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0화. >
차 안에서 남종현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양도한 삼현 전기의 지분 9%에 이어, 공개매수 공고가 올라왔습니다.”
“스카이 인베스트먼트고?”
“예, 천우진이 맞습니다.”
“적대적 M&A를 하겠다는 거야?”
“51% 이상의 지분을 확보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현 주가의 15% 높은 가격으로 공개매수에 나섰습니다.”
“제기랄··· 전기 임원진 소집하고, 전략기획실 돌려서 우리 그룹 순환구조 철저하게 파악해서 올리라고 해, 그리고 주주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넣어!”
“예! 회장님.”
지이잉.
차량의 창문을 내리고 이건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천우진 이 망나니 같은 놈이···”
담배를 태우며 속으로 천우진에 대한 욕설을 퍼부은 이건이 이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말했다.
“후우, 여야 중진들 연락 좀 돌려.”
“예, 알겠습니다.”
***
아이스 헤이즐넛 아메리카노는 언제나 옳았다.
적당히 달달하며 그 특유의 향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물론 지금 내 앞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강기태의 보고가 마음에 들어서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노인네들 발등에 불 좀 떨어졌겠네요.”
보고를 다 듣고 내뱉은 내 말에 강기태와 찰리 박이 피식 웃어버렸다. 각 계열사의 실무진들이 보내온 보고서에는 내로라하는 대한민국의 대기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보고를 쉽게 풀이하자면 ‘회장님 얘들이 물건 안 주는데요? 혼내주세요!’였다.
연구, 개발에 꼭 필요한 시료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열 받은 우리는 시료를 생산하는 업체 자체를 사버릴 생각이고 말이다.
“자~ 제일 먼저 어디서 전화 올 것 같으세요?”
내 질문에 찰리 박과 강기태가 동시에 말했다.
“GL화학.”
“GL화학.”
둘의 의견이 같았다.
“오, 자주 붙어 다니시더니 생각도 닮아 가는 건가요?”
“하하 그게 아니라 가장 자신만만해할 곳이어서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강기태의 말은 옳았다.
GL화학은 튼튼한 기업이다. 창업자 일가의 지분소유도 안정적이기에 더 그렇다. 게다가 지주회사다. GL그룹의 지주회사가 바로 GL화학이었다.
미래에는 여러갈래의 법인으로 갈라서 지분구조를 더 튼튼하게 다지지만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었다.
때마침 노크소리가 들렸다.
강기태가 날 바라보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더니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또각또각.
듣기 좋은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다가온 비서가 말했다.
“회장님, GL그룹 조이현 회장님 전화입니다.”
강기태와 찰리 박이 웃음을 짓는다.
“네, 연결하세요.”
비서가 바깥에 손짓하고 수화기를 건넸다.
“전화 받았습니다.”
-반갑소. 조이현이요.
당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덤덤한 음성.
“예, 반갑습니다. 회장님.”
-천우진 회장, 우리 봐야하지 않겠소?”
“그러시죠.”
-내가 가야겠지요?
“그러셔야겠지요?”
-허허허, 배포가 대단하다더니 과연,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야지··· 스카이 그룹의 사옥 뒤쪽으로 조금만 가면 평양면옥이 있소, 슴슴한 평양냉면이나 한 사발 합시다.
“좋습니다.”
-한 시간 내로 가겠소.
“그러시죠.”
전화를 끊고 비서에게 말했다.
“정호석 사장 호출하세요. 외근입니다.”
“네, 회장님.”
***
삼현의 전략기획실장 우희석은 날아오는 재떨이를 눈을 감고 맞이했다. 피하려고 한다면 피할 수 있지만 감히 피할 수 없었다.
흰색 와이셔츠에 담뱃재가 잔뜩 묻었다.
“대놓고 공격을 해 오는데 방법이 없어? 내가 네 놈한테 그런 말이나 듣자고 불렀어!”
“우호지분을 다 끌어와도 29%가 넘지 못합니다··· 서둘러 주주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내실 다지기보다는 덩치 불리기에 집중한 문어발 확장의 폐해라고 볼 수 있었다.
“여태껏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지분을 우호지분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이렇게 뒤통수를 쳐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제기랄! 결국은 그 노인네들한테 기름칠해야 한단 소리군.”
