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6화. >
유명인들, 특히 정재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요정답게 고급차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는 주차장.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차버렸다.
과연 나라의 경제가 흔들리고 있는 중인데도 이 요정을 이용하는 사람은 많다는 것에서 오는 반응이었다.
“뭐가 마음에 안드느냐?”
“팔자 좋은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요.”
차를 휙 둘러보며 한 대답에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다르더냐?”
“뭐 같죠.”
“위선을 부리진 말자꾸나, 그것만큼 추한 것도 없으니.”
맞는 말이다.
나도 팔자 좋게 고급 요정에서 식사를 하면서, 누가 누굴 나무라겠는가.
“예.”
“그나저나 긴장은 안 되나 보구나. ”
“긴장할 게 뭐 있나요?”
“좋은 자신감이다.”
할아버지는 웃으며 성큼성큼 걸었고 나와 철웅, 호석이 그 뒤를 빠르게 따라붙었다. 우리의 걸음은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여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다시 한 번 느껴졌다.
“좀 늦었습니다.”
먼저 앉아 있는 대통령의 눈썹이 살짝 파르르 떨렸다. 그만큼 심기가 좋지 않음의 방증이리라.
“또 뵙습니다. 천우진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하고 앉으라는 말이 없지만 나와 할아버지는 앉았다. 왕도 아니고, 조선시대도 아니고 굳이 명을 듣고 앉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나가 있어.”
대통령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주변의 인물들에게 터져나온 축객령이었다. 철웅과 호석이 나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방 바깥으로 나갔다. 그 모습도 대통령의 눈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하, 정말 레임덕이라는게 무섭군.”
대통령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어째서 너는 나가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문.
“할아버지에게 일을 배우는 중이라 동석하겠습니다.”
“내가 불편한데도?”
대통령의 말에 할아버지가 불쑥 끼어들었다.
“형님, 어차피 저번에도 같이 있었잖소?”
“크음.”
“형님을 무시하려는 처사가 아니라, 내가 손주놈을 생각하는 마음이니 이해해주시오.”
“쯧, 어째 자네가 내게 명령을 하는 것 같으이.”
“오해요, 나 그렇게 막무가내 아닙니다.”
“크음···”
대통령이 잠시 보리차로 마른입을 가글하더니 말했다.
“기자회견··· 꼭 그랬어야 했나?”
“사실이잖소, 어째서 국민들에게 경제위기상황을 숨기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소.”
“네 놈이 정치라도 할 셈이야?”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치는 무슨, 나는 머리 아파 그런 것 못하오, 그냥 내 가진바 재주나 부리며 살리다.”
“헌데, 민심을 얻어 뭘 하겠다고?”
“민심이 천심이요, 대통령이라는 양반이 그걸 모르시오?”
“네 놈이 이제 날 가르치려 드는구나?”
“지는 해에게 머리를 숙일만큼 어리석지 않을 뿐이오.”
대통령이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혁수 네 놈이, 금융실명제의 복수를 이런식으로 하는구나.”
주전자에 담긴 술을 잔에 따르며 말하는 할아버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소, 내가 드린 용돈이 부족했소? 천억이면 형님 남은 평생 쓰다쓰다 모자랄 돈이오, 그런데 한보 놈들이랑 붙어먹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다른 놈들한테까지 빨대를 꽂으려고 하는거요?”
쾅!
“자네 말이 지나쳐! 붙어먹긴 뭘 붙어먹어?”
테이블을 치며 노성을 토해내는 대통령,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술로 목을 적시고는 말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소, 국민들이 바보로 보이요? 그들도 다 알고 있소, 그저 대통령이니 처벌받지 않겠거니 생각할 뿐. 어차피 이미 형님의 이름 석자는 더럽혀 졌다 이 말이오, 그래서 형님도 돈이나 벌어보자 하고, 경제인이라고 예쁘게 포장한 날강도 같은 놈들과 붙어먹는 거 아니오?”
“네 놈이 아주 끝까지 가겠다고 선전포고를 하는구나.”
“하하하하.”
크게 웃던 할아버지가 대통령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통령도 지지 않으려는 듯 붉게 변한 눈으로 할아버지를 마주보았다.
“기자회견 하는 순간, 이미 나는 형님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의 표적이 아니오?”
“그걸 알면서도 그랬다?”
“털고 싶으면 탈탈 털어보시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대한종합금융그룹을 차렸소.”
“네 놈이 내게 준 돈은? 그것도 깨끗하더냐?”
“무슨돈? 난 그런적 없소.”
“하!”
대통령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는다.
시종일관 주도권을 할아버지에게 있었다.
애초에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순간. 대통령은 주도권을 잃었다고 보는게 맞았다. 또한, 할아버지가 대통령에게 준 뇌물을 걸고 넘어지려면 자신의 자백이 필요할테니 오히려 곤란한 건 대통령이다. 과연 늙은 괴물이 자신의 얼굴에 똥칠 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절대 그럴리 없다는 생각일테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거 되도 않는 말장난 그만 합시다. 본론이나 말하시오, 피차 바쁜 사람들 아니오?”
