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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의 재벌-49화 (49/458)

< 제 49화.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먼저 떠나가고 막 차량에 오르려던 내게 할아버지가 말했다.

“같이 가지.”

고개를 끄덕이고 할아버지 차량에 올랐다.

자연스럽게 핸들을 철웅이 잡고, 호석이 조수석에 올랐다. 뭔가 할 말이 있어 같이 가자 하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차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슬쩍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특유의 무표정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묻고 싶은 말 있으셨던 거 아니었어요?”

결국 내 입에서 먼저 침묵이 깨졌다.

그제야 날 바라본 할아버지.

“애국심인게냐?”

대통령과 비서실장과 있던 자리에서 했던 마지막 말 때문인 듯했다.

“글쎄요.”

“지난날, 애국심에 불타 가산을 탕진하고 ‘애국자’란 허명 아래 많은 거인이 쓰러졌단다. 네 놈이 말한 그 사업은 돈 먹는 하마나 다름없어, 우리 정부는 힘이 없다. 네 놈을 지켜줄 힘이.”

복합적인 우리나라 정부의 고질적인 문제를 얘기하고 있었다. 일제를 포함해 제대로 힘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또 그다음은 ‘민주화’를 외치는 다른 투사들이 나타났지. 남산에 한 번 끌려가면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몇 없었어.”

이번엔 다른 국면의 문제였다. 바로 정부의 개입과 견제에 대한 대비를 꼬집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들, 그치 들이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허면, 자칭 타칭 ‘애국자’들은 어찌 된 줄 아느냐?”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아니, 네 놈은 모른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을, 어찌 안다고 할 수 있느냐?”

할아버지 목소리에서 케케묵은 분노가 느껴졌다.

“일제에 저항하던 독립운동 애국자들은 형량의 이슬이 되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며 가진바 가산을 탕진하고 야인이 되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지··· 그에 반해 일제에 기대어 권력의 단맛을 맛본 놈들이 득세하더군. 아직도 이 땅에 매국노들이 많아. 그리고 그놈들이 잘 먹고 잘살지.”

굳이 애국심에 한 선택이라면 하지 말란 말씀이셨다.

“이왕이면 비옥하고 튼튼한 지반에 뿌리를 내리고 싶을 뿐입니다. 뿌리가 굳건해야 가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가지 않겠습니까?”

정말이냐는 듯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할아버지.

“애국심이란 철 지난 낭만에 취해 헛돈을 쓰는 못난이가 아닙니다. 할아버지, 저 할아버지 손자입니다. 우리 천가의 핏줄이 진득하게 흐르는 천우진입니다. 천가가 뿌리를 내린 대한민국을, 나아가 우리 가문을 든든하게 지켜줄 ‘무기’가 될 것입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입가에 호선을 그리신다..

“오냐, 그래야 내 핏줄이지. 네 놈 뜻 잘 들었다. 길을 정했으면 흔들리지 말고 걸어가거라, 언제 뽑힐지 모를 뿌리를 가졌던 천가가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겠다는데 이 할애비가 최고의 방패가 되어주마.”

할아버지의 말이 고마운 한 편.

과연, 힘을 쓰실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역시. 할아버지의 힘이 더 많이 필요한 일들이 많지 싶었다.

생각보다 ‘민주주의’라는 허명은 그렇게 공정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아니니까 말이다. 때로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그 주먹을 지배하는 사람이 바로 내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오는 할아버지니까.

“네, 할아버지만 믿을게요.”

“하하하,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구나,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봄바람 맞으며 고기나 굽자구나.”

“예! 회장님.”

“예! 회장님.”

어쩐지 나보다 철웅과 호석이 더욱 신나 보였다.

덩달아 기분이 좋으신지 할아버지가 말했다.

“오늘은 호석이 철웅이 네 두 놈도 집에 갈 생각하지 마, 진탕 마시고 집에서 자고 가거라.”

***

쓰린 속을 달래며 거실로 내려오자 할아버지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신문을 내려다보며 녹색 무엇인가를 마시고 계셨다.

“이건 뭐예요?”

“해독주스.”

“아하.”

언제 나타났는지 아산댁이 내게도 할아버지와 같은 음료를 권한다. 받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는데 의외로 맛이 좋다.

보기엔 써 보였는데 적당히 달큰하며 풀내음이 나는 음료였다.

“토종벌꿀 들어가서 맛이 괜찮아요 도련님.”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호호호~ 해장으로 아주 기똥차니까 쭈욱 들이키세요~”

손을 뻗어 리모컨을 눌렀다.

