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5화. >
본래 스카이 인베스트먼트의 작은 사무실은, 이제 김장원의 차지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김장원이 소파에 누워 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따 회장님 오셨습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여기서 자요?”
“흐흐, 혈혈단신 부랄 두 짝이 전부라 누우면 침대요 덮으면 이불이죠잉.”
“에휴, 잠은 집에서 잡시다. 뭣 하면 하나 얻어줘요?”
“흐흐 아닙니다. 요 위에 옥탑방도 괜찮습니다.”
“쯧, 좋은 데서 사시라니까.”
씁쓸한 표정으로 변한 김장원.
“나가 다짐 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염병할 놈 잡기 전까정 편히 살지 말자 하고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가 말하는 인물은 아마도 김장원 사장을 잠시나마 나락으로 보냈던 인물 일터.
평생 친구라 믿었던 놈의 배신이니 아마 김장원 사장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테다.
“얘기 들었죠?”
“예, 정 실장 아니, 정 사장님헌티 들었습니다. 사채시장 감사 직책을 주신다고요?”
“말이 감사지 뭐, 관리하란 얘기였습니다.”
“회장님 돈 슈킹하는 놈들 관리죠잉?”
“그렇죠.”
“아따··· 박무성 그 양반 여운디.”
“나는 따로 언질 주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처리하세요.”
내 말에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곧 사냥감의 약점을 파고들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자신 있는 모양이니 더이상 내가 개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다 끝나고 보고만 하세요.”
“알겄습니다.”
***
김장원이 특유의 걸음걸이로 어기적어기적, 이제는 박무성의 사무실이 된 전 천혁수 회장의 사무실에 올라갔다.
사채시장의 꽃이라 불리는 명동의 한가운데 있는 그 허름한 빌딩은 이쪽 세상에서는 꿈과 같은 곳이었다.
딸랑.
유리로 된 문을 여니 방울 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습니까?”
“허따 고급지네요잉.”
깊게 고개를 숙이는 리셉션에게 특유의 말투로 말을 하고는 씨익 웃으며 내부를 휙 훑더니 말했다.
“저짝이 사장실이오?”
리셉션 여직원이 경계 어린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잉, 나가 박무성 사장에게 쪼까 볼일이 있소, 김장원이가 왔다고 말하믄 알텐게, 그렇게 전해주쇼.”
말투는 정겹지만, 표정이나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여직원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종종걸음으로 사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이내 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금새 나오더니 김장원을 안내했다.
“아따 박 사장님 오랜만이오.”
“어쩐 일이야?”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인지 제법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별것은 아니고요, 나가 지금 모시는 주인께서 인자 사채시장을 감사하라고 하네요.”
“뭐?”
박무성의 얼굴이 순식간에 악귀처럼 변했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나한티도 장부를 공개하셔야 한다 이 말입니다.”
“이미 도련님께 따로 보고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너한테도 보고하라고?”
“워메,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시네요. 나가 박 사장님 윗사람도 아니고 보고를 하랍니까? 공개요, 공개.”
“그게 그 말 아니야?”
세수하듯,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김장원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얼굴을 박무성에게 가까이하고는 말했다.
“그딴 것은 난 모르겄고요, 나는 우리 회장님이 시키는 일만 합니다.”
“이 새끼가···”
“사채시장은 박 사장님이 잡수고, 나는 회장님이 챙겨주시는 용돈이나 받을라니까, 옳게 갑시다. 어려울 거 없자네요?”
“장부를 공개가 우리한테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이래?”
김장원이 품 안에서 칼을 꺼내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에 찍었다.
쿵! 쩌저적.
유리가 갈라지고 안쪽 나무 테이블에 칼이 깊숙하게 박혔다.
“박무성 사장님. 나가 우리 회장님께 약속한 것이 있소.”
“······”
“챙겨만 주시믄 짖지 않고 예쁘게 따라간다고 약속혔다 이 소리요, 나 김장원이요 죽어도 따라갑니다.”
박무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까 놓고 말 혀서, 쩐주가 자기 쩐 감시하겄다는데 문제 있소? 깨깟하게 보관만 하시고, 굴리기만 잘 하셨으믄 아무 이상 없는 거 아니오?”
“이 새끼가, 김장원이! 네 놈한테 장부를 공개하라는 건 내가 네 놈한테 고개를 숙이라는 뜻이잖아. 아니야?”
김장원이 스산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아따 고것이 어렵소? 그 잘난 모가지 좀 구부리는 게 모가지 날아가는 것보다 어렵소?”
“이 새끼가 버르장머리 없이, 너는 선배도 없어!”
