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46화 (46/458)

< 제 46화. >

쓸 데 없고, 짜증나는 이상한 행사들이 연이어 진행되는 청와대 내부.

대충 정치 놀음에 얼굴을 팔아야 하는 경제인들의 표정은 겉으론 밝지만 속으론 전혀 그렇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할아버지는 대놓고 무표정으로 있었다.

할아버지와 내 명성에 기대어볼까 정치인 몇이 어슬렁 거리지만 그들과 어울려줄 마음이 한 톨도 없었다. 정치 이꼬르 사기꾼이라는 공식이 이미 내 머리와 할아버지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지루하구나, 음식마저 별로라면 제법 화가 나겠어.”

“할아버지.”

“왜.”

“끝나고 껍데기에 소주라도 한 잔 하실까요?”

할아버지가 새삼스런 얼굴로 날 바라보신다.

“그러고 보니 아직 손자놈이랑 술 한잔 하지 않았구나?”

“예, 저도 성인인데 할아버지가 술을 안주시니 바깥에서도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하하하, 오냐 오늘은 이 할애비가 주도를 알려주마.”

“예, 기대하고 있을게요.”

결국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고 있을때. 자칭 ‘국민정부’의 핵심이자 대통령의 오른팔 비서실장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천혁수 회장님.”

“그래요, 반갑습니다.”

“VIP께서 기다리십니다.”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나는 할아버지,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비서실장이 잠시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이 가십니까?”

“네, 우리 천가에 볼일이 있던 것 아닙니까?”

꽤 공격적인 내 말에도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비서실장. 확실히 정치하는 사람답게 포커페이스가 좋았다.

청와대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다.

전 삶에서도 경제인 모임때문에 이건을 수행하면서 온 경험이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설렘따윈 찾아 볼 수 없는 표정일터. 걷고 있던 비서실장은 그런 내가 의아한지 내게 물었다.

“익숙하신 모양입니다.”

“예?”

“젊은 나이에 성공하셔서 그런가 배포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보통 청와대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꽤 신기해하거든요, 긴장하거나.”

불쑥 끼어든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놈이 우리 핏줄을 닮아 배포가 대단하긴 합니다.”

“그렇군요.”

커다란 목재 양문 앞에 선 비서실장이 노크를 하자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의자에 앉아있던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특유의 걸음걸이로 우릴 반겼다.

“반갑습니다. 음? 손자분도 같이 오셨군요?”

“예, 대통령님을 뵙고 싶다고하여 함께 왔습니다.”

할아버지와 대통령이 웃는 얼굴로 악수를 나누고, 이내 대통령이 내게도 손을 뻗어왔다.

“반갑습니다. 천우진 회장.”

“네, 반갑습니다 대통령님.”

대통령에 손짓에 자리에 앉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천혁수 회장님, 참 좋은일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죠.”

대통령 앞에서도 자신의 의도를 전혀 감추지 않는 할아버지. 그러나 대통령에게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겸양이나 겸손으로 보였나보다.

“하하하, 저금리의 대출을 감행하시는데 그게 어떻게 돈벌자고 하는 일이겠습니까? 또, 채무 상환이 힘든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복지 정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지금부터 말하는 것이 본론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태까지는 칭찬으로 사람의 마음을 허물어트리는 기본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대화법일 뿐이다.

“계속해서 대기업들이 부도를 일으키고 있고, 전문가들의 의해 그것은 최소 2년간은 지속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의 말은 사실이니까.

“해서 앞으로도 계속 대한은행에서 시행하는 대출에도 한계선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큰 돈의 대출은 아니지만 분명 하나의 은행이 모두 실행하기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가는 것은 똑같다. 이미 기 대출 규모가 6조를 넘어가는 상황이기도 했다.

예금 규모가 확대되고 본래 가지고 있던 자본금 규모도 적지 않으니 아직까진 원활한 자금흐름이 있었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유지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시장에 현금이 말랐다.

