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7화. >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들으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꽤 달큰했다. ‘주도’야 솔직히 배울 게 없고, 할아버지도 딱히 터치하지 않았다. 뭔가 권위적이고 딱딱할 것 같은 얼굴이지만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 좀 깨어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술잔을 가리고 그 딴 건 다 필요 없어! 즐기면서 마시고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주도’인게야, 알겠느냐?”
“예!”
“오냐, 그럼 죽을 때까지 마셔보자.”
방금 전 한 말과 대비되는 말을 서슴없이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욱 유쾌하고 할아버지만의 유머 방식이었다.
철웅과 호석, 아산댁과 가사도우미들이 없는 식사였고, 술자리였다. 우리 조손이 정말 모든 허물을 벗고 친밀감을 더욱 형성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오냐.”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할아버지의 삶에서 어째서인지 ‘가족’에 대한 얘기는 일절 없었다. 내가 회귀했다는 걸 숨기는 것처럼, 할아버지도 가족 얘기는 숨기는 것 같았다.
“네 할머니는 아주 강한 여인이었다. 옳고 그름이 명확하고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 그런 여인이었지, 그런 부분은 네 녀석이 빼다 박은 것 같기도 하구나.”
부족했다.
술을 마셔서 그럴까? 알코올에 힘을 빌려 가족 얘기를 듣고 싶었다. 막 입을 열려는 찰나, 할아버지의 질문이 먼저 날아왔다.
“궁금한 게 있구나.”
“예.”
“무기를 좀 시원찮게 사용한 것 같은데, 이제 그 무기는 끝난 게냐?”
더 이상 가족에 대한 얘기는 싫으신가 보다.
촉촉하게 젖은 눈, 짙은 회한에 젖은 저 눈을 보자니 굳이 가족 얘기를 꺼내고 싶진 않았다. 때가 되면 먼저 얘기해주실 날이 오겠지 하고 넘기기로 했다.
질문에 별 대답이 없자 할아버지가 대뜸 말한다.
“이놈, 할아버지한테 복수하는 게냐?”
고개를 꺾어 독한 안동소주를 털어내고, 젓가락을 놀려 홍어와 돼지 목삼겹을, 잘 씻어낸 묵은지에 올려 할아버지의 접시에 올렸다.
“쌤쌤입니다.”
“하하하, 오냐 쌤쌤이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다. 내가 그 무기를 다른 곳에 쓸 것임을.
“할아버지, 진짜 딱 하나만 더 여쭐게요.”
“흐음.”
“우리 집안은 원래 반골이에요?”
할아버지가 푸흐흐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따라주셨다.
“네 놈이 손수 증명하고 있잖으냐?”
“역시 집안 내력이네요.”
“우진이 네 눈만 봐도 곧 나라가 시끄러울 게 불 보듯 훤하구나.”
“좋은 선물이 될 겁니다.”
금 모으기 운동의 그 뭣 같은 겉치레.
그걸 좀 걷어내야겠다.
벌써 독한 안동소주를 몇 병이나 비워냈는지 모르겠다. 술값 걱정이야 할 필요 없는 상황이고, 술 취할 걱정도 없었다.
“네 놈은 확실히 내 핏줄이야, 우리 천가의 핏줄.”
술을 잘 먹는다고 핏줄을 확인하신다. 피식 웃으며 현재의 기분을 즐겼다. 잠자기 딱 좋은 알딸딸한 상태랄까?
“녀석 슬슬 취기가 도는구나, 첫술이라 그런게냐?”
“첫술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우문현답이구나··· 참 좋구나.”
“예, 참 좋네요.”
짠.
자기로 된 잔이 부딪치고 이제는 달게 느껴지는 소주를 들이켜고 잘 무쳐진 무말랭이 위에 목삼겹을 얹어 먹었다.
“어디서 들은 명언인데, 그런 말이 있더구나.”
우물거리며 할아버지에게 집중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오, 사람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들어본 명언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맞는 말 같더냐?”
“그 명언 얘기한 사람이 애매한 부자였나 보네요.”
“뭐라? 파하하하하.”
“진짜 부자는 그런 걱정이 없습니다. 돈을 잃을 일 없으니 조금 잃을 일 없고, 사람을 잃는 놈이 진짜 부자일 리 없고, 건강을 잃을 정도로 멍청한 놈이라면 부자일 리 없으니까요.”
“크하하하하하.”
