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38화 (38/458)

< 제 38화. >

‘한국계 미국 투자회사 SKY investment 카이그룹 인수 긍정적인 검토, 한국 대규모 달러 자금 유입되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쥐고 있는 이건.

촤라락.

결국 바닥에 신문을 던져버리곤 남종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놈들이야?”

“월가에서 알음알음 이름을 날리고 있는 투자회사인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아직도 정보가 부족해?”

“죄송합니다··· 워낙 신생 회사이기도 하고, 한국 시장에는 진출한 적이 없어 정보가 부족합니다.”

“자금력은··· 놈들이 말한 것처럼 정말 250억 달러가 있는 거야?”

“예, 그건 확실합니다.”

드르륵.

서랍을 열어 고급담배케이스를 꺼내는 이건, 남종현은 얼른 가까이 다가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담배가 말이야, 오랜만에 입을 댔더니 다시 떼기가 참 어려워.”

“······”

“돈은 이것보다 더해, 차마 떼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 중독성이 어마어마하지. 후우~”

희뿌연 담배 연기와 이건이 담배 연기를 흡입하고 내뱉는 소리만 가득하던 집무실 내부.

치이익.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이건이 말했다.

“대현을 털어냈더니, 엄한 놈이 들어오는구나··· 헛돈을 쓰게 생겼어.”

본래는 한 푼도 쓰지 않을 작정이었던 이건.

그런데 때아닌 경쟁자의 등장에 인수가격 경쟁에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돈을 써야 할 판이었다.

적자 규모 6조가 훌쩍 넘고, 부채 규모 7조가 훌쩍 넘어가는 그룹의 인수는 그만큼 부담 가는 것이었다.

“약 쳐야 할 놈들 알아보고 보고해.”

“예, 회장님.”

“쯧, 대현 그 노인네 실실 웃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영, 그렇군. 오늘은 한잔하지.”

“예,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나가 봐.”

“예!”

***

하루도 되지 않아 나타난 CIA한국지부장윌리.

자신감 있는 얼굴을 보니, 내가 자신의 뜻을 따라줄 거란 확신이 있어 보였다.

여유로운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가시죠.”

기자들을 피해 조용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물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부도 꽤나 급했나 봅니다?”

“그런가 봅니다.”

“하하하, 귀찮으신 모양이에요?”

“이게 CIA가 할 일인지 의문이네요.”

그의 반응을 토대로, 분명 미국 정부와 어떤 연관이 되어있는 인물이 움직였음은 틀림이 없었다.

인물 개인이 아닌 단체일지도 모르겠다.

“카이그룹 인수는 연막입니까?”

“글쎄요.”

“이 정도는 대답해주셔도 되지 않나요?”

“그쪽은 어떻게 보십니까?”

호텔 복도를 걸으며 던진 내 질문에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그. 문 앞에 서서야 대답을 했다.

“완벽한 부실기업이었습니다. 자동차 시장은 규모의 경제효과가 큰 편인데, 카이그룹이라··· 굳이 적자와 부채를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는 게 우리들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끝내 가타부타 대답해주지 않으니,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여니 찰리 박과 강기태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오셨습니까 보스.”

대충 웃음으로 인사를 받고는 아침에 윌리와 들어갔던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윌리는 자연스럽게 총과 나이프를 정호석에게 건넸다.

“다른 무기 없습니다. 무전기도 없고.”

정호석이 날 바라보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철컥.

문이 닫히고 자리에 앉으며 말하는 윌리.

“운이 좋은 분 같습니다. 야전 요원들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인재를 얻으시다니.”

“그래요?”

“예.”

“정 실장이 들었다면 좋아했겠네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날 바라보는 그, 고개를 끄덕이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더니 말했다.

“IMF 자금 유입 이후에 미스터 첸의 회사가 한국 시장에 투자한다고 하면, 우리는 3번의 양보를 할 생각입니다.”

“먼저 투자 기회를 주겠다?”

“예.”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물었다.

“싫다면?”

윌리도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말한다.

“전쟁이죠.”

“전쟁이라, 육탄전입니까 아니면 자본전입니까.”

“무엇이든, 우릴 상대하기엔 아직 미스터 첸은 많이 부족합니다.”

사실이다.

