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53화 (53/458)

< 제 53화. >

전자음과 함께, 이건의 저택 출입문이 열렸다.

고급 세단이 바깥으로 나오다 돌연 후미등에 불이 들어오며 멈추어 섰다.

“뭐야?”

차 안 이건의 불쾌한 음성.

“죄송합니다. 회장님, 앞에 차량이 막고 있어서.”

이건이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기울여 전방을 확인했다. 확실히 길에 가로로 세워진 봉고차가 보인다.

“처리해, 오늘 급한 거 몰라?”

“예!”

기사가 내리고, 이건의 저택 보안팀들이 서둘러 봉고차로 향한다.

“으허억!”

“우웁.”

경비와 운전기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치고 엉덩방아를 찧는 등, 매우 놀라고 경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건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종현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대충 손만 저은 이건, 남종현이 서둘러 차량에서 내렸다.

“뭣들 하는 놈들이야?”

남종현의 서슬 퍼런 음성에도 경비들과 운전기사는 당황하고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 남종현은 운전기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음!”

운전기사의 손가락이 향한 봉고차의 차 안.

차량의 유리가 붉어 보였는데 그건 붉은색 틴팅이 아니라 피였다. 피칠갑을 한 봉고차의 안,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시발···”

어제부터 연락이 되지 않던 보안 4팀의 팀장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후우.”

심호흡을 내뱉고 4팀장의 입에 물려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을 꺼내는 남종현.

[좋은 선물 잘 받았습니다. 아! 금은 좋은 곳에 잘 썼습니다. 모쪼록 건강하세요]

노란색 바탕에 붉은색 글씨.

포스트잇을 들고 있는 남종현의 손이 벌벌 떨렸다.

“도대체 뭔데 그래!”

남종현은 뒤쪽에서 들리는 이건의 서슬 퍼런 호통에 서둘러 뒤돌아서 외쳤다.

“회장님 보호해!”

경비들과 운전기사 서둘러 이건을 에워쌌다.

“뭐야?”

뚜벅뚜벅 이건에게 다가간 남종현이 피로 된 글자가 적혀있는 포스트잇을 건네며 말했다.

“회장님··· 아무래도 당분간 외출은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촥.

거칠게 포스트잇을 가로채 읽는 이건.

부릅떠진 눈,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

꾸깃하게 포스트잇을 오른손에 쥔 이건이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주주총회야, 주주총회! 그런데 내가 얼굴은 안 비치면, 삼현 전기는 그냥 넘어가는 거라고!”

남종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이건의 발이 남종현의 정강이에 날아들었다.

“이 새끼가 누굴 가르쳐!”

남종현을 밀쳐내고 뚜벅뚜벅 봉고차로 가 한때는 그의 직원이었던 그것을 직접 끄집어내는 이건.

덕분에 이건의 손과 옷에 붉은색 피가 흥건하게 묻었다.

“이 쓰레기들 빨리 안 치워! 길 트라고 길!”

경비들과 운전기사는 인간 같지 않은 그의 모습에 두려움에 떨며 황급히 움직였다. 남종현은 전화기를 들어 어딘가에 전화했다.

“빨리 인원 보강하고 저택 정문 처리팀 불러! 빨리!”

그러곤 황급히 달려와 봉고차 안으로 들어가려는 이건을 온몸을 던져 만류했다.

“회장님 제발 고정하십시오!”

“이 개새끼들이 건강하라고? 금은 좋은 곳에 썼어? 나 이건이야 이건! 대한민국은 내 세상이야! 내 나와바리!”

이성을 잃은 이건은 마치 야차와 같았다.

평소 감추고 있던 성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그에겐 토악질이 올라올 것 같은 송장들도 그저 한낯 쓰레기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직원이 자신의 명에 의해 명을 달리했단 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계열사 삼현전기를 빼앗기지 않는게 더 중요했다.

***

대충 보고를 받으셨기 때문일까, 꽤 지친 표정을 하고 들어온 나를 반기는 할아버지.

“고생했다.”

“아닙니다.”

찰리박과 음주를 아셨는지 꿀물을 내미신다. 소파에 앉아 간신히 그것을 비워내고 할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이건 그 뱀같은 놈이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구나, 눈앞이 어두운게야··· 감히 우리 천가에 그딴 짓거리를 해 오다니 쯧쯧.”

“부하 직원들까지 그렇게 챙길 줄 몰랐겠죠, 이건 그놈은 제 주변에만 경호원들을 배치하니까요. 생각이 고작 그 정도인 겁니다.”

“그래, 보통 재벌 놈들이 그렇지, 제 놈들만 아는.”

