몇 번 얘기한 것 같은데, 그 어떤 법적 하자도 없고, 탈세도 없습니다. 스폰서한테도 그렇게 전하시고.”

“이새끼가.”

스폰서란 말이 놈의 분노 버튼이었을까? 제 놈은 나름 서슬 퍼런 분노를 표현하는 것 같은데 글쎄, 내겐 전혀 서슬 퍼렇다 느껴지지 않았다. 가소롭달까? 변호사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한껏 비웃는다.

“에휴, 검찰도 어디까지 썩은 건지···”

막 벗어나려는 내게 황익현이 소리를 지른다.

“앉아! 아직 안 끝났어!”

이제 좀, 받아주기엔 짜증이 났다.

뒤돌아 황익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춤에 손을 올리고 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봐, 황익현 검사.”

“이 새끼가.”

“새끼, 새끼 거리지 마 듣는 새끼 기분이 뭣 같으니까, 잘난 검사 명함 지방 돌아다니면서라도 지키고 싶으면 처신 잘해.”

분노에 몸서리치는 놈에게 계속 말을 이었다.

“검찰이랑 같이 국세청에서도 들어왔어, 그런데 아무런 문제가 없네? 국세청도 지금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거야, 우리 SKY는 절세할 수 있어도 안 했거든, 다 냈어 무식하고 우직하게.”

“지랄하지 마, 병신도 아니고 그런 재벌이 어디 있어?”

놈의 대답에 불쑥 웃음이 튀어나왔다.

“크큭,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거다. 아, 오기 전에 조금 알아봤는데 말이야? 황익현 검사 당신 와이프가 타타다우 김유중 그 노친네 처조카 되더라고?”

입술을 씹는 황익현의 어깨를 툭 치고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혈연, 지연, 학연.

그런것들을 만들기 위해 재벌들은 자신들의 핏줄을 정략결혼이 아닌 ‘전략결혼’시키기를 꺼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효율적인 지배만을 생각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었다.

비단, 김유중만이 이번 사건의 배후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도, 정상영도. 또 다른 재벌들도 모두가 암묵적 동의하고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뻗었을 터.

사냥개 역할은 대검찰청 중수부 검사가 맡았지만, 그 위로 어디까지 매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건 이제 차차 조사해서 알아보면 될 일이고 서두를 필요는 없다.

막 문을 벗어나기 전.

“어이, 사냥개.”

내 부름에 패배감에 젖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리는 황익현.

“사냥꾼들한테 전해, 사냥감이 눈치를 챘으니까 모가지 물어뜯길 준비들 하라고.”

벌써 검찰에 출두해 조사받은지도 얼추 30시간이 넘어간 것 같다.

모두 내가 자진해서 한 일이다.

변호사는 굳이 이럴 필요가 없다고 계속 얘기했지만 아니었다. 꽤 오랜시간 조사를 받는게 여러모로 언론에 보여지는 부정적 이미지에 효과가 있을터다.

‘뭐가 있으니까 조사를 저렇게 오래 받겠지.’

‘하긴 깨끗하면 조사하는데 오래 걸리겠어?’

그런 부정적인 반응들, 그리고 사람들의 궁금증과 관심들. 난 그런것들이 더 모였으면 싶었다.

검찰청 바깥으로 나가니 몹시 기다렸다는 듯, 중구난방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

“SKY그룹의 탈세 혐의 인정하십니까?”

“SKY그룹과 정부의 커넥션이 사실입니까?”

“SKY그룹이 미국자본이라는게 사실입니까?”

거의 뭐 음모론이 따로 없다.

워낙 유명한 언론사들이니 그들은 무시했다. 한쪽으로 편향된 기사를 주구장창 뽑아대는 것으로 유명한 것들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제 놈들 입맛대로 제단 할 터.

30시간이나 검찰에 있었는데 어쩐지 내 얼굴보다는 기레기들의 얼굴이 더 초췌해보였다. 불쌍해보이지만 한마디도 해 줄 생각은 없다.

문득 영화 속 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불철주야 조뺑이 치소.’

나는 그저 무표정으로 차량에 오를 뿐이었다.

***

다음날.

언론은 미친 듯 불타올랐다. 이제 마치 SKY그룹은 비리와 탈세로 점철된 기업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얼마나 주목도가 높냐면, 우리의 기자회견이 각종 언론사에 생중계될 만큼 국민들의 관심도가 매우 높았다.

한마디로 이제 때가 되었다는 얘기다.

대통령과 얘기했던 사업을 밝힐 순간이자, 끝도 없이 상승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단숨에 역전시킬 타이밍.