그 말은 복합적인 경제위기 상황을 초래 할 수 있음이었다. 멍청한 은행들과 멍청하고 무능한 정부가 부실기업들에게 돈을 쏟아부은 상황에서 은행이 정부나 한국은행에 손을 내밀 순 없는 상황. 대한 은행이 기존의 은행들과 다를바 없는 행보를 보인다면 지금까지 쌓은 신뢰도는 한 순간에 바닥에 떨어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

대한민국의 대외 신인도가 B-등급에 이르면서 외환위기가 심화되었으니, ‘신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항목인지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최대 800만원이란 대출금액도 전문가들과 장고 끝에 결정한 것이고, 모두가 800만원의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적게는 150만원 선부터 800만원까지 그 기준이 매우 까다롭다.

“우리 정부가 대한 은행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가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게 국민복지에 도움이 되는 상황이니까요.”

할아버지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네 놈 생각이 옳구나.’

‘원화야 찍어내면 그만이니까요.’

할아버지가 대통령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도움을 주실 요량입니까?”

“그 부분을 합의해 보자고 천혁수 회장님을 모셨습니다.”

“대출금의 20퍼센트를 국가가 책임지는 방향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돌린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문 앞에 서 있던 비서실장은 무전기에 대고 소곤거렸다.

채무 중 20퍼센트를 국가가 책임진다.

이 사실만 발표되어도 현 정부의 지지도에는 물론, 대한 은행의 신뢰도는 더 높아질게 분명했다.

비서실장이 말을 전하고 전문가들이 지금 분석하고 있을 터. 자연스럽게 적막이 내려 앉았고 나와 할아버지는 차분하게 차를 들이켰다.

대통령이 적막이 싫었는지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첫번째는 그렇고 두번째도 있습니까?”

“대한 은행에 공적자금을 좀 내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더 많은 국민들에게 대출을 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대통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싫다라는 의사표현이 확실했다.

“그럼 빌려주는 형태를 띠시죠, 경제위기가 지나가면 갚아나가겠습니다.”

“음, 가능한 고려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긍정의 표시를 뱉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말을 그대로 들어서는 안된다. 가능한 고려하겠다란 말은, 어쩌면 안 될 수도 있단 얘기였으니까.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어떤 사인을 보내고, 고개를 끄덕인 대통령이 말했다.

“20퍼센트의 책임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좋습니다.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발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떤 방식이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저 말엔 거짓이 없을테다. 표심을 얻고 싶은 정부는 물론 정치인들이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다. 어떤 국가든 소득 하위 계층이 훨씬 많은건 당연하니까.

대충 할아버지와 대통령사이의 대화가 마무리 된 것 같으니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대통령님.”

내게 시선을 옮기는 대통령.

“정보화 혁명을 말씀하실 정도로 IT산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SKY그룹도 IT산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IMF에서 다양한 국가사업들을 민영화 하라는 것이 협의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국가 기반의 산업들을 민영화 시켜 외국자본이 손쉽게 들락거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다.

“그래서요.”

자연스럽게 대통령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변했다.

“SKY통신이 전국에 인터넷 망을 설치하려고 합니다. 이걸 국가 산업 형태로 먼저 관공서와 학교등지에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통령이 눈을 빛냈다.

“음, 확실히 고려하고 있던 부분이긴 합니다.”

“현재 SKY그룹은 국민들의 신뢰도가 높습니다. 그런곳에서 정부와 함께 일을 도모한다면 자연스럽게 정부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신뢰도도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말 장난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좋아할 말 장난이었다.

“자금이 문제군요.”

돈을 내 놓으라는 소리였다. 네들만 이익보면 되겠냐 하는 말이었다.

할아버지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할아버지 눈에서 난 그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우진이 네 말처럼 되는구나.’

‘그럼요, 이래서 무기가 필요한겁니다.’

‘오냐, 그 무기 잘 써보아라.’

오늘날을 위해서 준비한 건 아니었다.

인프라망 설치, 통신망 설치 등의 목적으로 펼쳐질 국가 산업 입찰에서 써 먹을 요량으로 챙겨 놓은 무기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먼저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더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테니까.

“금모으기 운동 말입니다.”

“흐음,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대기업 배불리기가 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대통령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막 정권에 앉은지 한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벌써부터 어떤 문제, 그것도 전 국민적 관심을 끌었던 금 모으기 운동에 문제가 생긴다면 타격이 클터.