“사람을 돈으로만 부리고 위협과 협박만 할 줄 아는 놈들입니다. 그러니 아직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만 어깨에 힘을 주죠.”

“쯧쯧 더러운 일로 부를 쌓은 놈들이니 오죽하겠더냐? 밀수로 시작해 주먹패 놈들, 야쿠자 놈들이랑도 어울리던 것들이다. 우진이 너도 너무 방심하지 말거라, 얼마든 더러운 술수를 부리는 놈들이니.”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경호, 보안, PMC 분야를 심심하다고 설립한 거 아닙니다.”

“그래, 혜안이 있다니 기대를 해 보마.”

할아버지가 허연 이를 내보이며 말했다.

“좋은 선물은 받았으니, 우리도 좋은 선물을 줘야하지 않더냐?”

웃는 얼굴과는 대비되는 위험한 냄새가 할아버지 몸 곳곳에서 뿜어져 나왔다.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내는 호랑이와 같은 아주 서슬 퍼런 기세였다.

“그렇죠, 받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할아버지가 기대 어린 눈으로 날 쳐다본다.

“어쩐지 네 놈 말에는 피 냄새가 나질 않는구나.”

눈치가 귀신이다.

더러운 방법을 썼다고 똑같이 더러운 방법을 쓸 생각은 없다. 정확하게는 ‘아직은’ 없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조금 더 쪼이고, 쪼여서 답답해 숨을 못 쉴 것 같을 때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고 안간힘을 쓸 때.

그때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 줄 것이다.

그리고 종래엔 비릿한 피 냄새가 풍기겠지.

“하하하, 신사답게 행동해야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할아버지.

“쯧, 재미가 있다가 마는구나.”

“좋은 때가 올 겁니다 할아버지.”

“기다리다 죽는다, 기다리다 죽어, 이 할애비 나이를 잊지 말거라.”

“머지않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어쩐지 할아버지가 개운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계신다.

“뭐 궁금한 거 있으세요?”

기다렸다는 듯 질문하시는 할아버지.

“대통령과 만남에서 했던, 그 마지막 사업 얘기 말이다.”

“아아, 네.”

“별다른 얘기가 없구나?”

자신의 과거 얘기까지 꺼내며 걱정을 하시던 일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을 만나고도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별말이 없으니 먼저 묻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때가 아니다?”

어째서냐는 듯 이유를 재촉하시는 모습.

“SKY그룹도 대한종합금융그룹도 지금은 이미지가 너무 좋아요 할아버지.”

“그렇지, 모두 칭송이 자자하다.”

“예, 그러니 지금은 아닙니다. 조금 더 이미지가 나빠졌을 때,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올 때. 그때 그 사업을 발표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애국심을 자극하여 이미지를 쇄신하겠다?”

“예, 그리고 그 정도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방안도 고려 중입니다.”

할아버지가 흥미롭게 날 바라보신다.

“다른 방안은 무엇이냐?”

“그 사업은 사실 SKY 그룹에만 도움이 됩니다.”

“음··· 그렇지.”

“대한종합금융 그룹에도 함께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하고 기획해볼 만한 것은 ‘기술 콘텐츠 개발 지원’사업입니다.”

“기술 콘텐츠 개발 지원?”

“예, 우리나라의 기술력 있는 회사들, 좋은 콘텐츠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아이디어 같은 것들을 전부 기득권자에게 수시로 빼앗기고 있으니까요.”

“음, 대기업이 중소기업들을 쥐어짜는 것처럼?”

“예, 그 사업에 SKY그룹과 대한종합금융그룹이 함께 출자하는 겁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적정량의 보상은 받아야지요, 가령 SKY그룹은 해당 기술로 실 제품을 생산하고, 기술 개발자에게 로열티를 지급하는 방식을 취한다거나, 투자해 주고 지분을 받는다거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우리 대한은 투자해서 지분만을 획득하게 되겠구나.”

“예, 금융사니까 어쩔 수 없죠.”

“그것만으로도 확실히 득과 득만 있는 사업이겠구나, 어련히 우진이 네가 알아서 기술과 콘텐츠들을 제한 할 테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얼토당토않은 기술과 콘텐츠를 들이밀며 지원해주세요 한들 지원해 줄 사업이 아니었다. 가능성 있고, 수익성 확실한 것들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미지를 챙기는 것은 덤이었다.

기존의 재벌그룹, 재벌가들이 했던 것처럼 갈취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보다. 콘텐츠 제작에도 입김을 불어 넣어 자신들의 기업을 홍보하려던 그 악의적인 수단과도 다르다.

자연스럽게 국민들은 그것을 깨닫게 될 테고, 우리 이미지는 상승한다. 모든 이익을 제 손에 쥐려던 재벌 놈들과는 다르다, 일부는 내 손에 쥐지만 일부는 나눠준다.