고개를 푹 숙인 전략기획실장.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략을 세워,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어, 적대적 M&A를 대비하란 얘기야.”
“예, 알겠습니다.”
“당분간 집에 갈 생각하지 마. 빨리 나가서 일해!”
“예! 회장님.”
우희석이 나가고 남종현이 이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약속 잡아 놨습니다 회장님.”
“쯧, 어디야?”
“북한산입니다.”
“쯧쯧 또 치마 속이나 구경 시켜 달라는 얘기군.”
“모시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예, 회장님.”
남종현이 그 자리에 서 있자 이건은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이건의 의중을 깨달은 남종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바깥으로 나갔다.
남종현이 완전히 바깥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이건이 집무실 책상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버튼을 눌렀다.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마룻바닥이 덜컹하며 열렸다. 이건은 천천히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평소 소탈하다던 평가를 많이 받던 인물답게, GL의 총수 조이현 회장은 허물없이 주변의 식당손님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얼굴은 아실테지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 냉면이 참 슴슴하지요. 자 듭시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냉면을 한 젓가락 퍼 입안 가득 넣어보았다. 확실히 슴슴하다는 표현이 적절하게 느껴지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북적거리는 식당에서의 식사는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내가 맛집에 와 있는 것 같아, 먹고 있는 음식이 맛있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어느새 다 비워진 냉면 그릇을 확인한 조이현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 얘기하기 좋은 곳이 있지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걸었다. 빌딩 숲 사이, 소나무 그늘에 가려진 작은 휴식공간. 회사 일로 지친 회사원들의 한 줄기 빛 같은 그 공간엔 인적이 드물었다.
능숙하게 자판기에서 동전을 집어넣더니 날 바라보며 묻는다.
“밀크? 모카?”
“모카로 하죠.”
“모카 좋죠.”
자판기 커피를 받아들자 조이현 회장이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가타부타 사족이 없는 진솔한 물음이었다.
“소재 산업이죠, 특히 신소재는 더더욱 좋고요.”
“반도체 쪽만 노리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꼭 GL화학을 가져가야겠소?”
“소재 부분만 뚝 띠어서 주시던가요.”
“허허허. 담배 한 대 피겠소.”
“그러시죠.”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몇 모금 피우더니 묻는다.
“작정하고 지키자면 못 지킬 것 없소.”
고개를 끄덕였다. 조이현 회장의 말이 맞았다.
GL이 작정하고 버티면 결국 지켜낼 것이다. 조이현 회장 일가가 가진 지분은 49%, 특수관계인들까지 포함하면 50%가 훌쩍 넘을 테다. 결국엔 경영권을 가져올 수 없다는 얘기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자극하는 이유가 뭐요? 젊음의 치기?”
“못 먹는 감 찔러나 봤죠.”
“파하하하.”
한참을 웃던 조이현 회장이 말했다.
“진짜 이유를 말해 주겠소?”
“전경련에서 압박이 있었습니까?”
“부정하지 않겠소.”
“우리를 적대하면 반대로 우리에게 적대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아셨어야지요.”
“음, 대놓고 신기술을 보여달라고 얘기하는데 선뜻 보여주는 미친놈이 어디있소?”
“협력하자고 공문을 보냈습니다만.”
“말이 협력이지 단물 빨아먹고 버리면 우리만 새 되는 것 아니오?”
“그러니까 우리 SKY를 믿지 못하시겠다?”
“세상천지 사업하는 놈이 믿을 게 없어 사람을 믿겠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말이 하나 없다.
“그럼 소재 부분만 매각하세요, 달러로 사죠, 모든 기술 양도는 당연하고. 법인 분리해서 그대로 넘기면 될 일 아닙니까?”
“무슨 소재가 필요한 겁니까?”
“기업 비밀입니다.”
“쯧, 휴대폰 시장과 전자시장에 진출할 계획입니까?”
“이미 해당 계열사들은 준비됐습니다.”
담배를 거의 필터까지 피운 조이현 회장.
뭔가를 열심히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난 그저 묵묵히 싸구려 모카커피의 맛을 음미할 뿐이었다. 이번 삶엔 처음 마시는데 어쩐지 향수가 느껴지는 맛이다. 가끔 즐기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어떻게 하면, 별 탈 없을 수 있습니까?”