신문에 집중하는 할아버지는 별말 없으셨다.

자연스럽게 뉴스 채널을 틀었더니 ‘속보’자막으로 오전 10시 대통령 성명문발표가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 바로 발표할 모양이네요.”

자막을 확인한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저치들도 급하니까 그렇겠지.”

98년 3월 막바지의 아침뉴스도 절망적이기 그지없다. 97년 10월 두 방울, 11월 하태의 부도에 이어, 수많은 기업이 줄도산을 잇고 있었다. 98년 3월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도 뉴스가 식상하구나. 그놈에 부도 소리 좀 그만했으면 좋겠어.”

모순되는 말씀이었다.

할아버지가 삼킨 금융사가 몇 개던가, 또 내가 삼킨 기업들은 몇 개고. 우리의 덩치가 커진 건 모두 저 뉴스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듣다 보면 질리는 법이다.

“그래, 오늘은 언제 나가느냐?”

“10시 전에 나갈 것 같습니다.”

“장바구니에 무엇을 담으려고?”

“하하하, 건설사, 전자, 전기 몇 개 담아오려고 합니다.”

“좋구나.”

“할아버지는 당분간 내실만 다지시나요?”

“그래야지, 너무 이미지가 좋아서 그것도 걱정이구나 10시에 성명문 발표가 이어지면 더 좋아질 것 같아서 걱정이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의 말은 ‘좋은 이미지’때문에 갚지 않아도 될 ‘부채’까지 부담하고 있어야 하므로 헛돈을 쓰고 있으니 불만이 생기신 것이다.

부채를 무시하고 규모를 늘렸다면 더욱 크게 늘렸을 수 있고 압도적인 1위의 금융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압도적이진 못했다. 현 1위 금융사는 대한종합금융그룹이 맞지만, 부동의 1위라고 얘기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부동의 1위가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꿀꺽꿀꺽.

남은 주스를 모두 마신 할아버지가 말했다.

“건설자, 전자, 전기. 그것들에 삼현의 것도 포함되어 있더냐?”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

그 눈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굳이 돈을 쓰는 것은 아니냐?’

아니었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구나.”

말리시지 않는다.

내 진의를 모르실 텐데 굳이 말리시지를 않는다.

먼저 진의가 무엇인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복수에 미쳐 눈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잊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허면?”

“건설사는 든든한 규모의 경제 효과가 있습니다. 가령, 대외 신인도 상승, 상징적 이미지 등, 그냥 우리 건설사 로고가 박힌 건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죠, 또 해외 대규모 공사를 수주 하는 것으로 이름값을 날릴 수 있고요.”

“그리고?”

“전자는 IT와 아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반도체 역시 마찬가지죠, 그리고 앞서 건설에서 얘기했던 홍보효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볍게 얘기하면 ‘친구네 집에 놀러갔더니 스카이 로고가 박힌 제품이 있다’뭐 그런 것이죠.”

남아있는 내 몫의 해독주스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또 전기의 경우, 앞으로 많은 휴대성 제품들이 나타날 겁니다. 하다못해 자동차도 전기 엔진이 개발될 거고요, 그러니 ‘배터리’의 성능을 위해 다양한 시도가 있어야 하고 R&D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미리 선점하겠다는 얘기구나.”

“그렇습니다. 삼현 전기는 그중 맛있는 먹잇감일 뿐입니다. 그리고 현재 개발중인 스카이 전자의 제품에 높은 배터리 성능과 고성능의 메모리 칩이 필요합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신문을 들어 올리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손자는 용입니다. 이제 잠룡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난 용입니다. 똬리를 풀고 세상에 비상할 용이죠, 그리고 그 용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제 입맛대로 요리해보고 싶은 겁니다.”

“흐음.”

“아직 세상이 제 것인 줄 아는 놈들이 많습니다. 빼앗기는 것보다 빼앗는 것에 익숙한 놈들이 많죠, 저는 그놈들이 가꾼 것들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고작 복수라는 달달한 이유가 전부가 아닙니다.”

“되었다. 네 놈 생각이 확고하니 이 할애비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더 안심시킬 필요 없으니 일 보거라.”

“예.”

***

오전 10시.

전국경제인연합, 줄여서 전경련의 주요 인사들이 고급 요정에 모였다. 주요 인사들답게 그 수가 열을 넘지 않았다.

