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52화 (52/458)

< 제 52화. >

내 집무실에서 마시는 헤이즐넛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언제나 옳다. 그게 기분 좋은 보고와 함께라면 더욱.

“삼현전기 공개매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찰리 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요, 순조롭습니까?”

“예, 증시가 바닥에 있다 보니 15% 높은 가격에 매도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분 51%에서 멈추지 말고, 계속 매입하세요 완전한 방어. 그걸 원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현건설은요?”

“오늘 공고를 올렸습니다. 이것도 삼현전기와 같이 무제한 매수하겠습니다.”

“좋네요.”

고개를 돌려 강기태를 바라보았다.

“본부장.”

“예, 회장님.”

“요즘 심심해요?”

원조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강기태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닙니다. 요즘은 뭐, 제가 부르는 가격이면 너도나도 빌딩, 땅, 아파트를 들고 와서요. 좀 무덤덤해진다는 느낌은 있습니다.”

“따로 굴리는 건 어떻습니까?”

“50억 달러 정도를 미국 IT시장에서 굴리고 있습니다.”

“좋네요.”

“예 수익률이 꽤 괜찮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구골에서 철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한동안 등한시하고 있던 철수의 소식에 흥미가 돋았다. 이제는 구골의 핵심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하니 천가키즈 프로젝트도 제법 성공적이라 할 만하다.

“오, 뭐랍니까?”

“래리와 페이지가 IPO를 고려하고 있는데, 회장님의 의중이 궁금한 모양입니다.”

“호오, 벌써 덩치가 커진 모양이네요 3천만 달러를 다 썼답니까?”

“아직은 남았지만, 그들이 준비하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IPO라···”

IPO.

쉽게 말하면 주식시장 상장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기업이 자신들의 상황을 공개하고, 투자자를 공개 모집하는 형태라고 보면 옳다. 구골의 경우 ‘기준’들이야 충분하니 상장에는 당연히 문제가 없을 터.

IT 붐과 함께 새로운 형식의 검색엔진까지 탑재하고 있으니 빛을 볼 것은 자명한 사실.

주가가 빠르게 상승할 것도 당연한 일이다.

“래리와 페이지는 나에게 함께 지분을 내놓자는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경영권 문제도 있으니 예민할 테고.”

강기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철수가 눈치를 보는 듯 한국말로 얘기하는 것으로 봐 회장님의 생각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구골의 지분은 스카이인베스트먼트가 아닌, 내 이름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뭐가 다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스카이인베스트먼트가 망했을때를 위한 ‘보루’를 준비했다.

“스카이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하는 방식도 고려해봐야겠습니다.”

“아, 그렇게 되면 래리와 페이지의 경계가 극도로 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만나서 얘기하는 거로 하죠, 우선 본부장은 철수와 주기적인 연락을 통해 구골의 자금 사정을 파악하세요.”

“알겠습니다.”

“철수는 잘 배우고 있답니까?”

강기태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예, 래리와 페이지도 이제 철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얘기도 한답니다. 이번에 준비하는 작품이 철수가 헤드 개발자라고 했습니다.”

“호오, 뭔지 궁금하네요··· 보자, 스카이 팟이 출시될 때쯤 해서 미국에 한 번 가야겠습니다.”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이제 4월이니 빠르면 9월, 늦어도 10월이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왼손을 들어 새로 산 시계를 확인했다.

팔에 착 감기는 가죽시계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곧 해가 쨍쨍한 여름이 되면 메탈시계를 하나 더 사야겠지만, 역시 메탈보다는 천연가죽이 주는 이 느낌이 편안함을 느끼게 만든다.

아직 시간은 2시 30분.

“음, 본부장.”

“예 회장님.”

“신소재 개발 위주의 회사들 매입하세요.”

“신소재라면 정확히 어떤 것들을 말씀하십니까?”

“무엇이든, 투명하고 기술력이 있는 회사라면 주워 담으세요, 본부장 요새 시간이 꽤 비는 것 같으니 해외시장에도 손을 뻗어보시고요.”

일감 지시에 강기태가 헤벌쭉 웃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워커홀릭답게 새로운 지시가 반가운 모양이다. 초 단위로 변화하는 숫자에 즐거움을 느끼는 변태적인 남자가 그동안 한국 부동산 시장의 거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유동 자산은 당연히 80억달러 정도를 유지하세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찰리 박을 바라보았다.

“찰리, 더 할 보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좋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몇 분 일찍 끝났네요.”

우리는 보통 주식시장 마감까지만 일 했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났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않겠는가?

인터폰을 누르고 ‘차를 불렀다.’

***

천우진에게 인사하고 있던 찰리 박에게 강기태가 물었다.