오늘 술자리 중 가장 크게 웃으시는 할아버지.
“할애비가 여태껏 이 명언을 참 좋아했는데, 오늘부터는 우진이 네 녀석 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겠구나! 현답이다, 현답이야.”
할아버지가 저 명언을 내게 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주 건강을 위해 너무 ‘과음’하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내 대답은 ‘걱정하지 마세요’와 약간의 유머였고 말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건강 챙기세요, 특히 건강검진 정기적으로 받으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오냐, 올 5월에는 함께 가겠느냐?”
“좋죠? 이왕이면 아산댁 아주머니랑 호석 삼촌, 철웅 삼촌도 같이 가죠?”
“좋다! 비용은 할애비 지갑에서 나올 테니 너는 그리 알아라.”
“예, 돈 굳고 좋네요.”
***
꽃 피는 춘삼월.
청와대에 다녀온 지도 벌써 두 주가 흘렀다.
시간은 금인 법인데, 어쩐지 청와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할 뿐, 이렇다 할 얘기가 없다.
하여간 엉덩이 무거운 양반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인다.
마당에 한가롭게 앉아 헤이즐넛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뉴욕은 지금 밤 10시가 살짝 안 된 시각일 터.
-예스.
“체이스? 나 천입니다.”
-오오, 첸 늦은 시간에 전화를 줬네요.
“아 우리는 아침이거든요.”
-뭐, 괜찮습니다 한가롭게 영화나 보고 있었거든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호오, 젊은 천재의 부탁이라··· 들어 볼까요?
“나와 체이스는 우호적인 관계죠? 적어도 한국에 대한 일에서는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었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되었어요.”
분명 지난날, 체이스와 삭스는 CIA윌리와 함께 작고 허름했던 스카이 인베스트먼트의 사무실에서 약속했었다. 한국의 일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말이다. 여태껏 한 번도 쓰지 않았던 그 약속을 이제 슬슬 사용해야겠다.
고정된 돈은 죽은 돈이다.
돈은 움직여야 살아난다. 더 큰 돈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그러니 사용할 수 있다면, 리스크가 없다면 더욱더 사용해야 한다.
-약속했으니 당연합니다.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이란 걸 알고 있습니까?”
-알다마다요, 대단한 국민성이라고 해외 언론들도 칭찬하기 바쁩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우리가 얻은 건 저런 이미지가 전부였다. 실제 21억달러 가치의 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아, 물론 현재는 대한 은행.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손에 일부의 금이 있으니 21억달러 가치의 금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감춰진 진실이 있습니다.”
-으음.
무엇인가 느낀 모양, 말을 조심하는 체이스.
“JB모건이 공개적으로 비판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금 모으기 운동을 말입니까?
“정확히는 그 운동으로 이득을 취하는 한국의 기업을.”
-음, 바깥에서는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군요.
“쉬쉬하고 있지만, 사실 금 모으기 운동은 대기업의 탈세와 실적 부풀리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 놈들 대외 신인도 높이기에 말이죠.”
-아아, 대충 무슨 얘기인지 알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따로 서면으로 보내드리죠. 감사합니다.”
JB모건의 체이스가 움직여준다.
대단한 걸 요구한 것도 아니니 흔쾌히 응해주었지만, 언젠가 나도 그의 가벼운 요구 하나쯤은 들어주어야 할 테다.
상관없다.
이 일로 얻을 이익이 더 클 테니까.
그리고 JB모건으로 끝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어서 또 전화를 걸었다.
-헬로.
“아, 삭스 나 스카이인베스트먼트 천입니다.”
-오오 동방의 신비한 천재!
“하하하, 한 잔 하셨나보네요?”
-오, 역시 동방의 천재는 마음의 눈이라도······
***
다음날 9시 뉴스.
JB모건의 체이스와 골드만글러브의 삭스가 화면으로 등장했다.
뉴욕의 빌딩 숲이 내려다보이는 집무실에 앉아있는 체이스가 보였다.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애국심이 투철한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국민성이라고 칭찬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이 효과가 있을까요? 빠르게 외환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글쎄요, 금 모으기 운동이란 국민들의 단합력과 국민성은 칭찬받고 존경받아야 마땅하나, 아쉽게도 한국의 기업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째서인가요?
