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8화.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
실무자 회의지만 강기태와 찰리 박은 함께 참석했다. 정호석 역시 마찬가지다. 내 손과 발이 될 사람들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전자부터 보고하세요.”
실무자의 대표격인 개발 본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시험단계에 있으며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음질과 반응속도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습니다.”
“배터리와 메모리 부분은요?”
“그 부분은 외부 업체와 협력이 어려워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필요한 협력 업체 명단 보고서 올리세요.”
“예!”
“올해 말까지 무조건 출시합니다.”
“가능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SKY 전자의 스카이 팟 개발 본부장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연구개발비 품의가 올라오면 제1순위로 처리가 되니 저럴 수밖에 없다.
“SKY아트웍스 어떻습니까?”
“저작권 처리와 음원 발매등, 순조롭게 처리되고 있습니다. 스카이 팟이 출시된다면 바로 적용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산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분기 목표실적 130%를 웃돌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SKY일렉트로닉스 어떻습니까?”
“배터리 효율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외부 업체들과 협력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고서 올리세요.”
“예.”
“SKY소프트는 어떻습니까?”
“전자결제 시스템에 이상이 없고, 홈페이지 디자인 최종안을 뽑고 있습니다. 아트웍스에서 음원을 옮겨 받아 서버에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웠다.
몇 가지 작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올해 말이면 전 세계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MP3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CD나 테이프, 심지어는 LP판까지 휴대하기 불편하고 디자인은 투박한 기존의 음악 청취 기계들.
스카이 팟은 유려한 디자인, 고급스러운 음질, 사용의 편의성까지 모든 것을 고려한 최고의 MP3플레이어가 될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 시장에 SKY그룹을 알리고, 뒤이어 진출할 모바일 산업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 위치까지 올라오는데 사용한 돈은 고작 80억 달러였다. 아직도 자본금은 충분하다. 스카이 인베스트먼트는 내가 숨 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수익을 실현하고 있었다.
자칫, 너무 많은 돈을 투자했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카이그룹같은 부실기업이 아닌, 흑자도산에 이른 기업들만 주워 담았기에 그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갔다. 또한, 이미지를 생각하고 현 대한민국의 대기업들과 대비되는 행보를 위해 굳이 ‘채무’를 일시상환 했기에 80억 달러가 들어갔다.
시가 총액 자체는 낮지만, 기둥이 튼튼하니 미래가 기대되는 기업들 위주로 담았다. 기술력과 인재들 역시 마찬가지.
부실기업들을 인수한다면 먼 미래엔 괜찮겠지만 당장은 투자 대비 얻는 이익이 별것 없으니 참는 중이었다. 오히려 부동산 투자에 더 많은 돈을 사용했다는 건 안 비밀이다.
“SKY통신 어떻습니까?”
“예, 신규가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아이디어인 휴대폰 구매 보조금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차근차근 점유율을 넓혀 가세요, 인터넷은 어떻습니까?”
“아직 인터넷망이 넓게 포진하진 못해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곧 희소식 있을 겁니다. 인력 충원에 각별히 힘쓰세요.”
“예, 알겠습니다.”
비서에게 살짝 눈짓을 주었다.
문 앞에 앉아있던 비서가 또깍 또깍 걸어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금일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모든 임직원이 나가고, 강기태와 찰리 박이 곁으로 다가왔다.
“회장님, 점심같이 하시죠?”
강기태의 편안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여기 앞에 중식 레스토랑 좋던데, 그리 가죠?”
찰리 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강기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
깐풍기와 동파육.
거기에 곁들이는 금문고량주는 금상첨화라 부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동파육보다는 깐풍기가 더 맛나다.
작은 유리잔을 서로 부딪히고 화한 느낌과 금문고량주 특유의 향을 즐기며 깐풍기를 씹는 찰나.
“회장님 보고서 들어오는대로 인수하면 될까요?”
찰리 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격적으로 인수하세요 돈은 충분하니까요.”
“하하하, 이거 과연 대한민국에서 SKY그룹을 적대할 기업체가 있을까 싶네요, 마음에 안 들면 사버린다. 캬!”
강기태의 촐싹거림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경쟁업체가 아니라 협력업체인데, 우리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아직 신생이고 ‘경쟁사’라고 생각하고 경계하는 것이었다.
1을 제시하면 2를 원하고, 2를 제시하면 3, 4를 원한다.
우리가 호구인지 아닌지 간 보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직 SKY로고를 달고 시중에 유통되는 상품이 별것 없다 보니 가능한 일이다.
