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4화. >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제법 눈이 따가웠다.
그러나 내 시선은 이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명치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이건의 두 눈동자.
‘네놈이··· 네놈이···’
하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픽 웃고는 기자들 앞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사전에 준비해 놓은 스카이 그룹의 자료를 직원들이 기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전달했다.
기자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꽤 두꺼운 홍보서류에 닿았다.
“어? 이 로고?”
“어어! 그 익명의 독지가?”
기자들의 웅성거림을 이건이 못 들었을 리 없다.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표정이 좋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내 기분은 구름을 뚫고 우주에 닿을 만큼 기쁨이 끝을 모르고 커졌다. 어찌나 통쾌한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연스럽게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스카이 그룹은 고객들과의 상생을 모토로 더욱 발전해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다방면에서 고객들을 최우선 하는 기업이 될 것을 약속드리며, 임직원 여러분의 복지 역시 항상 최고 수준을 유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바쁘게 셔터를 누르던 기자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네, 질문하세요.”
“감사합니다. 스카이 그룹의 기업 로고가 몇 달 전, 익명의 독지가가 사용하던 표식과 똑같은데요, 정말 스카이 그룹이 기부를 한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보육원, 복지관 등, 각종 구제시설의 기금이 말라 갈 것을 우려해 ‘기부’를 택했습니다.”
“아아, 정말 존경스러운 행동이셨습니다. 제가 그분들을 대신 할 순 없지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또 다른 기자가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세요.”
“여기 주신 자료를 보니, 인수하신 회사 중, 구조조정은 아주 소수에게만 이루어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최대한 본래의 직원들을 다시 고용하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오래된 기업일수록 ‘썩은 물’이 있을 수밖에 없어, 그 부분은 도려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기업이 흡수 통합, 인수 합병 등으로 구조조정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좌중을 둘러보다 말했다.
“언론에서, 또 어떤 전문가들이 얘기하는 바는 설득력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위기를 맞기까지 그 과정이 어찌 하나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복합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들을 해결함에 ‘구조조정’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내실을 다질 기간을 가질 것이고 불가피하게 실직자가 발생할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아아.”
기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그러나, 우리 스카이그룹은 이제 막 출발선에 선 만큼, 많은 실직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능력과 열정이 있는 인재들이 실직자가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사업확장과 더불어 대규모 인재채용을 계획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스카이 인베스트먼트는 내실을 다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인수합병과정에서 이미 내실 다지기는 시작되었습니다. 더욱 큰 성장을 위해 투자해야 할 때이며 인재가 곧, 우리 스카이 그룹의 성장 발판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 기자가 손을 들어 말했다.
“이번에는 이건 회장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분노에 잠식되어 있던 이건 회장이 빠르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카이그룹의 구조조정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기존에 문제를 처리하며 최소한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삼현 그룹은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내실을 다져야 하기에 구조조정은 불가피하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비정규직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종현이 불쑥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기자님들 다음 일정이 바빠 오늘 기자회견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비정규직.
그것은 여태껏 대한민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시기, 국가 경제가 IMF의 관리를 받게 되면서 정규직을 해고하고,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적게 발생하고 복지가 적어 비용이 저렴한 비정규직 전환을 권고한다.
말이 권고지, ‘비정규직 싫어? 그럼 그냥 백수 해.’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꼬집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연스럽게 이건의 비서실장 놈이 나서는 것이다.
적절한 타이밍이었는지 이건도 두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빠져나가는 이건에게 환한 웃음으로 보답했다.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이건은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자리를 벗어났다.
***
볼이 붓고 입가가 터진 비서실장 남종현과 전략기획실장 우희석은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앉아 있었다.
“스카이 인베스트먼트의 뒤에 천혁수 그 노친네가 있는걸 몰랐어? 그게 말이야 방구야!”
이건의 호통 소리에 남종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해외 몇 곳을 돌려 미국에 차려진 회사라 자세한 조사가 어려웠습니다··· 공권력을 동원해도 거의 불가한 일이었습니다.”
남종현에게 시선을 떼 우희석을 바라본 이건이 말했다.
“네 놈은, 네 놈이 계산한 5조 2천 300억. 이거 제대로 계산한 것 맞아?”
“예 회장님! 4년 안에 반드시 흑자 전환이 가능한 수치입니다!”
“네 놈 말대로 돼야 할 거야, 아니면 그 숫자놀이 하는 재능을 네놈 사지가 몇 개인지 헤아리는 데 쓰게 될 테니까.”
우희석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개를 거의 바닥에 처박을 듯 숙이며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4년도 길어! 3년 안에 무조건 흑자 전환 시켜, 공격적으로 진행해 공격적으로!”
“예!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건이 다시 호통쳤다.
“썩 꺼져!”
“예!”
우희석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이건의 집무실을 빠져나가고, 이건은 소파에 앉았다.
“재현이의 죽음에 천혁수 그 노친네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는 게 옳겠지?”
남종현이 무릎으로 걸어와 대답했다.
“···도대체 천혁수 회장의 의중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놈도 나가서 일 봐.”
“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남종현이 바깥으로 나가고.
이건은 위스키에 안주 삼아 담배를 태우며 전화를 들어 올렸다. 자신의 장남 이재영에게 전화하기 위함.
남종현과는 공유할 수 없는 얘기지만, 장남 이재영과는 달랐다.
“나다.”
-예, 아버지.
“재영이 네 경호가 어떻게 되고 있더냐?”
-상시경호로 4인씩 2개 조가 24시간 이뤄지고 있을 겁니다.
“인원 늘려.”
-예?
“아무래도 천혁수 그 노친네가 재현이를···”
-으음, 천우진과 우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아챈 겁니까?
