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1화. >
막걸리, 소주, 복분자주를 짬뽕했더니 속이 쓰렸다. GL그룹의 조이현 회장은 괜찮은 인물이었다. 그와 함께 한 술자리는 꽤 재미있었다. 연탄 위에 구워 먹는 뒷고기도 훌륭했다.
더 좋은 술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자신은 이런 게 좋다며 여전히 소탈한 모습을 보여줬다 술값은 고작 10만원 남짓이 나왔다.
내로라하는 기업가 둘의 술자리 치고는 소박했다.
화끈한 성격으로 꽤 소문이 있던 것만큼, 확실히 일 처리도 화끈했다. 나와 술자리에 앉자마자 전화로 업무지시를 하더니 SKY전자와 SKY일렉트로닉스의 사장들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GL화학이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며 말이다.
쓰린 속을 달래며 아산댁의 특제 주스를 마시며 일광욕을 즐기고 있을 때.
“회장님.”
정호석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어제 여당대표 강구윤과 야당대표 이창호가 삼현의 이건을 만났습니다.”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분구조 자체가 마음먹고 사들이면 지켜낼 수 없는 삼현전기.
그걸 지키고자 자신의 사재를 털었나 보다.
두 명의 당대표가 이건이 ‘지켜줘!’했다고 ‘예히~’하며 움직여줄 리 없다. 아직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기업가보다 자신들이 윗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어떻게 짖나 구경이나 해 보죠.”
정호석이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김유중 회장 조사는 잘 되고 있죠?”
“예, 스카이 PMC 정보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좋네요, 미리미리 빼돌리고 있을 겁니다. 아마도, 확실하진 않지만요.”
“예,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조사하고 보고 올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정호석이 사라졌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주스를 음미하고, 머릿속으론 김유중 회장에 대해 떠올렸다.
역대급 분식회계라 말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대단한 짓거리를 했던 사람이다.
성공신화란 말이 무색하게 그의 말로는 처참했다고 말 할 수 있다. 무려 41조원의 분식회계를 감행하는 미친 짓거리를 저질렀다.
모두가 조심하고 내실 다지기를 해야 할 시간인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두용자동차를 인수하는 강수를 두었다.
그 유명한 ‘대마불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기도 했다. 추징금의 0.5%만을 납입했음에도 2007년쯤에 대통령 특사로 풀려난 인물.
“이번엔 못 그럴걸?”
나도 모르게 말이 툭 튀어나왔다.
이번엔 뒷구녕으로 빼돌릴 재산이 없을 테다.
회사를 지키거나 도망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테다.
물론 둘 다 불가능하게 만들 생각이다.
재계서열 2위를 노리는 타타다우를 꿀꺽해버리면 단숨에 '규모의 경제'와 해외 ‘인지도’까지 쌓을 수 있으니까.
굳이 타타다우가 해체될 99년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지금부터 때려도 돈이 말라비틀어진 타타다우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
타타다우를 완벽하게 먹기 위해선 사전에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우선 여유가 있는 대기업들의 현금을 씨를 말려야 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카이그룹을 먹지 않았으니 여유가 있을 대현을 공격해야 한단 얘기였다.
그래서 난 대현자동차를 모체로 두고 있는 대현건설을 건드리기로 마음먹었다. 대현건설의 지분구조는 대현자동차 및 특수관계인 39%를 쥐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받은 11.7%의 지분율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공개매수에 나설 생각.
막 M&A 전문가 찰리 박과 회의에 돌입하려는 찰나, 강기태가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왜요?”
“뉴스 보셨습니까?”
고개를 저었다.
9시 뉴스가 아니면 굳이 챙겨보지는 않는 편이었다.
능숙하게 리모컨을 움직여 TV를 켜는 강기태.
브라운관 안에는 야당대표 이창호가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스카이 그룹에 너무 많은 힘을 주고 있는 현 정부는······
“하하하, 좋은 걸 많이 받아먹은 모양이네요.”
찰리 박은 피식 웃어버리지만, 강기태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강기태는 아는 것이다. 독재정권과 함께 국회의원 놈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물론 그건 그 시절 이야기다.
여당도 아니고 야당.
여당과 야당의 공동 성명도 아니고 고작 야당 당대표의 성명 따위 아무것도 아니란 얘기였다.