오랜 침묵 끝에 터져 나온 질문.
“담배 한 대 주시죠?”
그가 담배와 라이터를 건넸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는 그에게 건넸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내게 한 질문의 답을 행동으로 보여줬을 뿐이다.
보통 아랫사람이나 친한 사람들은 상대방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경우가 있다. 내 행동의 의미도 그것이었다. ‘난 당신과 친하거나, 윗사람이다.’라는 표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복잡한 표정의 조 회장.
자존심과 피해.
그 두 가지가 서로 교차하며 싸우고 있을 터.
“앞으로 스카이그룹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날아오를 겁니다. 이제 겨우 날갯짓에 지나지 않아요.”
“······”
“지금은 주가 폭락 정도의 피해를 보겠죠, 다음에는? 그리고 또 다음에는? GL을 지킬 자신이 있습니까?”
상생할지 절멸할지 선택하라는 재촉이란 걸, 그도 알았을 터.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비벼 끈 조이현 회장이 라이터를 쭈욱 뻗으며 담뱃불을 붙여주더니 말한다.
“상생을 택하겠습니다. 천우진 회장.”
자존심보단 실익을 선택한 조이현 회장.
과연, 기업가다운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는 조이현 회장에게 말했다.
“그 마음 변치 마세요, 기회에 두 번은 없습니다.”
“고맙소, 명심하리다.”
“밥은 조 회장님이 사셨으니,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한잔하시지요?”
“하하하, 좋습니다. 젊은 사업가의 마인드를 배워 갈 좋은 기회군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조 회장의 정면승부가 좋았다.
사실 GL화학을 갖기 힘든 것도 맞지만, 상처입히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끝내 물고 늘어지면 결국 GL의 피해가 더 크다.
그는 항복했고, 나는 관용을 베풀었다.
항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것을 알려줄 좋은 본보기야 널리고 널렸을테니까.
가령, 삼현전기라던가 타타다우라던가 말이다.
삼현전기의 이건.
타타다우의 김유중.
그 둘은 절대 자존심을 굽히고 포기할 인물들이 아니었다. 영혼까지 끓어 모아 덤빌 터.
쫌 끈덕지게 엉겨왔으면 좋겠다.
거듭 말하지만, 쉬우면 재미가 없으니까.
***
북한산 인근의 고급 요정.
현 대한민국의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가 한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러니한 그림.
더 웃긴 것은 둘이 ‘하하, 껄껄’하며 웃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둘과 대비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건 회장.
“하하, 이 회장님 표정이 많이 안 좋습니다?”
여당의 대표 강구윤의 말에 야당의 대표 이창호가 여자들에게 눈짓했다.
여자들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서자 이건의 입이 열렸다.
“스카이 인베스트먼트가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주식들을 사들였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렇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건 자칫하면 대한민국 재계에 독점권을 행사할 수도있는 무서운 일입니다.”
“흐음.”
“큼.”
뜨뜻미지근한 둘의 반응에 이건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늘 스카이인베스트먼트가 우리 삼현전기 주식 공개매수를 공고했습니다.”
“이 회장님도 지분을 더 확보하고 주주들의 마음을 사면 될 일 아닙니까?”
야당 대표의 말에 테이블을 내려치는 이건.
쾅!
“현 시국에 자금이 넘쳐나는 기업가가 어디있답니까!”
여당의 대표가 작게 읊조렸다.
“듣기로는 금으로 재미 좀 봤다고···”
“하아···”
한숨을 내쉰 이건이 뒤로 고개를 돌리고 크게 외쳤다.
“가져와!”
드르륵, 문이 열리고 남종현이 007가방 두 개를 가져왔다. 하나씩 가방을 받은 두 정치인이 슬쩍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가방 속에는 노랗게 반짝이는 금이 가득 들어있었다.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린 두 명의 정치인이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반짝이는 눈으로 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스카이 그룹이, 위기상황에 대한민국의 건실한 기업들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얘기입니까?”
야당대표의 말에 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러다 남아 있는 기업이 없겠습니다. 도대체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어째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쯧.”
“흐음, 주시해야겠군요, 살펴봐야겠습니다.”
이건이 두 정치인이 알아들은 것 같자 흡족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이들 들이거라!”
< 제 5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