“자, 대통령이 무슨 얘기를 하나 들어봅시다.”

대현의 총수 정상영 회장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TV에 집중했다.

-금 모으기 운동의 폐해는 일부 기업에 국한된 것이며··· 대한은행에서 보유중인 금은 모두 한국은행에 보관하며, 담보로 외채를 빌려올··· 국민들의 어려운 시기 SKY그룹은 140억을 상회하는 금을 기부하며 탈 외환위기를 지지······

쾅!

이건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하하하, 이 회장님 탈세 좀 하셨습니까?”

타타다우의 김유중의 말에 이건이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건은 자신의 금을 기부해버리는 천우진의 행태에 불만이 더 컸다.

어차피 금 모으기 운동에 쓰인 금을 해먹은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니 정부 입장에서 당장 어떻게 할 순 없었다.

“쯧, 우리 대현은 아직 처리하지 못한 금을 기부해야겠습니다.”

정상영의 말에 김유중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정회장님, 대현까지 그렇게 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어차피 가진 금이 얼마 되지 않잖소? 이제 막 출범한 정부입니다. 좋게좋게 가야지요.”

“하! 대쪽같던 대현이 맞습니까?”

“불매운동이라도 일어나면 우리만 손햅니다. 대현은 이미 그렇게 정했으니까, 나머지 분들은 각자의 선택에 맡기겠소.”

까드득 어금니를 씹은 이건이 말했다.

“후, 우리 삼현도 금 내놓겠소.”

“아니 이 회장!”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김유중.

“김 회장님 타타다우가 자금사정이 안 좋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봅니다?”

급한 마음에 꽤 언성을 높였던 김유중이 이건의 서릿발 날리는 혓바닥에 침음을 삼키며 말을 잃었다.

“푼돈 몇 푼에 너무 힘들 쓰지 맙시다. 몇몇 기업이라고 얘기했지 딱히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있을겁니다. 우리에게 화합하자는 제스쳐가 아닐까 싶소.”

이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지간한 규모의 금은 다 처리한 상황이었다.

굳이 헐값 매각이란 소리가 나온 이유도 최대한 빠르게 현금흐름을 유지하고 실적을 높이기 위함이었으니 당연했다.

정상영이 좌중을 훑어보다 말했다.

“여기 오지 못한 사람들은 정부의 철퇴를 맞을 겁니다.”

““아!””

정상영이 굳이 열 명 내외만 초대한 이유가 드러나는 말이었다.

“사전에 합의를 봤으니 그렇게 아세요.”

이어진 정상영의 말에 모두가 청와대와 어떤 대화가 오고 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의 삐뚫어진 분노의 화살을 받았던 김유중이 입을 열었다.

“SKY그룹 그놈들 행패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하실 셈입니까? 국민연금관리공단이 가지고 있던 주식 중에 여기 앉아계신 분들과 연관되지 않은게 없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순간에 우리 모두의 대주주가 된 놈이란 얘깁니다. 그 어린 핏덩이가 말이에요.”

까드득.

이건은 다시 어금니를 씹었다.

모두가 비슷한 표정이기에 이건의 분노표출이 딱히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우리 타타다우는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SKY그룹의 모든 협조 요청을 거절할 생각입니다.”

저 말은 말려 죽이겠단 얘기였다.

알게 모르게 모든 그룹이 거미줄처럼 연관되어 있었다. 독자적인 위치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자체 생산도 정도가 있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는 그게 더욱 심했다. 하청업체 만들기 경쟁이 치열한 것도 그 이유다.

이렇다 할 해결책은 결국, 김유중 회장의 말이 맞았다. 아직은 기반이 부족한 SKY그룹이었다. 당연히 많은 협력사가 필요했고 이 자리에 모인 전경련의 주요인사들의 배척을 받으면 사업 진행에 있어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똑똑똑.

노크소리에 김유중이 소리쳤다.

“누구야!”

양쪽으로 열리는 미닫이문.

그리고 그곳엔 각 그룹사의 비서실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급한 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와, 각자의 회장들에게 귓속말로 보고하는 비서실장들.

“뭐, 뭣?”

“그게 사실이야?”

“SKY 이놈들이!”

그리고 남종현의 보고를 받은 이건도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여러분 생각은 잘 알았소, 나는 바쁜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살짝 목례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가는 이건, 그리고 그를 따라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몇몇 총수들.

그들의 표정은 모두 한결같이 좋지 않았다.

< 제 49화.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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