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43화 (43/458)

< 제 43화. >

연료 냄새가 찐하게 나는 배 위에서 문득 전 삶의 어떤 날이 떠올랐다.

휴가임에도 누구 하나 만나고 의지할 곳이 없던 나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내 집을 참 좋아했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좋았던 게 아니라, 좋았던 것이라고 자위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천애 고아로 살아 제법 성공한 억대 연봉을 받는 회사원이 되었지만, 마음의 풍요는 얻지 못했다.

나 스스로가 썩었고 찌들었다는 걸 알았고 차마 보육원에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못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쉬는 날이면 혼자 맥주를 마시며 보던 어떤 범죄 영화처럼 배 위에서 바다 한가운데에 드럼통 세 개가 떨어졌다.

풍덩.

“그 영화 제목이 신··· 뭐였던 것 같은데.”

혼자 중얼거리는 찰나.

“아따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마침 들려오는 구수한 사투리에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분명 작중 주연 역할의 배우가 저런 말투를 사용했었다.

“잉? 허따 웃을 정신도 있으시고잉···”

사람 셋이 드럼통 안에 시멘트로 생매장되는 광경을 보고도 태연한 내 모습에 김장원이 살짝 당황했다.

삼현의 개로써 살며 어찌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았겠는가? 이런 쪽에 이골이 났던 내 전 삶이 조금은 안타깝지만 어쨌든, 이 정도 일로 마음 약해질 정도로 난 무른 놈이 아니다.

“나머지 조무래기들은 검찰에 잘 포장해서 보내주세요.”

“예, 끝까지 핸들링해 오겄습니다.”

“그래요. 아! 김장원 사장.”

“예?”

“인재양성 질리죠?”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답하는 그.

“아따 티가 났습니까? 이렇게 대표님이 가끔 불러주시는 것 아니믄 영··· 그렇습니다.”

“그럼 계속 나랑 일합시다.”

“예?”

“백 실장도, 정 실장도 이제 양지로 올라갈 겁니다.”

요사스러운 표정으로 김장원이 눈을 번뜩이더니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했다.

“잉··· 지가 뭘 하믄 될까요?”

“우리가 다 양지에 올라가면 지하에도 사람 하나 있어야죠, 믿을 만한 사람.”

“흐흐, 아따 김장원이 출세해 부네요.”

***

현 시각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화두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는 단연 ‘외환위기’

둘째는 ‘대선’

셋째는 ‘카이그룹 인수전’

그리고 마지막 넷째는 ‘모피아 척결’이었다.

자수한 놈 중에 스스로를 ‘모피아’라 불렀기에 언론사에서는 자연스럽게 미래에 쓰이던 ‘모피아’란 단어를 뱉어내고 있었다.

환율 폭등, 연쇄 부도, 외환위기.

거기에 한보그룹 부도 연루까지. 게다가 이번에는 ‘모피아’사태까지 일어났으니 대통령의 이름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대통령의 지지율은 바닥을 기고 있었고, 다음 대통령은 누구인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대선은 어김없이 진행되었다.

12월 18일.

나도 할아버지도 투표소에 들러 투표를 했다.

“어떤 놈을 찍었더냐?”

“에이, 비밀투표 준수해야죠.”

피식 웃은 할아버지가 물었다.

“어느 놈이 될 것 같더냐?”

솔직히 말을 뱉기가 조금 조심스러웠다.

알고 있는데, 이번 삶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이니 꽤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삼현이 유보금을 확보한 것도, 전 삶엔 없었던 할아버지의 대한종합금융 그룹이 생긴 것도.

꿈도 꿀 수 없었던 모피아 척결까지.

과연 이번에도 내가 알던 대통령이 당선될까? 그런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누가 되는지 중요한가요?”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다면 중요하지 않지.”

두루뭉술한 할아버지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득 적절한 영화 속 대사 하나가 떠올랐다.

“추억은 가슴에 묻고, 지나간 버스는 미련을 버려야죠.”

“하, 시 같은 말이구나. 이미 가장 가능성 있는 두 놈에게 연줄이 없으니 늦었다?”

“네, 혹시 따로 줄을 대셨나요?”