“찰리, 낮술 어때?”

“기태 나 운동할 시간이야.”

“쯧, 그놈에 운동.”

“하하하, 너도 운동 좀 하라고 롱런하고 싶지 않아?”

“너는 살을 좀 찌워야 돼, 너무 말랐어.”

“무슨 소리야? 너는 이소룡한테도 그런 얘길 할 거야?”

“쯧, 부러우면 지는거지··· 에휴, 난 오늘도 영화나 한 편 때리면서 맥주나 마셔야겠다. 그 지겨운 운동이나 하러 가라 훠이~”

어느새 강기태와 친해진 찰리 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전담경호인들의 차에 올랐다.

“헬스장으로 간답니다. 하여간 찰리는 운동을 너무 해요, 팀장님이 좀 말리세요 미래에 경호원이라도 하려고 저러나.”

강기태의 농담에 찰리 박의 전담경호 팀장 박윤식이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찰리 박이 7인승 SUV가 부드럽게 출발하고 강기태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음?”

강기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찰리 박의 전담 경호는 8인이 2교대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찰리 박의 차량 뒤로 또 다른 차량 두 대가 더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야, 그 새 경호를 늘렸나? 하긴, 대기업들 털고 있으니 당연한건가?”

강기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어서 도착한 자신의 차량에 올랐다.

***

눈을 감고 가상의 적을 그린다.

오늘의 적은 남자라면 한번쯤 동경했을지 모를 마이크 타이슨이다.

호흡이 가빠지고 뜨거운 심장이 방망이질 치며 전신에 혈액을 공급한다.

슉, 슉.

주먹이 공기를 가르는 느낌을 즐기며 타이슨과 혈전을 펼쳤다. 상대가 될 턱이 없으니 섀도우지만 내가 졌다.

1라운드가 끝나고, 막 2라운드가 시작될 타이밍.

“회장님.”

정호석의 부름에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예.”

“대현그룹 정상영 회장이 연락했습니다.”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삼현은 통, 연락이 없네요?”

“하하, 지기를 싫어하는 놈이니 그럴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 대답은 아시죠?”

“예, 바쁘시죠?”

척하면 척이니 이렇게 편하다.

“타이슨이랑 2라운드를 뛰어야 해서.”

“오, 오늘은 타이슨이군요 건승을 빕니다.”

“예, 죽지 않을 만큼만 맞고 올게요.”

정호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타이슨은 복서죠, 다리 방어에 소홀 할 겁니다.”

“오케이, 그건 3라운드에 시도하겠습니다.”

“하하, 예.”

정호석이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곤 도장 바깥으로 사라졌다. 아마 대현그룹 정상영 회장에게는 내가 바쁘다고 전할테다.

가볍고 유치한 이유지만, 이렇게 한 번 튕겨주는 것은 꼭 필요하다. 누가 유리한지, 누가 더 높은 곳에 서 있는지를 확실하게 하고 협상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GL화학과는 다른 대현건설.

GL화학은 조 회장 일가와 특수관계인들의 지분이 49퍼센트를 상회한다. 얼마든 경영권 방어를 할 수 있는 기업이라는 소리. 반면, 대현건설은 다르다. 대현자동차가 모체로 있고 그 지분률이 30퍼센트 언저리를 상회하고 있다. 얼마든 빼앗아 올 수 있다는 소리다.

나는 대현건설을 빼앗아 올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대현은 사내 유보금을 사용해야 하고 말이다.

다시 눈을 감고, 심상 속에 타이슨을 그렸다.

1라운드보다 속도가 빨라진 타이슨, 몸에 열이 올랐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2라운드도 뒤지게 맞았다. 그 탄력적인 몸놀림은 감히 일반적인 재능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결국 3라운드.

난 다리를 쓰기 시작했다.

로우킥, 또는 카프킥.

철저하게 타이슨의 다리를 망가뜨리며 천천히 그의 숨통을 조였다.

“후아!”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눈을 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오듯 떨어지는 땀.

선명한 데피니션의 근육.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산 것같아 내심 뿌듯했다.

짤랑.

방울 소리와 함께 거울속에 정호석이 문을 열고 다시 나타났다.

조금 전, 대현 정상영 회장에게 전화가 왔다고 말하던 얼굴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본능적으로 난 무슨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손에 감긴 밴디지를 풀어헤치며 물었다.

“별로 좋은 보고는 아닌가 보네요.”

“후우··· 예.”

“말씀하세요.”

“아이들이 조금 다쳤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아이들’이란, 정호석의 수족 같은 부하들을 일컬었다. 그리고 일당백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그 사람들이 다쳤다는 건, 누군가의 공격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자연스럽게 내 표정도 일그러졌다.