양산할 뭔가가 없으니 협조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요구는 까다롭게 변하고, 시장의 논리가 그러니 이해 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그들을 설득하며 허송세월할 생각은 없다.
“사람들은 말이죠 착각을 합니다.”
강기태와 찰리 박이 내게 집중했다.
어떤 영화의 대사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알아요.”
“예?”
“프핫.”
“큽.”
찰리 박은 미국에서 자라서인지 둘리를 모르는 모양이다. 반면 강기태와 정호석은 내 농담을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다.
내심 뿌듯한 마음으로 찰리 박이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
“너무 착하면 호구로 본다는 얘깁니다. 한 대 쳤는데 어라? 별 반응이 없네? 그럼 두 대, 세 대는 쉽다는 얘기죠.”
“아아, 예 본보기를 보여주고 만만치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단 말씀이군요.”
“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각 계열사에서 올라오는 적대적 기업만, 무제한 적대적 M&A 실시하세요, 보여주십시오. 공생이냐, 절멸이냐 양자택일을.”
“예, 알겠습니다.”
찰리 박이 그 특유의 이리 같은 눈을 뽐낸다.
자신의 주 분야이니 더 그럴 터.
“부동산은 재미가 쏠쏠하죠?”
강기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 매물이 너무 많아서 고민해보긴 또 처음입니다.”
“알짜들만 주워 담으세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요 믿겠습니다.”
정호석에겐 딱히 할 말이 없다.
워낙 잘하는 사람이니 흠잡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술이 또 몇 순배 돌았다.
정호석은 끝끝내 거절하다 딱 두 잔을 마셨다.
“찰리.”
“예, 회장님.”
“아무래도 배터리 업체들을 좀 장바구니에 담아야겠어요.”
“바로 조사하겠습니다.”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GL 화학과 삼현 전기 두 회사를 철저하게 조사하세요, 에너지 회사들도 곁가지로 끌어당기시고요.”
“알겠습니다.”
“카이 전자 조사는 끝났습니까?”
“예, 확실히 전 재계서열 4위의 그룹답게 규모와 사업성이 뛰어났습니다.”
“인수 대금 얼마로 생각합니까?”
“6천억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좋네요, 담으세요 부채는 없죠?”
“그럼요, 카이 자동차로 모든 부채를 옮기기 위해 그 고생을 했는데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건이 정부 고위 관료들과 채권은행단과 잦은 만남을 가질 때, 우리는 카이그룹의 부채를 샅샅이 조사했다.
카이자동차에만 유독 부채가 몰려있었다.
아무래도 자동차가 그룹의 기둥이었으니 그랬던 모양이다.
“자, 이제 일어납시다. 정 사장님 우리는 사우나 들렀다가 약속장소로 가죠.”
“예, 회장님.”
***
고급 요정.
내가 탄 차가 주차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의 차가 들어왔다. 정호석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나는 웃으며 할아버지를 반겼다.
“오셨어요?”
“오냐, 들어가자.”
“예.”
할아버지가 앞장서고 그 뒤를 내가 따랐다.
맨 끝방 VVIP 룸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간 우리.
그곳엔 청와대에서 만났던 비서실장과 대통령이 앉아있었다.
“앉으시오.”
음성부터 기분이 좋지 않음이 느껴졌다.
어쩌겠는가? 모든 게 업보인 것을.
할아버지와 내가 자리에 앉고, 대통령이 대뜸 입을 열었다.
“모든 조건을 적극 수용할 테니 금을 주시오.”
안타까웠다.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어쩌면 저렇게 하나같이 책임지기를 싫어하는지 그 사실에 환멸이 느껴졌다.
나 잘못했소 고개 숙이기가 그렇게 어려울까?
“한국은행에서 금을 보유하고, 담보로 외채를 끌어올 생각입니까?”
할아버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통령.
금 모으기 운동의 주체가 정부였지만, 비용은 대한은행에서 지불했다.
“우리 대한 은행은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 가격으로 금을 매입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11%, 연이자.”
눈썹을 꿈틀거리는 대통령.
고개를 돌려 비서실장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용합니다.”
“대한은행의 모든 금은 빠른 시일 내 한국은행으로 옮겨질 겁니다.”
“좋습니다.”
이번엔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본다.
물 한 잔 마시지 않았는데 속전속결이다.
그만큼 지금의 정부가 매우 바쁘다는 방증이리라.
“스카이 그룹은 금을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원하신다면 기부할 의사도 있습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니까요, 대한은행에서 매입한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140억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시절, 재벌가에서 내놓은 금 중 가장 많은 양이 5천만원 언저리였다. 그런데 선뜻 140억을 말하니 놀라운 모양이다.