고작 250억 달러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자그마치 미국의 CIA를 움직이는 놈들에게 육탄전 또한 상대하긴 어려울 터. 물론 대놓고 저격이라도 하겠냐 싶지만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그렇군요, 세 번의 양보라··· 무엇이든 입니까?”

윌리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세 번의 양보를 하겠습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서면 따위의 약속을 바라십니까?”

“그렇군요···”

어차피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 그런게 무슨 필요겠냐는 말이었다. 서류 가방에서 하나의 종이를 꺼내는 윌리. 테이블위로 스윽 내게 내민 그 서류를 살폈다.

‘친애하는 미스터 천, 나 체이스입니다.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천과의 약속은 반드시 이행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조건을 수락해주길 바랍니다.’

‘나 삭스도 마찬가지로 이름과 명예를 걸고 약속은 이행될 것이라 단언합니다. 우리는 동양의 젊은 천재인 당신과 아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싶으니, 부디 우리의 조건을 수락해주길 바랍니다.’

체이스와 삭스의 시그니쳐 인장이 찍혀있는 편지였다.

“이 정도면 신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윌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뢰는 된다 그러니 이제 물러나 줄 때가 된 것 같았다.

“좋습니다. 믿어보죠, IMF 자금투입 이전에, 내 자금이 한국 시장에 투자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미스터 첸을 믿겠습니다.”

“예. 약간의 언론플레이가 있을 겁니다. 투자할 것 같은 뉘앙스는 풍길 거니까요, 물론 실제 투자는 IMF 자금 투입 이후가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우리도 참작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서 정리하죠?”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는 윌리.

얼굴 가득 승리감에 젖어있는 모습이 퍽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손을 뻗어 윌리와 악수했다.

입꼬리를 씩 들어 올리며 말하는 윌리.

“프라이드에 상처 입지 마세요, 우리에게 세 번의 양보를 얻어낸 것도 대단한 업적입니다.”

내 모습이 그의 눈에는 ‘분노’를 삼키는 거로 비친 모양이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우리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도 않고, 오히려 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금 윌리의 머릿속 생각에는 큰 오해가 있었다.

나는 전혀 분해하거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의도하지 않게 커다란 이득이 날 반겨주는 것 같으니 어찌 기분이 나쁠 수 있을까?

이번 삶, 모든 일이 너무 술술 풀리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하늘이 날 돕는다고 봐도 되겠지.

한 껏 승자의 여유를 만끽한 윌리가 여유롭게 웃으며 방을 빠져나가고, 정호석이 들어와 물었다.

“얘기는 잘 되셨습니까?”

“예, 미끼 없는 낚싯바늘에도 물고기가 입질하는군요.”

피식 웃은 정호석이 말했다.

“월척입니까?”

“이 정도면 7짜 강성돔은 되는 것 같습니다.”

“하하, 축하드립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빈 잔에 차를 채웠다.

“삼현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음, 이건 회장의 저택에 채권은행단을 비롯해 의원 몇과 노조위원장이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먼저 그 사람들을 구워삶겠단 얘기네요.”

“예,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다 물었다.

“아, 삼현의 비자금 창고 위치 아직 가지고 있죠?”

“예. 박중구 실장이 알려준 위치정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주변에 사람 좀 붙이세요.”

“예, 알겠습니다.”

“찰리 박이랑 강기태 본부장 좀 불러주시겠어요?”

“예, 대표님.”

기분이 좋아서 그럴까? 아니면 미국에서 철수가 보내온 고급 원두가 좋아서 그럴까? 오늘따라 커피 향이 참 좋았다.

“그러고 보니 짜식, 잘 하고 있나 모르겠네.”

천가 키즈 1세대라 불러도 될 철수 놈이 과연, 세르게이와 래리의 천재적인 지식들을 잘 뽑아 먹고 있을지 궁금했다.

곧,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찰리 박과 강기태, 정호석이 둘러앉았다.

“예상 인수가 나왔습니까?”

내 질문에 찰리 박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

“얼마를 예상합니까?”

“삼현은 최대 4조 이상의 인수가를 부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호오, 그 애물단지에 4조나 투입할까요?”

“현재 삼현의 자금력으로 봤을 때 충분히 가능한 금액입니다.”