“나는 정치하는 놈들이랑 짝짜꿍 하는 거 싫어해, 지금 대통령한테 준 돈도 아까워 죽겠구나.”

“그럼 됐네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놈, 어쩐지 누가 될지 아는 것 같구나?”

“하하, 뭐 가볍게 생각하면 여당이 지겠죠? 막바지에 어마어마한 똥을 싸버렸으니까요.”

“흠 글쎄다, 비등비등해서.”

“오, 내기하실래요?”

“크음.”

내기라는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셨다.

지는 장사를 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다.

“사채시장 말이에요 할아버지.”

“그건 또 왜.”

“김장원 사장 한가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놈아, 박무성이 만만한 놈 아니다. 지금 우리가 손땐 상황에서도 잘 굴러가고 있잖으냐?”

확실히 지금 지하세계는 잘 돌아가고 있다. 겉으로는 내가 관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박무성이 도맡아 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내게 보고도 올리고.

“에이, 김장원 사장보고 다 먹으라고 하겠어요? 박무성 사장이 꼭대기 앉고, 그 옆에 김장원 사장이 감사라는 직책으로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쯧, 두 놈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 줘. 너무 한 쪽만 얼러주면 탈이 난다.”

이쪽 시장은 나보다 할아버지가 훨씬 식견이 넓을 테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김장원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적어도 신의는 아는 놈이니 뭐, 나쁠 건 없겠구나.”

“능력을 입증하는 건 다른 얘기란 말씀이시죠?”

“그래, 믿을 만 하다고 능력까지 좋다는 얘기는 아니니··· 그놈이 어디 사채시장을 얼마나 장악할지 보자.”

“하하, 예.”

“나라가 흉흉하니 시끄럽게 처리하지 말라는 경고 정도는 해주 거라, 피가 흩날리면 민심이 서글퍼.”

“알겠습니다.”

사채시장은 이제 내 것이니, 뜻대로 해보란 말씀이셨다. 다만, 그들을 컨트롤하는 게 쉽지는 않으니 너무 꽉 쥐지 말란 경고도 함께였다.

***

TV에서 송출되는 화면에 이건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쯧, 보수가 졌군. 피곤하게 되겠어.”

남종현이 슬그머니 위스키를 따라 내밀며 말했다.

“저쪽에도 약을 치셨으니, 문제야 있겠습니까?”

“있지··· 적어도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전략기획실장한테 전해, 우리 삼현도 카이그룹 부채를 최선을 다해 갚겠다고 언론플레이하라고.”

“예!”

“쯧쯧 쓰지 않아도 될 돈이 또 나가겠어. 법정관리는 문제없이 진행될 테지?”

“예, 이미 모든 절차는 끝났습니다.”

“좋아.”

대선이 끝나고 언론과 여론의 관심은 카이그룹 인수전과 모피아 척결이 화두였다.

삼현과 스카이인베스트먼트.

두 회사 모두 굳이 법정관리를 택했기에 법정관리에 들어간 카이그룹.

언론은 연일 삼현과 스카이인베스트먼트에 대해 떠들었다. 두 회사가 카이그룹을 인수할 의사는 분명해 보였고 조건조차 비슷했다.

그러니 결국 제시하는 인수희망가로 결정될 것이란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례적인 속도로 열린 카이그룹 매각 절차.

“틀림없이 조사 한게야?”

이건의 질문에 전략기획실장 우희석이 작게 대답했다.

“예, 회장님 최대 가용 유보금을 동원하면 반드시 인수 할 수 있을 겁니다.”

“쯧, 어차피 저기 앉은 저 치들 다 우리 사람이야.”

우희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매각 절차를 확정할 인사들을 바라보았다.

경제부총리, 산업은행, 채권은행단, 채권단.

저들 모두가 삼현의 냄새 나는 돈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인수가가 같다면 삼현의 손을 들어줄 터.

하지만 이건은 못내 불안했다. 그것은 우희석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바로 스카이인베스트먼트의 자금력 때문이었다. 250억 달러가 넘는 자금력. 물론 현재는 조금 줄어든 자금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빠르게 흑자 도산 하는 튼실한 회사들을 집어삼키며 덩치를 불리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건은 카이그룹을 스카이인베스트먼트에 넘기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에 자신과 경쟁을 펼칠 정도로 덩치를 불리는 것은 막고 싶기 때문이었다.

