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7화. >
대한민국은 세상이 발칵 뒤집히기라도 한 것 처럼.
양분된 여론으로 매일 시끄러웠다.
“경제 위기 아니라잖아?”
“대한금고 대표인가 하는 사람 얘기 못들었어? 정부와 언론들이 감추고 있다잖아? 내가 신문들을 뒤져보니까 확실히 경제 위기를 경고하는 기사들이 많았더라고.”
“거봐, 그거부터 그 천혁수? 그 사람 말이 틀렸다는게 증명되는 거라니까?”
“어째서 그게 증명이야?”
“이사람! 그 사람은 정부와 언론이 담합하기라도 해서 우리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고 주장했잖아?”
“뭐, 비슷하긴 했지.”
“그런데 이미 여러 신문들에서 경제위기를 경고하고 있었다며? 근데 그게 어떻게 우리를 속인거야?”
답답하다는 듯 막걸리를 비워낸 사내가 말했다.
“이 사람이! 경제 위기 아니다, 한국 문제 없다 이런 기사들은 신문 1면을 차지하는데, 경제위기 가능성이 높다! 이런식으로 얘기하는 기사들은 잘 보지도 않는 끄트머리에 작게 쓰여있단 말일세! 그리고, 지금 대기업들이 연쇄 부도를 일으키고 있는건 사실이잖나? 또! 대한금고 말고 어디 서민들 생각해서 대출을 내주는 은행들은 있고?”
“크음··· OECD가입한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경제위기는···”
“어허! 그런 것들도 다 허명이라니까?”
작은 대포집에 가득 울리는 두 남성의 목소리.
다른 사람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못내 그 둘의 대화에 집중하며 작게 ‘맞아맞아’, ‘정말일까?’하는 반응들을 보이며 혼란스러워 했다.
잠깐의 침묵이 싫었는지 두 사내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만삭의 임산부가 아이를 유괴해 끝내 살해했다는 이맛살을 찌푸리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쯧, 경제가 어려우니까 어? 돈을 목적으로 한 유괴들이 늘어나는 거 아니겠어? 사람들이 돈이 없다고 돈!”
“쯧쯧, 뉴스만 틀면 아주 유괴 얘기로 도배가 되니 TV가 보기가 싫어.”
“사람들이 참,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어린아이한테 몹쓸 짓까지 하고 싶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별 수 있겠는가? 세상이 문제지, 세상이.”
어느새 묵직한 내용의 대화가 튀어나오고, 대포집 안은 조용하게 변했다. 그들도 현 시국이 안타깝긴 매 한가지의 마음이었나보다.
“저게 뭐야?”
대포집 여 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TV소리를 키웠다.
-찰리 박 대표님! 254억 달러를 한국 시장에 투자하시겠다는게 사실입니까?
-스카이 인베스트먼트는 어떤 방식의 투자회사입니까? 한국기업의 인수합병도 고려하고 계십니까?
-강기태 투자총괄본부장님! 지금 한국시장에 외환위기가 닥쳐온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이크 앞에 선 남자 둘의 얼굴이 선명하게 뉴스에 흘러나오고, 그들의 얼굴 밑에 ‘스카이 인베스트먼트 254억달러 한국시장 투자 가능성 긍정적 검토 중’이라는 자막이 흘렀다.
“254억달러? 그게 얼마야?”
“지금 환율이 900원 초반이니까··· 아오 머리야 엄청 큰 돈이겠구만, 단순하게 천원으로 계산하면 25조인데 900원이니까 25조 아래겠지.”
“하, 얼마나 큰 돈인지 가늠도 되질 않네.”
막걸리를 시원하게 비워낸 중년이 말했다.
“거 보게! 대한민국이 경제위기라면 저렇게 달러를 들고와서 투자하는 놈이 있겠나? 경제위기 아니라니까?”
“우리 옆집도, 옆집의 옆집도, 윗집도 집을 내놨어 그런데 뭐? 경제위기가 아니야? 자네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가? 당장 여기 대포집도 봐봐, 이 시간이면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어야 되는데 세 테이블밖에 없어!”
“쯧, 아무래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으니 그렇겠지.”
“왜 허리띠를 졸라매겠는가? 하루가 멀다하고 자살소동이 일어나··· 자살 소동이! 세상이 참······”
***
찰리 박과 강기태가 언론사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하루가 멀다하고 힐튼 호텔의 로비는 소란스러웠다.
때아닌 활황에 힐튼호텔 관계자들이 자신들을 상전 받들 듯 서비스 질이 확 높아졌다는 강기태의 전화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 돈이 더 늘었구나?”