내 기억으론 대현이 7조가 넘는 부채를 탕감받는 조건으로 약 1조가 넘어가는 금액으로 카이 자동차를 인수했었다. 가장 훌륭한 M&A였다며 물고 빠는 경제학자들이 꽤 많았으니, 아마 후한 조건임에는 틀림없을 터.

지금 찰리 박의 입에 나온 4조라는 금액이 아마도 적정선의 금액일 게 분명했다.

“부채는 어떻게 할 거라고 예상합니까?”

“음, 대표님의 예상이 맞다면, 일부는 국가나 채권단이, 또 일부는 삼현이 처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보를 좀 흘리세요, 살살 낚으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5조를 생각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강기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대충 인터뷰 좀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최대 5조 원까지 고려 중이라는 식으로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재현의 죽음이 이건 그놈의 명치를 후두려 까는 일이 될 순 없다. 겨우 그 정도로 그 철의 가면을 깨트릴 순 없을 터.

장례식에서도 그 두꺼운 낯짝은 여전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다.

그건 그냥 ‘잽’이었다.

제대로 명존세를 날리기 위한 거리재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딱 그 정도다.

“삼현의 자금력이 얼마라고 했죠?”

찰리 박이 말했다.

“공식적인 유보금은 약 9조 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호오, 많이도 챙겨놨네요.”

“덕분에 하청업체가 줄도산을 잇고 있습니다.”

“하! 내년에는 반도체 팔 생각 없답니까?”

“다 노림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이 당시의 대기업이 그렇다.

하청업체 쥐어짜고 소비자의 뒤통수를 치고, 해외에 판매하는 제품에 비해 국내에 유통되는 제품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알지만 쉬쉬하는 이유.

자연스럽게 하청업체들은 원래 계약했던 것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양산해 공급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터지는 것은 비일비재하고 공공연한 사실.

이 시절은 정말, 기득권들은 눈치따윈 볼 생각도 없이 막무가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헐 값에 나온 하청업체들을 흡수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 부분도 철저하게 마킹하세요.”

“예, 보스.”

“그럼 두 분을 일 보세요.”

찰리 박과 강기태가 나가고.

“김장원 사장 뭐 하고 있습니까?”

“놀고 있습니다.”

정호석의 농담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뭐 하고 놀고 있습니까?”

“파주 훈련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천가 키즈’에게 너무 소홀했네요.”

“아닙니다. 아이들은 오늘도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조만간 한 번 둘러봐야겠네요.”

“예,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어쩐지 사단장 사열이라도 할 것처럼, 아이들에게 할 것 같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단장도 아니고, 산이라도 깎으라고 할 기세네요?”

“하하하, 아닙니다.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겠습니다.”

“그게 좋아요, 그나저나 김장원씨 좀 부르실래요? 일 좀 하게.”

묘하게 눈을 빛내는 정호석.

과연 이번엔 내가 무슨 일을 할까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별로 재미 없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여전히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오랜만에 만난 김장원은 살이 제법 붙어 있었다. 배부른 늑대와도 같달까?

“팔자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하하하, 갖난쟁이들이랑 어울리는디, 재미가 솔찮던디요?”

“적성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아따, 꼭 그란것은 아니고요잉, 고 자식들 똘망똘망한 눈까리를 보다보믄 워쩐지 제가 순수해지는 것 같달까, 뭐 그랍니다.”

“좋네요, 깨끗해지고.”

“뭐, 그렇죠잉··· 근디 다시 손이 더러버 질 것 같은 기분은 기분 탓일까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옳게 보셨습니다.”

“그라죠? 이번엔 어떤 일일까요?”

“손맛도 보고, 돈맛도 보는 일?”

“쪼까 자세하게 알려주시죠잉?”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홍길동전 아세요?”

“예~ 알죠.”

정호석이 ‘아아!’ 하더니 말했다.

“이건의 비자금 창고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라가 흉흉하고 백성이 굶고 있을 때, 의적이 나타나 탐관오리의 곳간을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죠.”

김장원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따, 우리가 활빈당이네요?”

“글쎄요, 먹어서 괜찮은 건 먹고, 탈날 건 뿌려야죠.”

“흐흐흐, 워따 심장이 막 방망이질 치는것이, 설렙니다잉?”

< 제 38화.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