평상시보다 한껏 힘을 주고 단상위에 올랐다. 일부로 메이크업도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도록 부탁했다.

강렬한 플래시가 눈을 어지럽히지만 난 태연하게 마이크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SKY그룹 천우진입니다. 우선, 현재 논란이 되는 ‘SKY그룹 사태’는 전부 사실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날 선 질문따위는 날아오지 않았다. 기자회견을 예고하며 사전에 언론사에 모든 자료를 보내두었기 때문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SKY그룹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점심이 지나고 언론들은 조용했다.

1원 한푼 빼놓지 않고 납입한 세금부터 JB모건과 골드만글러브에서 보내온 투자 현황까지 투명하게 공개했다. 자연히 우리를 저격하는 언론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입을 닫을 수밖에 없다.

“우리 SKY그룹은 많은 국민분께서 우려하시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을 인수 할 수 있는 자금력이 있습니다. 독과점을 경계하고 싶어 하시는 부분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해서, 정부와의 협상 끝에 SKY그룹의 자금 일부를 새로운 산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자 하나가 물었다.

“무슨 산업입니까?”

“방위산업.”

장내가 웅성거렸다.

“군수기업을 설립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마치 자선사업처럼 받아들이던 정부의 태도.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겠다는 내게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오히려 감사를 표할 만큼, 성공이 어려운 분야인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역으로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돈을 허공에 날리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분야지만, 적어도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을테니까.

그러니까 방위산업은, 이미지는 이미지대로 챙기고, 이득은 이득대로 취할 수 있는 가재 잡고 도랑치고 누이는 안 좋고 나만 좋은 일이라는 얘기였다.

“그렇습니다. 우리 SKY그룹은 첨단무기, 항공, 선박에 이르기까지 방위산업체를 설립하고,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군수기업을 설립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투자금을 사용하여 대한민국을 SKY독과점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국가의 방위를 위해 투자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정부 입장에서도 SKY의 독점이 부담스러운 찰나일터. 스스로 자본을 다른곳으로 쓴다고 해 줬으니, 다음에 무언가 하나를 더 요구하더라도 정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들어 줄 수밖에 없을 테다.

한 마디로, 쿠폰 하나 적립했단 얘기.

기자들이 번쩍 손을 들고 질문을 쏟아내려 하지만 나는 더이상 해 줄 말이 없었다. 너무 디테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꼬투리를 잡힐 명분을 주는 것이다.

“이상으로 SKY그룹의 입장표명을 마칩니다.”

사실 내가 원하는 것도 SKY가 대한민국의 많은 산업을 독점하길 바라고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 한번은 잠시 물러나지만, 곧 좋은 때가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아직 나는 젊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바통을 이어받은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할아버지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끝을 모르고 서민의, 서민을 위한, 서민에 의한 금융사를 표방하고 있는 대한종합금융그룹은 그 위상이 대단한 상황이었다.

“힘없고 가난해 가진바 기술을 빼앗기고! 뛰어난 아이디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천재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대기업의 횡포! 재벌가의 횡포로······”

할아버지는 거의 정치인 저리 가라 할 연설을 토해내셨다. 과연, 내가 방산진출을 얘기했을 때 보다 파급력이 훨씬 컸다. SKY와 대한종합금융그룹이 합동 출자하는 사업 ‘아이디어 뱅크.’

나와 할아버지는 호구가 아니다.

당연히 저 ‘공익사업’에도 우리의 수익성은 반드시 존재한다. 물론 기존의 기업들과는 다르게 개발자 혹은 아이디어를 낸 사람에게도 많은 이익금이 돌아가게 만들 생각이다.

다른 재벌가를 부정적으로 말하며, 반대로 우리의 가치를 더 높게 만드는 할아버지 특유의 화술에 기자들을 비롯한 언론이 자연스럽게 집중했다. 그 틈을 타 나는 정호석과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

내가 검찰에 출두한 30시간 동안.

내 사람들은 가만히 놀고 있던게 아니었다.

“정의찬 검사 준비됐죠?”

“예, 전화 한 통이면 영장 나옵니다.”

만족스러운 정호석의 보고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일 아침이 좋겠네요, 출근과 동시에 사무실이고 뭐고 다 통제하고, 싹 쓸어서 조사하라고 얘기하세요.”

“예.”

고개를 돌려 김장원을 바라보았다.

“메신져는 준비됐습니까?”

“흐흐, 그람요 날쌔고 조용한 아그들로다가 준비혔습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찰리 박과 강기태가 30시간동안 꼬박 밤을 새워 준비해 놓은 서류를 살폈다.

“하! 대현, 삼현, 타타다우, 로템, KS··· 쯧쯧, 끝이 없네요 끝이 없어.”