“뭔 갑자기 배분 타령이요, 그랴고 회장님헌티 자꾸 도련님이라고 허시는데, 그 혓부닥도 조심헙시다. 듣는 회장님 개새끼 심기가 불편하니까요.”
“······”
“박무성 사장님이 나헌티 장부 공개한다고 혀서, 나으아랫사람이라 생각 죽어도 안 합니다. 약속합니다. 나 김장원이오, 약속과 신의는 반드시 지키는.”
박무성이 고개를 젓다가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담뱃갑을 김장원에게 권했다.
김장원도 담배를 하나 물고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 박무성의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후우··· 김 사장 내가 궁금해서 그래, 도련··· 쯧 눈깔 하고는, 회장님한테 왜 충성을 하는데?”
김장원은 별거 아니라는 듯 퍽 웃으며 말했다.
“재밌자네요?”
“재미? 회장님의 복수의 칼날이 되는 게 재미있나?”
“아따, 뭐 대단한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디, 우리 회장님 복수 같은 그런 달달한 것에 취해 있는 분이 아닙니다.”
박무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니라고? 누가 봐도 복수가 아니야?”
“잉, 아니죠 복수는 과정일 뿐이고 결과는 고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말없이 담배만 태우길 몇 분.
김장원의 입이 열렸다.
“나가 볼 적에는, 우리 회장님이 지금 새 세상을 맹글고 계신 것 같소.”
“새 세상?”
“지금까지는 진짜 굉장합디다. 자기 사람은 살뜰하게 챙김서 자기 사람 아닌 것들한티는 악마가 따로 없소, 그 어린 나이에 범인은 상상도 못 할 정신력이라 이 말이오, 그런 사람이 난중에 나이가 들어서 경험까지 쌓이면 어떨 것 같소?”
“도대체 무슨 소린지.”
고개를 젓는 박무성에게 피식 웃음을 날려주곤 말을 잇는 김장원.
“못 믿겄으믄 지켜보쇼, 분명 달라질텐게, 나헌티 장부 공개하는 것은 잊지 마시고요.”
“이 새끼가 아직도···”
우적우적.
태우던 담배를 그대로 입안에 넣고 씹기 시작하는 김장원, 검은 물이 김장원의 입가를 타고 턱으로 흘렀다.
“미친.”
기겁하는 박무성의 표정과 함께, 씹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퉤!’하고 뱉어낸 김장원이 말했다.
“홍어 좆이건 뭐건, 그딴건 난 모르겠고, 나는 시키는 것만 합니다. 내 주인이 사채시장의 감사 직책을 내렸으니까 나는 따릅니다. 간단헙니다. 이것이 시험인지 뭔지 그딴 것도 궁금허지 않습니다. 뒤져도 하고 뒤져서도 합니다.”
서슬 퍼런 기세와 함께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눈빛. 사자든 호랑이던 코끼리든. 무조건 달려들어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말.
박무성이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그냥 공개 받았다고 보고하면 안 되나?”
“허따, 나가 뭐 박 사장님 용역이요? 시키는 대로 허게?”
결국 백기를 들어 올리는 박무성.
“쯧, 일주일에 한 번씩 직원들 보내, 김 사장 네가 직접 오던가. 장부 외부 유출은 안 되니까 이해하라고.”
“예, 고정도는 이해해야죠. 좋게 끝났으니 다행입니다. 나도 선배님 피를 묻히고 싶진 않았으니께요.”
김장원이 일어서더니 창문을 열고 아래에 소리쳤다.
“철수 혀라!”
““예!””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박무성의 손이 떨렸다.
빌딩 아래의 상황을 알진 못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얼핏 수십을 헤아릴 것 같은 덩치들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리 회장님께 너무 서운케 생각하지 마십쇼잉, 다 아랫사람들 옳게 챙길라고 그라시는것 아니겄습니까? 까 놓고 선배님도 이자만 받아묵어도 솔찮하자네요?”
“꺼져.”
픽 웃은 김장원이 고개를 끄덕이곤 박무성의 사무실을 벗어났다.
***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거꾸로 거슬러 오를 순 없다. 물론 난 예외다.
이미 거꾸로 거슬러 왔으니까.
1998년이 되었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지도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세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했다. 안타까운 점은 서민들의 삶은 계속해서 어려워지고 있고, 원래 돈이 많았던 인간들은 헐값에 나온 집, 건물 등을 매입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부를 늘려가고 있었다.
모순되게도.
서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있는 지금이, 나와 할아버지 우리 ‘천’가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대한종합금융 그룹이 서울은행, 제일은행 등, 부실해져 도산한 은행들의 공개매각에서 거의 줍듯이 차지했다. 사실 나설 수 있는 금융사가 없었기 때문에 거저 주워왔다는 게 더 맞았다.