-금 모으기 운동으로 헐값에 매입하거나 기부받은 금을 사적 욕심에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V에 기자의 얼굴은 나오지 않지만, 놀란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예? 정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종합상사, 혹은 무역회사로 위장한 사업체를 만들어 헐값에 금을 매각하고, 고가에 금을 다시 사들이면서 ‘실적’을 부풀리고 한국의 무역법과 세법의 빈틈을 파고들어 탈세를 일삼고 있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정부, 정부는 뭘 하고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새로 출범한 지 얼마 안 돼서인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다시 화면이 바뀌고 삭스가 나왔다.
-금 모으기 운동으로 생긴 금을 관리하고 있지 않아요, 함부로 사용하는 기업들에 별다른 제재가 없습니다.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기업 오너 일가’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건 틀린 말입니다. 지금 한국은 기업 오너 일가 살리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할아버지가 TV에서 시선을 떼고 날 바라보신다. 눈에는 ‘어떻게?’가 쓰여 있었다.
“손자가 능력이 좀 좋죠?”
“저 치들이 우진이 네 녀석 때문에 움직인 게냐?”
“뭐, 운이 좋았죠.”
곧 한쪽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백철웅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할아버지가 요사스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우진이 네가 말한 선물이 도착한 모양이구나.”
이어서 정호석도 내게 다가왔다.
“제 것도 포장 예쁘게 해서 온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쯧, 미국이 움직이면 정말이지 사족을 못 쓰는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특히나 지금 같은 형국에는 더더욱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현 정권은 당연히 더 하다면 더 하다. 북한과의 외교 문제에 관심이 많으니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건 더욱 당연한 일.
“돈 빌려주는 놈들이 미국 놈인데, 별수 있습니까? 채무자한테는 채권자가 신이고, 하느님이죠.”
“녀석, 말 한번 사납게 하는구나.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가만히 나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철웅에게 말했다.
“그래, 청와대더냐?”
“예.”
“바쁘다 일러라.”
히죽 웃은 백철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뒤로 사라졌다. 나는 웃으며 정호석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들으셨죠?”
“하하하, 예.”
밝게 웃은 정호석도 백철웅이 사라진 곳으로 함께 갔다.
“그러게 떡 줄 때 받아먹었어야지 쯧.”
할아버지도 나도, 얼굴이 펴질 줄 몰랐다.
“금으로 해먹은 놈 중에 이건 그놈도 있더냐?”
웃으며 하신 질문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똥개가 똥을 끊겠습니까?”
“파하하하하. 똥개라 그거 어울리는구나!”
한참을 웃던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우선은 그 인프라망 설치가 먼저더냐?”
“예, 그것도 있고요.”
“녀석, 뭐가 더 있구나.”
그저 히죽 웃을 뿐, 뒷말은 삼켰다.
“한 번을 속 시원하니 얘기하지 않는구나.”
“너무 다 알면 재미가 없잖아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데 옆에서 줄거리를 조잘거리면 재미있겠어요?”
“쯧, 이번에는 이건 그놈 볼기짝이라도 차버릴 셈이더냐?”
역시 눈치가 염라대왕 뺨을 후린다.
이재현의 죽음과 카이그룹의 고가 인수, 비자금을 빼돌린 것까지가 ‘명존쎄’였다면, 이번엔 어퍼컷쯤 되지 않을까?
어떤 영화의 주인공은 ‘아직 한 발 남았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직도 달러는 한참 남았다.’
***
SKY그룹의 본사 사옥.
강남대로 한복판에 있는 사옥의 최상층 집무실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언제나 설렜다.
인프라망 설치는 둘째 치고, 현재 내가 집중하고자 하는 사업이 하나 있었다. 문화를 선도하는 기업을 추구하니 자연스럽게 문화와 기술의 융합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근시일 내 가장 확실하게 떠오를 문화와 기술의 융합한 사업이 하나 있었다.
“회장님 실무자 회의 준비되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듣기 좋은 비서의 하이힐 소리를 따라 대회의실로 이동했다.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서자 꽤 많은 인파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 대한민국에 인재가 바닥에 널리고 널렸다.
대충 가서 ‘월급 줄게 일할래?’하면 ‘예! 감사합니다 평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하고 달려들 사람들이 쌨다.
그만큼 여기 앉아 있는 실무자들은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란 뜻이다. 중역 회의, 임원 회의 따위의 겉치레가 아닌 실무자 회의를 모집한 이유가 있다.
저마다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엔 선명하게 SKY 그룹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 제 4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