“그래, 강영우 그놈 도망가지 못한 모양이다.”
-그 불같은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진즉에 사람을 썼을 텐데요?
허연 담배 연기를 연거푸 내뱉고 말을 잇는 이건.
“나도 그것을 모르겠구나. 늙어서 조심성이 많아진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눈치를 보는지, 또 아니면 제 손주 놈을 지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인지.”
-··· 천수혁 일까지 알고 있을까요?
“확답할 수 없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움직여야 해, 그러니 우선 몸조심하거라 돈이면 못할게 없는 세상이다. 아무리 우리라도 총알에는 장사 없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서 귀국해, 총기 소지가 자유롭지 않은 한국이 그나마 안전할 거다.”
-아버지도 몸조심 하십시오.
“오냐.”
전화를 끊은 이건.
분이 풀리지 않는지 손아귀에 힘을 주더니 결국 크리스털 잔이 쨍그랑 깨져버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이건가···”
***
언론은 연일 스카이 그룹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기, 정부와 언론 모두는 스카이그룹을 ‘희망’으로 사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스카이그룹의 명망은 높아지고 있었다.
“파하하하, 이건 그놈이 크게 한 방 맞았구나.”
신문을 들고 대소하는 할아버지.
그만큼 현재 통쾌함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제 돈으로 좋은 일 하고 기업 이미지가 올라가고 있으니 배알이 꼴리겠죠.”
“그래, 그럴 게다. 아랫사람들을 쥐잡듯 잡고 있겠구나.”
“당장이라도 뭔가 조치를 하고 싶겠지만 글쎄요, 정부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우리에게 악의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지, 지금 시국에는 불가능해.”
“예, 카이그룹을 인수하느라 무리했을 테니, 당장 주머니에 돈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장에 집중해야 할 시기고요. 할아버지는 은행 인수 순조롭죠?”
“그래, 새해도 밝았으니 박차를 가해야지 구정이 지나고 진행될 게다.”
신문지를 내려놓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이건 그놈이 완벽한 경계태세로 돌입할 게다. 빈집털이는 힘들게야.”
난 자신 있는 얼굴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면승부죠.”
“그래, 워낙 잘하고 있으니 별말 하지 않으마.”
“할아버지도 그렇고, 임직원들 경호를 좀 늘릴게요.”
“으음, 그래 그게 좋겠구나.”
감히 사람을 쓸까 싶지만, 음지에서 그 어떤 더럽고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는 종자들이다.
그러니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놈들도 할아버지의 사람들이 두려워 경호를 늘릴 터. 어느 정도 수준은 맞춰주는 것이 옳다.
“우진이 네 녀석 말처럼 새로운 정당이 정권을 잡았구나, 앞으로는 무엇이 흥 할 성싶으냐?”
“IT 계열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겁니다.”
“IT라···”
“전국 곳곳에 이제까지와 차원이 다른 인프라망이 설치 될 겁니다. 나아가 그것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갈 겁니다.”
“흐음, 대한 증권에 언질을 넣어 놔야겠구나.”
“하하 예, 그렇게 하세요. 당분간은 똥차도 금값으로 변할 시기가 올 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가 말했다.
“우진이 너도 우선 내실부터 제대로 다지거라, 사람이 곧 재산이라고 말한 건 네 녀석이니.”
“예, 그럼요 우선 지하경제부터 확실하게 처리하고 움직이겠습니다.”
“그래, 일 얘기는 그만하자꾸나, 요즘 네 녀석과 앉은 자리는 온통 일 얘기 뿐이라 피곤해.”
“알겠습니다. 아, 할아버지 혹시 타타다우의 김유중이 돈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주지 마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아버지.
“그놈 지금도 좋지 않으냐? 설마 타타다우도 위험한 거야?”
“미친 거죠, 두용을 인수했잖아요?”
“그러니 자금줄이 탄탄한 게 아니더냐?”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희대의 사기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놈은 이미 사재를 해외로 빼돌리고 있을 터.
“아뇨, 그놈 주머니 챙기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긴히 찾아뵙고 싶다며 난리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예, 조심해서 손해 볼 것 없습니다.”
“오냐.”
“서울은행이랑 제일은행 공개매각 되는 거 아시죠?”
“당연하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할아버지가 요사스러운 눈으로 날 보더니 물었다.
“우진이 네 녀석··· 타타다우를 삼키려고 하는구나?”
“와아, 할아버지는 돗자리 까셨어도 성공하셨겠어요.”
“이놈이 할애비를 놀려?”
정말이지 할아버지의 눈치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쩌면 할아버지도 내가 사람들의 몸에서 ‘연기’를 보는 것처럼 어떤 능력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다우라··· 다우··· 녀석, 일부로 삼현의 자금력을 말려버렸구나 더 덩치를 키우려고!”
완벽하게 내 계획을 파악하셨다.
이제 와 부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도대체 네 녀석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이냐?”
“글쎄요, 한 30년?”
픽 웃은 할아버지가 꽤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때도 할애비는 있느냐?”
“그럼요 건강하게 계실 겁니다. 증손자들 궁둥이 두들기시면서.”
“이놈이 또 아부하는구나.”
“그러니까 건강 좀 챙기세요, 특히 ‘치매’ 같은 것 조심하시고요.”
“아주 노망이 나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느냐?”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웃고 있는 철웅에게 말했다.
“삼촌이 할아버지 책임지세요?”
“예! 회장님.”
어느새 나는 회장이 되어 있었다.
“저는 나가볼게요. 할아버지, 이따 봬요.”
그러라는 손짓에 미련 없이 엉덩이를 떼었다.
< 제 4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