내 말에 찰리 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외환위기 때문에 실적 부풀리기를 하려고 좀 무리수들을 두었다 싶습니다.”

“이거 공개되면 세상이 시끄럽겠습니다.”

강기태가 내 말을 받았다.

“그럴겁니다. 당장 조금씩 회복되던 주가가 한순간에 쭉 빠질겁니다. 매수 타이밍인 것 같네요.”

자나깨나 돈 먼저 생각하는 아주 바람직한 증권맨이다. 회계장부 중, 삼현의 회계장부 요약본을 쭈욱 찢어 뒷면에 자필로 메시지를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김장원에게 주었다.

“이걸 전달해주면 됩니다.”

“흐흐흐, 알겄습니다. 아따, 저는 회장님이 찰리 박씨 사건 깜빡 잊고 계시는가 혔습니다.”

“그럴리가요, 때가 아니었을 뿐,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선물 하나 줘야죠?”

“크크, 그 노친네 오줌이라도 지리는 거 아닌가 몰겄습니다.”

“정호석 사장님.”

“예! 회장님.”

“전경련에 연락 넣으세요, 내가 좀 보고자 한다고, 위치는 타타다우의 힐튼호텔이 좋겠네요. 아아, 각 회원 마다 이 요약본 하나씩 넣어서 보내주시는 것 잊지 마시고.”

“예.”

다시 찰리 박에게 시선을 옮기고.

“내일부터 타타다우 주가가 폭락할겁니다. 검찰의 조사가 착수될 테니까.”

기다렸다는 듯 찰리 박이 특유의 이리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예, 싹 쓸어 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선언했다.

“이달 안에 타타다우 흡수 끝냅니다.”

““예, 회장님!””

“자, 그럼 각자 일 보세요.”

***

아침 일찍 출근한 대현의 총수 정상영 회장.

그는 어지간한 직원들보다 항상 먼저 출근하는 바지런한 상사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곱게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으음?”

대뜸 내미는 서류 봉투.

정상영의 비서실장이 대신 받아 들어 그것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정상영에게 건냈다.

내용물을 확인하고 눈을 부릅뜨는 그.

그제야 말을 잇는 젊은 사내.

“SKY그룹 천우진 회장님이 오늘 오후 6시, 힐튼호텔 연회장에 전경련 회원분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지금 손에 들고 계신 봉투안에 초대장이 있으니, 부디 참석해 주시길.”

제 할 말만 내뱉고 사라지는 그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정상영은 부들부들 떨며 작게 읊조렸다.

“쯧,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했더니··· 이거 체하겠구만. 아무래도 벌집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이곳까지 쫒아오는 보면.”

***

같은시각 타타다우의 김유중의 자택.

출근길에 들이닥친 검찰 때문에 몹시 당황스러운 얼굴이다.

“네 놈 뭐야!”

“김유중 회장,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이게 지금 무슨 개소리야!”

미란다 원칙을 읊던 정의찬 검사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 대국민 사기를 치고 있더라고? 분식회계로 말이야.”

“네 놈이, 고작 평검사 나부랭이가 감당할 수 있을성 싶으냐?”

“글쎄, 그건 가서 얘기합시다. 이거 보이시죠? 영장, 계속해서 불응하시면 수갑 채워서 갑니다.”

“천우진이야? 천혁수 회장 그 노인네가 시켰어? 내가 먹여주고 입혀주는 직원들이 몇 명인지나 알아! 외환위기로 시름시름 하는 국민들 피고름··· 어헉.”

수사관 하나가 거칠게 김유중의 팔을 꺾더니 수갑을 채운다.

“쯧쯧, 갑시다.”

***

커다란 침실.

홀로 눈을 뜬 이건이 허리를 세워 목을 한번 돌리며 스트레칭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급스러운 자기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르고는 마셨다.

“푸웁, 뭐야!”

평소에 마시던 물의 맛이 아니었다.

누리끼리하고 역한 냄새가 나는 그것.

“서, 설마?”

주전자의 뚜껑을 열고 코를 박았던 이건의 인상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고개를 휙 돌려 소리치려는 찰나, 두꺼운 나무문에 꽂혀있는 선명한 칼 하나가 보였다.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걸어간 이건이 칼에 종이가 박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떨리는 손으로 칼을 뽑고, 칼에서 종이를 빼 내용을 확인했다.

부들부들.

북풍설한의 오한이라도 느꼈을까 미친듯이 떨리는 손, 그리고 그 손에 들린 서류 중 일부에는 빨간색 펜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살려는 드릴게 ]

< 제 5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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