쉽게 말하면, ‘박리다매’의 논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난 다양하고 많은 기술을 갖게 되고 그것으로 쌓은 부를 개발자와 나눈다.

정말 당연하고 형평성에 맞는 일을, 당연하지 않고 불공평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이 자본주의 세상이다.

“돈이 없으면 기술도 빼앗기는 세상, 대한종합금융그룹과 SKY그룹이 만드는 일종의 ‘공익’사업인 기술 콘텐츠 개발 사업은 국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될 겁니다.”

“오냐, 취지가 좋다 언제든 말만 하거라, 적극 참여하마.”

“하하, 예.”

***

며칠 뒤.

SKY사옥 회장실에 앉아 조간신문들을 살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내용은 대부분 우리 그룹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

‘SKY 무분별한 사업 확장 이대로 괜찮은가?’

‘기업 위의 기업, SKY 무서운 독주.’

‘SKY 또 인수, 이번엔 대현건설, 삼현전기!’

‘GK도, 대한통신도, 자연식품도 당했다!’

‘엄청난 확장세 SKY, 제지할 방안 시급.’

‘식품부터 소재, 자동차 빼고 다 있다? SKY.’

꽤 유명한 언론사들부터 지방 언론들까지, 모두 스카이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다.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보스.”

찰리 박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예상하던 일이었고, 언론의 주장은 타당했다. 다만 기분 나쁜 것은, 저 언론들이 대현이나 삼현, 그것도 아니면 재계서열을 주름잡는 재벌가의 압력에 의해 해당 기사를 쏟아냈다는 정도.

“대현건설은 내일이고, 삼현전기는 오늘이죠?”

“예, 회장님.”

“하하 이건 그 노친네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아등바등하더니 결국은 삼현전기를 내 주네요.”

강기태가 꼬시다는 표정으로 말했고, 찰리 박도 굳이 표현은 하지 않지만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가장 피해를 본 인물이 찰리 박이니 이해가 되었다.

“우선 언론들 불타도록 놔두세요.”

이어진 내 말에 강기태가 우려를 드러냈다.

“음, 안 좋은 이미지가 계속되면 정부 입장에서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대한민국 재계 서열 상위의 기업 중, 우리에게 계열사를 빼앗기지 않은 그룹이 없습니다. 아, GL화학과 타타다우를 빼고요.”

아직도 강기태는 정부를 두려워한다.

대한민국이 그렇다. 정부를 두려워하는 풍토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더 시끄러워야 합니다. 아마도 삼현전기와 대현건설을 완벽하게 먹으면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그때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것들을 발표하면 더 큰 반사이익이 있을 겁니다.”

찰라 박과 강기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GL은 지배구조가 굳건해요, 굳이 건드려서 손해 볼 필요 없습니다. 타타다우는 곧 통째로 가져올 거고요. 강기태 본부장.”

“예, 회장님.”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SKY를 걱정하는 만큼, 돈을 벌어 주세요, 그 돈이 우리 SKY를 지켜줄 겁니다.”

내게 인정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을까? 조금은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자, 갑시다. 욕먹으러.”

강기태와 찰리 박이 내 말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건의 똥 씹은 표정을 볼 수 있을까 묘한 기대감이 올라온다.

***

삼현전기의 본사 대 회의실.

새로운 최대주주 SKY인베스트 먼트가 주주총회를 소집했고, 많은 주주가 총회에 참석했다.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하는 삼현그룹의 총수 이건 회장도 당연히 자리에 참석했다. 두 눈 부릅뜨고 회사를 빼앗겼지만, 아직은 자신이 건제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야 계열사들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잠재울 수 있었다.

철컥.

대 회의실 문이 열리고 당당히 걸어오는 인물, 그는 SKY그룹의 어린 총수, 천우진이었다.

반응은 두 가지였다.

언짢아하거나, 꼬리를 흔들며 어떻게든 자리를 지켜볼까 하거나. 이건은 못내 그 꼬라지가 보기 싫었다. 최대주주 스카이인베스트먼트의 요청으로, 언론에 공개되고 있기에 표정관리에 힘썼다.

그에게 뚜벅뚜벅 당당하게 보폭을 옮겨 온 천우진이 손을 뻗어 악수를 건냈다.

보는 눈이 많지만, 이건은 천우진의 손을 거절했다.

“하하하, 많이 언짢으신가 봅니다?”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이건.

천우진이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말했다.

“오다가 뭐 잘못 드셨어요? 표정이 그냥 큽, 다음엔 뭘 담아 드릴까? 전자? 물산? 힘들게 얻어간 자동차?”

< 제 53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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