하지만 난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건 놈의 비자금 창고에서 주워온 금이니까.
이미 자신의 창고를 쓸어간 존재가 나라는 걸 놈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놈은 ‘기부’라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쌍욕’을 내뱉던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제 금 140억 원어치를 기부하면 어떻겠는가?
“그 많은 양을 기부하겠다는 말입니까?”
“예.”
임도 보고 뽕도 따고.
가벼운 잽이지만, 이건 그놈이 하루라도 편히 잠을 잘 수 없게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인들 아쉬우랴.
아쉽다. 이 자리에 이건이 있었다면.
‘당신 금 맛있더라, 덕분에 좋은 이미지 잘 먹고 갑니다.’하고 잔뜩 약을 올렸을 텐데 말이다.
히죽히죽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대통령이 말했다.
“통신망 설치 사업··· 진행합시다. 우선 기부 의사부터 밝히세요, 그 이후 늦어도 6월 안에 사업 시작합시다.”
“알겠습니다.”
이곳에 도착해서 고작 10분도 흐르지 않은 시점.
대통령은 더 할 얘기가 없는지 엉덩이를 떼려 했다.
“대통령님.”
왜 부르냔 눈으로 날 바라본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운용하는 국내주식을 양도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물론 달러로 지급하겠습니다.”
달러라는 말에 대통령이 흥미를 보였다.
“작년 국민연금관리공단의 기금운용 국내주식 부문의 손해는 끔찍했습니다.”
“크음.”
“올해는 어떠실 것 같습니까? 차라리 그 주식을 ‘달러’로 받고 다시 그 달러를 정부에 대출해 주는 형태를 취한다면 어떨까요?”
“으음··· 확실히 좋은 방법이군요.”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부로서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다 정도는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했다.
“복합적으로 성명문을 발표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한은행의 금 모으기 운동의 동참, 외채반환을 위한 정부의 노력 등을 말입니다. 그럼, 미국의 금융회사들이 말했던 ‘정부’의 ‘무능함’은 씻은 듯 사라질 겁니다.”
대통령도 비서실장도 귀가 솔깃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시장에서 주워 담아도 될 주식들이다.
굳이 대통령에게 ‘달러’를 주는 이유는 우선 대한민국의 정권을 5년간 유지할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첫 번째고, 다음은 현 정권의 다음도 같은 ‘당’에서 대통령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10년이나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다. 정경유착. 나는 지금 그것을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뇌물을 주겠다는 그런 것도 아니다. 정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물질은 ‘돈’이겠지만, 비물질은 분명 ‘민심’ 혹은 ‘표심’일테니까.
돈 만큼이나 혹할만한 조건이란 얘기였다.
대통령이 다 식어 빠진 야관문 차를 들이켜고는 말했다.
“원하는 것은 뭡니까?”
역시 저 자리를 고스톱으로 딴 건 아닌가 보다, 자신에게 정부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이유를 말하라 날 독촉한다. 경계의 눈도 치우지 않았다. 넘실넘실 피어오르는 주황색의 연기는 적대와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시장의 자유.”
고개를 갸웃거리는 대통령.
“앞으로 스카이 그룹은 점점 덩치를 불려 나갈 겁니다. 적대적 M&A가 될 수도 있고, 돈으로 찍어 누른 인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음···”
“자본경쟁에 있어 정당함을 원합니다.”
“경쟁에 있어 자유를 보장해 달란 얘깁니까?”
말을 가려서 하지만, 대통령도 내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물론 비서실장도 마찬가지.
내 말을 쉽게 표현하자면.
‘재벌 놈들 건드릴 거니까, 그 치들에게 받아먹은 돈이 있어도 끼어들지 마’였다.
“예, 무한한 자유, 당연히 가지고 있었던 그 자유란 권리를 원합니다.”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미 대한민국은 그렇습니다.”
코웃음이 쳐질 만큼,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지만 확답만큼은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긍정적인 대답이지만 부족했다.
“확답이 듣고 싶습니다.”
혀를 한번 차고는 말하는 대통령.
“국민에게 피해가 없다면, 정부의 압력은 없을 겁니다.”
야당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했다. 이 정도만 되어도 ‘항복’선언을 받았다 할 터인데.
“하나 더 있습니다.”
이어진 내 말에 대통령과 비서실장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할아버지조차 놀랐는지 눈으로 ‘진심인게냐?’하고 묻는 것 같았다.
< 제 48화.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