실제로도 2월 말 금모으기 운동은 스톱되었다. 정부의 압력이었는지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 3월이 지나면 금모으기 운동은 효과가 없다. 가계에 남아있는 금이 없을테니까.

“정부는 금모으기 운동을 전개했는데 대기업 종합상사들은 금을 다시 사오고 있습니다. 헐 값에 팔고, 비싼값에 매입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협박으로 들릴수도 있으니 대통령이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개 되는 것은 꺼릴 터. 게다가 스카이그룹과 함께 대한종합금융그룹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어마어마한 상황이었다.

“크음, 천우진 회장이 얘기했던 통신망에 대해 스카이통신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됐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얻어 낼 건 얻어냈으니, 당근을 조금 쥐어줘야 할 때라고 생각되었다.

“대한 은행과 우리 스카이그룹은 가진 금이 꽤 있습니다. 대한 은행은 당연하게 금모으기 운동에 쓰였던 금도 가지고 있고요.”

아직 바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한국은행이 해당 금을 가지고 외채를 빌려오면 어떨까 싶습니다.”

“공짜는 아니란 얘기군요.”

“예, 금을 빌려주는 형태로 가져가시죠.”

비서실장이 종일 무전기에 뭔가를 씨부리는 것으로 보아 바쁘게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적절한 금액을 지금 바로 말씀하시라고 얘기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니, 의사만 전달해주시면 됩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근 시일 내에 자리 한 번 만들지요.”

“예,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행사장으로 가시지요, 저녁만찬을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할아버지와 먼저 악수하고, 다음 내게 손을 뻗는 대통령. 마냥 편한 얼굴은 아니었다. 애매하다면 애매하다고 볼 수 있었다.

“스카이 그룹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지요, 나도 지켜보겠습니다.”

“예, 승승장구하는 모습 기대해주십시오.”

이곳에 왔을때와 다르게, 행사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안내를 맡은 경호원 하나가 전부였다.

다시 원래의 우리 자리에 앉고, 나오는 음식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 놈, 너무 몰아부치는 구나.”

“당근도 던져주지 않았습니까?”

픽 웃은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 놈아, 나중에 금으로 다시 갚는 형태라며?”

“그렇죠.”

“금 값이 지금의 세배는 너끈히 뛰어 오를거라고 했던건 네 놈이었어.”

“그렇죠?”

“곧 죽어도 공짜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얘기구나.”

“당장 외화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기업 한다는 놈들은 제 주머니 챙기기 바쁘고 국가는 숨기고 감추기 급급해요.”

“쯧쯧, 너무 튀어도 문제다. 때론 감출줄도 알아야 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단위 통신망 개설은 보통 사업이 아닙니다. 그래서 좀 욕심을 내 봤습니다.”

“우진이 네가 다 생각이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정권 초기다. 가장 힘이 셀 시기야 굳이 부딪히려 하지 말거라.”

“예, 알겠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잘 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한 번이 어렵지 두번 세번은 몹시 쉬운 법이다.

한번 고개 숙이기 시작하면 다음, 그 다음은 또 고개를 숙이게 될 것이다. 왜냐면 그게 편리하니까.

나는 결코 고개 숙이고 싶지 않다.

그건 내가 걷는 길이 아니니까. 다만, 할아버지가 손자를 걱정해 하는 말까지 따박따박 말대꾸 할 필요는 없으니 알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도 내 뜻을 읽었는지, 혀를 한 번 쯧 하고 차시더니 식사에 집중했다.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한 수저 크게 미역국을 떠 입에 넣었다.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할아버지.”

“오냐.”

“바빠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음식이 별로구나 나도 바빠야겠다.”

우리 조손은 사이 좋게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아산댁의 음식과 비교하면 욕 나올 정도로 입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행사장을 빠져나가는데 할아버지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하셨다.

“그나저나 이건 그놈 배알이 꼴리겠어, 제 놈 금으로 우리가 배를 불리면 말이야.”

“하하.”

오늘 할아버지와 술자리의 안주는 이건이 될 것 같았다.

< 제 46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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