웃으며 답했다.
“예,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좋아서 그런가, 강기태 본부장이 일을 잘했네요.”
“확실히 우진이 네 회사가 언론에 나오니까, 내게 오던 전화들이 아주 딱 끊기는구나, 녀석 할애비 귀찮을까 그런게냐?”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저렇게 물어본다.
“예, 그렇죠 손자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농을 농으로 받으니 픽하고 웃은 할아버지가 아산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마당에서 고기나 구워먹지, 선선하니 초가을 바람이 참 좋아.”
“호호호~ 바로 준비할게요 어르신.”
고개를 돌려 다시 신문을 바라보며 말하는 할아버지.
“오늘은 적당히 먹자구나, 저번처럼 배 터지도록 말고.”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품에서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네, 여보세요.”
-미스터 첸?
영어였다.
분명 국제전화가 아니었는데, 통화 상대방은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도 영어가 흘러나왔다.
“누구시죠?”
-그때 한 번 뵈었었죠? CIA한국지부장 윌리입니다.
“아아, 기억나네요 미스터 윌리.”
-긴히 뵙고 싶은데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음, 저녁식사가 예정중이라서요.”
-늦은 밤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내일 오전으로 하죠.”
-······
이미 주도권은 나에게 있음을 한번 더 주지시켜주는 처사였다. 그것이 불쾌했을까? 윌리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미스터 첸.
“말씀하세요.”
-미국은 당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싶습니다.
윌리의 입에서 나온 것은 경고였다.
과연 CIA한국지부장인 만큼, 꽤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분명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은 먹어야죠?”
-후우··· 내일 오전 어디가 좋겠습니까?
“전화를 준 이유가 한국시장의 투자건 때문이죠?”
-······ 뭐, 대충 알고 계신 것 같으니 거짓은 필요없겠죠, 그렇습니다.
“그럼 힐튼호텔에서 정호석 실장을 찾으세요.”
-좋습니다. 한국시간으로 09시에 찾아 뵙죠.
“알겠습니다.”
어느새 신문을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었다. 품에 휴대폰을 갈무리하고.
“CIA지부장이라는 놈입니다.”
“그치가 너에게 왜?”
“아마도 한국시장에 달러가 유입되는 걸 막고 싶은 모양이네요.”
“으음··· 그렇구나.”
“예, 우선 식사나 하실까요?”
“그러자.”
잘 익은 스테이크를 썰며 물었다.
“대통령이 뭐라던가요 할아버지?”
식전주를 입에 머금고 있던 할아버지가 호로록 하고 향과 함께 음미하고 나서 말했다.
“곧 죽어도 제 무능을 들키기 싫었던 모양이다, 달러를 내놓으라 하더구나.”
“내 주면, 외환위기를 막아낼 방법은 있고요?”
“그놈들이? 퍽이나, 죽은 자식 부랄 만져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역시 할아버지였다.
현 시국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나랏일 하는 놈들이 외환위기를 막을 생각이 없어 보이니, 할아버지 달러를 국가가 가져간다 한들, 원화 방어에만 쓰일 뿐이었다. 고작 며칠의 기한을 늘리자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는 미친짓이나 마찬가지.
고기를 한입 가득 씹고 있는 내게 할아버지가 물었다.
“우진이 너는 어찌해 한국시장에 투자하겠다 하였느냐?”
“대통령이 솔깃해 할 만한 미끼를 던진거죠.”
“호오, 투자 하겠다고 말만 던졌다? 실제로는 아니고?”
“CIA도 입질을 하는데, 미국에게 고개숙이기 바쁜 윗놈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죠.”
“하! 그것도 그렇구나.”
“기득권과 붙어먹으려는 권력을 조금 흔들어 보려고합니다.”
할아버지가 식전주를 모조리 비우고 말했다.
“흐음, 지금의 외환위기 상황과 미국이 모종의 관계가 있는가보구나.”
“확신은 어렵지만, 아마 미국의 투기자본들이 아시아 시장에 들어와있을겁니다. 그리고 경제를 흔듦으로서 얻어가는 이득이 있을테고, 또 IMF와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확실치는 않지만 가능성은 있다?”
“예, 그러니 약 250억 달러의 제 돈이 반갑지 않을테죠.”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테이크를 썰더니 말했다.
“그래, 일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구나, 식사시간에는 식사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하하, 예.”
***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약속 했던 시간에서 단 1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 스위트룸의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었다.
이미 전화기 앞에 대기하고 있던 정호석이 전화를 받고 방을 빠져나갔다가 몇 분 되지 않아 다시 올라왔다.