-해서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법안으로서 일명 스카이 그룹 독점 지양 특별법···
되지도 않는 법을 만들겠다 씨불이고 있었다.
“걱정하지마세요, 저거 못 만듭니다. 국민들도 바보 아니거든요.”
찰리 박이 농담 반, 진담 반 말했다.
“참, 요즘 보면 대한민국이 과연 로비가 불법이 맞나 싶습니다.”
과연 그럴듯한 말이니 피식 웃어버리곤 일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우선 시중에 있는 주식부터 빠르게 매수하고 있습니까?”
“예, 지분 구조가 바뀔 때마다 공시하면서 매수하고 있습니다.”
“대현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방어를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개매수 공고 타이밍은 언제가 좋아 보이세요?”
“익일 바로 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전적으로 찰리 박의 생각으로 진행하고, 문제 생기면 바로바로 보고하세요.”
“예, 보스.”
주변에 일 잘하는 사람들밖에 없어서 그런가 업무처리가 너무 쉬웠다. 척하면 척하고 해내니 굳이 회사에 나와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할아버지가 자주 집에서 신문을 보시며 여유를 즐기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
흥분한 얼굴의 여당대표 강구윤이 꽤 언성을 높였다.
“아니 형님! 어째서 반대하시는 겁니까? 미국에서도 기업의 독과점은 경계하는 추세인데요?”
그가 성을 내는 상대는 현 정권의 꼭대기 대통령이었다.
“이보게, 내가 직접 포장해서 전해준 선물이 나쁘다고 제약을 걸라는 말이야? 그럼 우리가 받은 달러는? 입을 닦자는 말이냐고!”
“아니 따로 뭐 챙겨줬습니까? 천우진 그 핏덩이가?”
“말이 지나쳐! 그러는 자네야말로 도대체 어디서 뭘 주워 먹고 와서 이리 행패인가?”
“주워 먹다니요! 형님이야말로 말이 지나치십니···”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인물은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다. 대통령에게 귓속말로 짧게 뭔가를 보고했다.
잔뜩 성이난 얼굴로 바뀐 대통령.
차가운 눈으로 강구윤에게 말했다.
“이 새끼가··· 이보시게 강 대표.”
살벌한 분위기를 느낀 강구윤이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던 태도를 버리고 바로 꼬리를 말고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예, 대통령님.”
“이건 회장에게 받아 처먹은 거 고스란히 돌려줘, 그게 싫으면 그 잘난 대표 자리 내려놓던가.”
“크음···”
“이제 정권 잡은지 두달 됐어, 서둘러서 욕심부리지 마, 알아들어?”
“후우···”
비서실장이 눈치껏 강구윤에게 담배를 건넸다.
담배를 받아 물어 몇 모금 피운 그가 대통령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씀 좀 해주십쇼, 뭐 때문에 스카이 그룹에 협조적입니까? 재벌 개혁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건 형님 아니었습니까?”
대통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세한 건 말 할 수 없네, 쯧··· 확실한 건 이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될 건 없네.”
“에휴···”
“그리고 자네가 잘 모르는게 있는데 말일세.”
“그게 뭡니까?”
대통령이 강구윤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는 말했다.
“스카이 그룹에는 마음만 먹으면 재계서열 1위부터 그 아래로 열댓 개는 살 수 있는 자금력이 있어.”
“뭐요?”
“쯧쯧, 카이그룹 인수 전에서 스카이인베스트먼트의 보유 자산 못 들었나? 254억 달러였어 254억!”
“······”
“IMF협의 내용에 의해, 우리는 이제 외국 투자사들의 ‘공매도’를 허용할 수 밖에 없네! 스카이 인베스트먼트가 작정하고 공매도 치기 시작하면, 대한민국이 버틸 수 있다고 보나?”
강구윤이 떨리는 손으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바로 이건 회장한테 가방 돌려보내겠소.”
“경고하는데, 앞으로 스카이그룹 관련해서 여당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예, 알겠습니다.”
강구윤이 꾸벅 고개를 숙여 바깥으로 나가자, 대통령이 비서실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담배를 쥐여주고 불을 붙여주는 비서실장.
하얀 연기를 한 모금 내뱉은 대통령이 말했다.
“이봐 종윤이. 천우진 그 친구가 약속을 지키리라 보는가?”