대한 금고는 여러 은행이 합쳐지며 대한은행으로 이름을 바꿨고, 커다란 덩치만큼 커다란 신뢰도와 함께 서민들에게 생활 안정 자금 대출을 감행했다.
“이제 슬슬, 우리도 힘에 부치는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예금자가 폭증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지, 그래도 금액이 크지 않아. 아무래도 가게에 돈이 흐르지 않는 모양이다. 대통령이 만찬에 우진이 너도 가지?”
“예, 경제인 만찬이라는 허울이니까 가야죠.”
“비서실장이 따로 보자고 하더구나, 같이 하겠느냐?”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통령이 할아버지를 보고자 하는 의도를 몰라서였다.
“의도가 뭘까요?”
“글쎄, 한창 민심의 중심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너와 내 회사에 올가미를 씌울 리는 없을 테고··· 정치인답게 우리가 가진 민심에 편승하려는 의도가 아니겠느냐?”
할아버지의 말은 설득력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더니, 할아버지는 말없이 가만히 기다려주셨다.
“아!”
번뜩 떠오른 생각.
할아버지가 궁금하다는 듯 날 바라보신다.
“새마음 새 출발 대출에 한 발 걸치고 싶은 모양이네요.”
“음? 우리 은행 일에?”
“예, 거의 확실할 겁니다.”
“흐음, 내가 얻을 것은 무엇이겠냐?”
히죽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할아버지의 것은 잘 모르겠는데, 저는 확실히 얻어낼 게 있네요.”
“이제 네 놈 밥그릇만 챙기는 게냐?”
“우리나라가 달러가 없지 원화가 없는 게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꼭 나와 닮은 표정으로 말했다.
“녀석, 원화를 가져오란 얘기구나.”
“예, 아마 대통령도 그걸 원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원화를 가져가는 것을?”
“예.”
“우리 대출에 한 발 걸쳐서 민심을 사보겠다?”
“네, 확실합니다.”
“오냐, 어디 네 예측이 맞는지 구경하러 가보자꾸나. 점심은 비빔국수가 어떻더냐?”
“좋죠, 저는 열무김치 들어간 놈으로 부탁드려요.”
고개를 돌려 말하니, 인기척도 없던 곳에서 아산댁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 도련님, 회장님은요?”
“나는 달큰하고 꼬숩게.”
“호호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할게요.”
아산댁이 주방으로 사라지고 다시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막 신문을 들어 올리려다 내 눈을 보고 물었다.
“말하거라.”
“원하는 걸 그냥 주실 생각은 아니시죠?”
“답을 알고 있으면서 굳이 묻는구나.”
맞다.
할아버지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녀석 원하는 게 있구나? 그것 때문에 내 것을 포기하라 말하고 싶은 게냐?”
역시 눈치가 귀신이다.
“아뇨, 이왕이면 둘 다 먹는 쪽으로 가시죠.”
“쯧쯧 미리 언질을 해 두어 이 할애비의 양보를 끌어낼 속셈이구나.”
“에이~ 제 돈이 할아버지 돈이고, 할아버지 돈이 제 돈이죠?”
“그리고 결국은 다 네 돈이고?”
“그렇죠.”
“이제 보니 용이 아니라 능구렁이구나?”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시며 물었다.
“그래, 네 놈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
“아마 이번 정부는 IT산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겁니다. 인프라망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할 테니까요.”
“흐음, 저번 얘기와 일맥상통하는구나.”
“예, 할아버지도 대충 조사해보셨죠?”
“그래, 돈줄이 있다는데 확인 안 할 수야 있더냐? 확실히 미국발 IT 바람이 불어닥치겠더구나.”
아무리 힌트를 줬다지만,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분명 능력이었다. 선생이 아무리 떠들어도 모르는 학생들은 끝까지 모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하면 좋은 줄 알고 따라 하는 나라가 한 둘이겠어요?”
“그렇지.”
“그런 미국도 못 하고 있는데 인프라망 갖추기입니다. 유럽도 마찬가지고요.”
“서구권도 못 하는 것을 우리나라가 먼저 선도하려 한다?”
“적어도 우리나라 안에서는요.”
“오호라, 네 놈이 규모를 늘리고 있는 통신회사가 그걸 준비하는 것이구나, 단순히 통화료나 먹자고 하는 짓이 아니었어. 대통령 취임사에서 얘기했던 정보화 혁명에 얽힌 일이겠구나.”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돗자리를 까시는 게 더 수입이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쫙! 등짝 스매시가 날아왔다.
이제는 정말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허물이 사라진 것 같아서 난 더 기분이 좋았다. 정겹다고 할까?
“국수 다 됐어요~”
아산댁의 말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제 4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