“흐음, 저번보다는 훨씬 좋군요.”
“하하하, 우리 사무실이 너무 누추했나봅니다.”
“꼭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능글맞은 농담을 웃어넘기고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 문앞에서 막 문지방을 넘으려는 윌리를 저지하는 호석.
“몸 수색을 하겠습니다.”
윌리가 날 바라보았다.
마치 ‘이거 맞습니까?’하는 눈이었다.
“양해를 바랍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정호석, 윌리가 별수 없다는 듯 양팔을 들어올렸다. 꼼꼼하게 몸수색을 하니, 나이프 한자루와 권총 한자루가 나왔다.
“아, 저건 내 한 몸같은 것인데···”
“결혼생활도 오래되면 질리는 법이죠, 잠깐 떨어져 있는게 부부사이에도 좋습니다.”
내 농담에 피식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오고, 철컥 방문이 닫혔다.
“분위기 만큼은 칭찬드리고 싶습니다. CIA햇병아리 요원이었으면 크게 긴장했겠어요.”
자뭇 여유넘치는 표정을 보이는 윌리.
맞은편에 앉은 그가 말했다.
“담배 태워도 됩니까?”
“얼마든지요.”
칙, 칙.
“스읍, 후~ 미스터 첸, 뭐 대충 알고 있는것 같으니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우리는 첸의 자금이 IMF보다 먼저 투입되지 않길 바랍니다.”
“당신이 말하는 우리는 미국입니까, 월가입니까, 미국의 투기꾼들입니까?”
사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 삶 분명 IMF총재 캉드시와 함께 비밀리에 입국한 인물이 있었다. 미국 재무부의 인물이었던 그는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분명 미국이 모종의 이유로 아시아 시장 ‘장악’과 ‘관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했음은 분명하다.
아시아 경제위기를 이용해 수익을 올리는 것도 사실이고.
머리를 쓱 쓸어넘긴 윌리가 말했다.
“누군들 중요하겠습니까? 한국은 자본시장 개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급진적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죠.”
“당신의 250억달러가 공중분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얻어가는 이득이 클 수도 있겠죠.”
“우리와 척을 져 당신에게 이로울 게 있습니까?”
거짓말을 조금 보태, 한 호흡에 나와 윌리가 공방을 주고 받았다. 정말 빠르게 서로의 의중을 얘기했다.
여유롭게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우리’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알고싶지도 않습니다만, 최소한 맛깔나는 먹이 정도는 내 주어야 움직이는 것은 매 한가지가 아닐까 싶네요.”
“으음···”
“단순히 CIA한국지부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날 눌러보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돌아가세요, 내 시간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 보다 비쌉니다. 체이스와 삭스가 왜 굳이 이 좁아터진 땅덩어리에 왔었는지 생각해보세요.”
“······”
아무말 없이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그.
그런 그에게 말을 이었다.
“난 태국시장에서 더 큰돈을 벌 수도 있었습니다. 내 예측이 맞았다는 건 이미 증명되었고, 또 하나 예측하자면 이번 일로 미국에 어떤 집단이 얻어갈 돈은 1조달러가치가 넘을 겁니다. 내가 고작 250억달러에 만족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보라고 전하세요.”
내 말은 곧, 윌리가 결정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음을 이미 알고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마치 ‘상부에 보고해라’라는 뜻으로 들렸을테니 말이다. 어쩌면 윌리는 상부의 ‘예쁨’을 받고자 움직였을 수도 있다.
위쪽의 누군가와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다면, 우선 내게 그럴듯한 조건부터 가져왔어야 했다.
“크음···”
“애초에 척 질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당신들이 맛 좋은 보상을 던져야 내가 솔깃 할 거 아닙니까? 시간은 많이 못 드릴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한국정부와 기업들이 난리거든요, 어서 자신들에게 달러를 투자해달라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윌리가 담배를 비벼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담배 한 개피 필 시간동안의 짧은 대화가 오고갔지만, 그로서 뭔가 결정할 수 있는것이 아니었나보다.
“최대한 빠르게, 연락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망설임 없이 방을 벗어났다.
곧 정호석이 들어왔다.
“얘기는 잘 되었습니까? 저 사람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죠, 얻어간게 없으니까요.”
“흐음···”
“의도치 않게, 떡고물이 좀 떨어질 것 같네요.”
“예?”
“그런게 있습니다.”
난 IMF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대한민국 정부에게 조금이나마 뭔가를 얻어낼 요량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미국’의 ‘누군가’가 나타났으니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 제 3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