“믿어야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 친구 일에 우리가 개입 해 봤자 똥 묻히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쯧, 외통수군 외통수야. 그나저나 스카이 통신이 일을 그렇게 잘하고 있는가?”
“예, 올 10월 안에 전국 인터넷망 보급이 목표라고 외칠 정도로 정말 빠르고 정확하게 전국 인프라망이 갖춰지고 있습니다.”
“쯧, 일은 확실하게 하는 친구라는 얘기군.”
***
이건 회장의 저택.
남종현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의 손에 들린 007 가방을 쳐다보았다. 묵직한 무게가 짜증 날만큼 엿 같은 상황이라 생각했다.
“누굴 대신 시킬수도 없고··· 시발.”
더러운 것이 들었기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지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스란히 자신이 이건의 벼락같은 호통을 들어야 한다는 게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먹고 살려면 별수 있냐··· 쯧.”
뚜벅뚜벅 걸어 도착한 이건의 집무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노크하는 그.
똑똑똑.
-들어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이건이 보였다. 어느새 이건의 시선은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에 닿아 있었다.
“뭐야?”
“여당대표 강구윤이 보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크리스털 잔이 날아들었다.
흥분해 던졌기에 다행히 남종현을 스쳐 닫힌 문에 맞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진다.
“어떤 병신이 먹은 걸 토해 내?”
“······”
“이유가 뭐야?”
“시장의 자유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고···”
퍽.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재떨이가 날아들었다.
“야이 새끼야! 대한민국에 정치하는 새끼들이 어디서 그런 깨끗한 이유를 갖고 있어!”
남종현 스스로도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라는 것을.
“진짜 이유 말이야 진짜 이유!”
“죄송합니다.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천우진이 그 애새끼가 나타나고 뭐 이렇게 파악 못 하는 일이 많아?”
천우진이란 이름 석 자에 남종현이 잠시 눈을 부릅떴다. 벼락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이건.
이건의 표정도 남종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천우진이 그 핏덩이가 미리 약을 쳐 놓은 모양이구만··· 당대표 강구윤도 모르게 더 윗선에 말이야.”
“예, 회장님··· 그런 것 같습니다.”
새로운 크리스털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묻는 이건.
“네 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천우진이가 머리더냐 천혁수 그 노친네가 머리더냐.”
남종현이 대답을 망설였다.
심기가 불편한 이건의 날카로운 시선이 비수처럼 남종현의 입술에 꽂혔다.
“천우진··· 천우진이 머리인 것 같습니다.”
“후우··· 그렇지? 네 놈이 생각해도 그놈이 머리지?”
“예··· 어린 나이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일련의 사건들로만 조합해봤을 때, 틀림없이 머리는 천우진 그놈입니다.”
이건이 고개를 끄덕이다 독한 위스키를 비우고는 말했다.
“내 생각도 같다. 여태껏 우리가 너무 방심해서 당했어··· 비겁한 놈이 어린 얼굴 뒤로 송곳을 감추고 있었구나.”
“······”
벌컥 문이 열리고 이건의 막내딸 이희연이 들어왔다.
“아빠! 어? 일중이셨네 죄송해요~”
당황해 꾸벅 고개를 숙이느라 안고 있던 강아지가 품에서 빠져나와 이건에게 달려들었다.
“어엇, 테리!”
“희연아, 나가보거라 테리는 애비가 잠시 데리고 있으마.”
“아아, 네.”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자상한 아비에서 잔인한 살인마와 같은 표정으로 변한 이건이 자신의 품에 안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종현아, 너는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강아지 테리로 보입니다.”
“아니다, 이것은 돼지다.”
“······”
“종현아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돼지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남종현은 이건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다.
“여태껏 내 돈을 받아 처먹던 놈들도 다 그랬다. 돼지라고 하면 돼지라고 믿었고, 개새끼라 하면 개새끼라 믿었지··· 그런데 이제 돼지라고 해도 개새끼라고 말하는 것들이 생겼구나.”
“······”
“천우진이 곁에 있는 그 미국놈이 기업사냥꾼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이건이 작은 강아지 테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강아지가 ‘끼잉, 낑’거리며 무섭게 쳐다보는 주인에게 애교를 부려 본다.
“··· 너무 신사답게만 행동했어.”
< 제 5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