“어떤 새끼들입니까?”

나와 비슷한 표정의 정호석이 말했다.

“찰리 박 대표를 노렸습니다.”

“대현? 삼현?”

“조사해봐야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풀었던 밴디지를 다시 감았다.

아이들이 다쳤다.

찰리 박 대표를 노렸다.

조사해 봐야겠다.

이 세 문장으로 유추했을 때, 다행히 찰리 박 대표는 무사하며, 공격에서 그를 보호하던 직원들이 부상을 입었고, 공격하던 놈들을 모조리 제압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새끼들 어디 있습니까?”

“인천 물류창고로 옮기는 중입니다.”

“가죠, 마무리 운동은 물류창고에서 해야겠네요.”

“예, 회장님 모시겠습니다.”

“할아버지를 포함해서 그룹 주요 인사들, 우리 그룹 주요 인사들까지 인력 배치 안전할 만큼 늘리세요.”

“예, 이미 지시했습니다.”

“좋네요, 가죠.”

***

인천의 이 창고는.

다시 오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그저 드라이하게 경찰에게 보내도 될 일이긴 하지만, 누가 우리를 건드렸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기에 정호석도 굳이, 이곳으로 놈들을 데려놓았을 터.

대충 누구 짓인지는 알 것 같지만, 확실하게 해 놓는 게 좋았다. 옷 여기저기가 약간 해진 직원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마땅히 할 일이었습니다.”

찰리 박의 전담경호팀 팀장이 이곳에 있기에 그에게 물었다.

“찰리 박은 확실히 안전합니까?”

“예, 전혀 놀라지도 않고 전적으로 우리를 신뢰해 주었습니다.”

“다행이군요, 미국에서는 더한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하니, 강심장일 겁니다.”

“예, 확실히 그래 보였습니다.”

“놈들은 안에 있습니까?”

“예, 회장님.”

고개를 끄덕이자 창고의 문이 열리고 팀장이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아 보이는 장면은 눈살을 찌푸리기 충분했다. 총 아홉 명의 사내가 속옷만 입은 채 상처 입은 나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호석이 팀장에게 물었다.

“어디서 온 놈들이야?”

“이놈들 독종입니다.”

“쯧.”

내가 끼어들었다.

“몸뚱이가 깨끗한 것을 보니 군인 출신들이겠네요, 깡패나 조폭은 아닌 것 같고.”

정호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몸뚱이가 제법 군인 태가 납니다. 주먹패들 근육이랑은 다릅니다.”

팀장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누가 이들 중 대가리입니까?”

“저놈입니다.”

팀장이 가리킨 놈은 확실히 다른 놈들보다 나이가 좀더 들어보였고 제법 몸에 오래된 흉터도 많아 보였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놈의 앞에 섰다.

놈은 두려운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아는 얼굴이었다.

이건이 가진 정예들 다섯 개 중 하나의 머리였다.

“임현식.”

놈이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이건 그 노친네가 네 놈 가족이라도 인질로 잡은 모양이야?”

놈의 동공이 세차게 떨렸다.

자주 쓰던 방식이었다.

‘너희들이 잘못되어도, 너희 가족들은 평생 안정적으로 살게 도와주겠다.’

전형적인 꼬리자르기 수법이다.

“네 놈이 경찰서에 가면 결국 신분은 밝혀져, 아 물론 네 놈이 삼현의 개 노릇을 한다는 건 밝혀지지 않겠지 어차피 네 놈들은 삼현이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의 직원들일 테니까.”

“······”

“네 놈이 감방에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있을 것 같나? 네놈들의 신분이 밝혀지면 네 놈들의 가족들이 정말 안녕할 것 같아? 상대를 잘 못 골라도 한 참 잘못 골랐다는 걸 알았어야 했어.”

“······”

“우리가 누군지 몰랐다는 개소리,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개소리는 듣고 싶지 않군. 하나만 묻자,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놈의 떨리는 동공을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찰리 박, 죽이려고 했나?”

“죽일 생각은 없었소.”

진실이었다.

놈의 몸뚱이에서 피어오른 녹색 연기면 충분했다.

납치가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납치된 찰리 박은 살 수 있었을까?

놈들은 확실히 살기를 포기한 눈깔을 했다.

그 이유는 여태껏 그들의 일 처리 방식이 결국은, 지금과 같았기 때문일터, 위치만 바뀐 것이다.

누군가를 해하는 위치에서, 해 당하는 위치로.

정호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김장원 사장 불러서 이놈들 예쁘게 포장해 이건 그 노친네한테 보내라고 하세요. 금은 좋은 곳에 잘 썼다는 메모도 동봉해 주시고요.”

< 제 52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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