삼현과 스카이인베스트 모두 인수 희망가를 제출하고, 결국 카이그룹은 5조 2천 300억에 삼현에게 매각되었다.

장내에 앉아있던 삼현 그룹 관계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며 환호했고, 이건에게 고개를 숙이며 하나의 목소리로 외쳤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한 건 해냈다는 뿌듯함이 엿보이는 얼굴의 이건.

장내의 소란은 한동안 지속되다가 끝났다. 이어서 마련된 기자회견자리.

이건 회장은 물론, 스카이인베스트의 인물들도 함께 자리했다.

기자들의 의견에 따라 찰리 박과 이건 회장의 악수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이건 회장님, 카이그룹의 부채에 대해 걱정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앞으로 새롭게 탄생할 카이그룹의 부채는 어떻게 갚아나가실 계획입니까?”

이건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부채를 일시 상환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탄탄한 그룹 내 이익을 최대한 투자하고, 현재의 적자를 흑자 전환 시킨 후 변제해 나갈 계획입니다.”

“몇 년을 보고 계십니까?”

“급변하는 시대에 정확하지 않은 예측은 피하고 싶습니다.”

사전에 어떤 언질이 있었는지, 기자들은 이건 회장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두루뭉술한 대답도 대답을 받은 것으로 치부하고 계속해서 ‘비전’을 얘기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언론이 이건 회장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찰리 박과 강기태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하하, 너무 저만 떠들었습니다. 여기 스카이인베스트먼트 쪽에도 질문들 하시지요? 어려운 시기에 한국 시장에 ‘달러’ 투자를 감행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건 회장의 말은 얼핏 스카이인베스트먼트를 챙기는 대인배적인 모습으로 비출지 모르겠으나, 실상은 ‘이제 이놈들 좀 때려라, 되도록 아프게’라는 속셈이 숨어 있는 말이었다.

“찰리 박 대표님, 안타깝게 도산하는 중소, 중견 기업들을 무차별적으로 인수합병을 진행한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날 선 질문이 날아들지만, 찰리 박은 여유롭게 답했다.

“맞습니다. 현재 한국 시장의 자금회전이 원활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도산에 이르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삼현 전자의 하청업체들이 그렇습니다.”

이건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일순간 표정을 바꾸고 여유롭게 말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금 사정이 안정되면 언제든 다시 우리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피식 웃은 찰리 박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가진바 기술력과 투명하게 운영되던 기업들을 인수합병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 시장에 하나의 그룹사를 설립하고 합니다.”

장내가 웅성거렸다.

25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이 한국 시장에 들어온다면 단숨에 재계서열 상위를 차지할 공룡이 탄생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룹화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의 주력 산업은 전자, 유통, 반도체, 문화산업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번 카이그룹 공개매각에 아쉽게 실패했지만, 나아가 자동차 시장에도 한 발을 걸칠 계획이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250억 달러를 모두 한국 시장에 투입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우리 SKY 그룹의 창립자를 모셔서 함께 듣는 것이 어떻습니까?”

웅성웅성

장내가 매우 소란스럽게 변했다.

짧게 얘기했지만, 찰리 박의 발언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파급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룹화’를 공식화했으며 심지어 창립자가 이 자리에 나온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기자들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이건 회장은 언짢아 보였다.

스포트라이트가 이상한 곳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뚜벅뚜벅.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고, 포마드 머리를 한 사내가 천천히 기자회견장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이건 회장의 볼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안녕하십니까, SKY 그룹의 창립자 천우진입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 앳된 모습에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천우진의 시선이 이건에게 닿았다.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천우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이건 회장의 모습이 한 기자의 카메라를 통해 영구히 저장되는 순간이자.

“저렇게 어린 사람이 그룹사의 오너라고?”

“그럼 스카이 인베스트먼트의 자산이 저 사람 돈이야?”

기자들은 물론, 세상이 놀랄만한 이슈였다.

< 제 43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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