할아버지의 말에 대통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졌더니 말했다.
“후아··· 그래, 네 놈을 털어봐야 제 살 깎아먹기지.”
드르륵.
노크도 없이 열린 문.
철웅이 다급하게 들어와 말했다.
“회장님.”
할아버지가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쳐다 보았다.
“회사에 검찰과 국세청이 들이닥쳤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곤 입꼬리를 씨익 들어올리며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하하하, 아직 이빨이 덜 빠졌다고, 한 두개쯤 남았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소?”
마치 가소롭다고 말하는 것 같은 할아버지.
대통령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협조 공문을 요청했어도 전부 다 내어드렸을 것을, 굳이 아이들을 보내고 그러셨소? 털면 무엇이 나올 것 같았소? 덕분에 자금줄이 묶였으니, 국민들이 참 좋아하겠소. 철웅아.”
“예! 회장님.”
“언론사에 기사 뿌리거라, 검찰과 국세청의 조사로, 당분간 대한종합금융그룹의 자금이 동결된다고, 당분간 새마음 새출발 대출이 이뤄지긴 힘들겠다고.”
난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런 멍청한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단순한 힘의 각인이 필요했을까? 만약 대통령이 과시를 위해 검찰과 국세청을 움직였다면, 난 내 눈앞에 대통령이 과연 노망이 난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무지 형님이 왜 이런 악수를 두는지 모르겠소, 독재시절도 아니고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 나라를 떡 주무르듯 주무를 수 있을것 같았소? 대한금고에 번호표가 모자랄 정도로 ‘대출’을 원하는 국민들이 쏟아지고 있소.”
“······”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오? 이런 와중에 검찰? 국세청? 하! 나라에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군, 여당이 이번 대선에서 이길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거요. 국민들의 원성은 누가 받으려고?”
탁!
술잔을 세게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철웅에게 말했다.
“철웅아, 검찰에 자진출두 의사 밝히거라 지금이라도 바로 가자꾸나.”
“예! 회장님.”
엉덩이를 일으키는 할아버지를 대통령이 붙잡았다.
“됐어! 자네 뜻은 알겠으니까 진정하시게.”
문지방 너머로 비서실장을 바라본 대통령, 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할아버지가 다시 방석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철웅은 눈치껏 방을 나섰다.
“하! 내가 구린내가 나는지 한 번 떠보고 싶었소?”
“쯧, 됐다니까··· 이제 그 얘기는 그만 하지.”
“예나 지금이나 하여간 그 마음대로 하는 성깔은 여전하시오.”
“어허, 이 사람. 내가 사과 함세, 불쾌했다면 미안해. 되었는가?”
“쯧.”
전혀 진심따위는 느껴지진 않지만, 할아버지도 더는 같은 말로 왈가왈부 하지 않았다.
“자네가 끌고 다니는 그 전문가라는 놈들 말일세.”
“예.”
“그 놈들 하는 얘기가 진짜인가? IMF를 안 가도 되겠어?”
“내가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니고 어찌 알겠소? 그거야 말로 나랏일 한다는 놈들이 할 일 아니오? 가령 재정경제원, 경제수석 같은 놈들이 말이오, 대관절 그 놈들은 하는일이 무엇이오?”
“IMF총재라는 놈도 우리 한국은 경제위기가 아니라고 했어, 일시적이라고 했다고.”
“제 놈들이 노리는게 있으니 기만하는 거 아니오? 정치하신다는 양반이 그걸 모를리도 없고.”
답답한지 대통령이 연거푸 술을 석잔이나 마셨다.
“눈과 귀가 막힌 느낌이야, 내가 키우던 개들이 내 개가 아니라 딴 주인을 따르고 있는 느낌이라고.”
“그걸 내게 하소연 해 뭘 얻겠다는 거요?”
“IMF로 가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나는 그게 궁금했어.”
“그걸 해결하라고 국민들이 형님을 그 자리에 앉힌거요, 왜 내게 묻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대통령.
나는 오히려 놀랐다.
어쩐지 지금 대통령이 진심으로 IMF를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 안에 침묵이 감돌고, 술 주전자가 하나 둘 비워졌다. 할아버지도 대통령도 한 동안 말없이 술만 마셨다.
그 사이, 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대통령이 IMF를 피하고 싶은 이유는 당연히 ‘이름 값’때문일터다.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오명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욕심일 터. 그건 이해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레임덕이라지만, 눈과 귀가 막힌 느낌이라는 얘기에서 난 새로운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IMF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지 않을 방법.
어째서 없겠는가, IMF가 아닌 다른곳에서 외화를 들여오고, 부실기업들을 해체 시키고 다시 봉합하는 단계를 거치면 된다. 물론 말처럼 쉬울리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가진 자금과 내가 가진 자금을 푼다면 기존의 외환위기급 타격은 없을터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도 그것을 원하진 않는다.
위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서민들에게 최소한의 대출로 잠시 이 시기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이다. 내가 아는 미래가 크게 비틀리는 것을 지양하고 싶었다.
내 원대한 계획에 방해가 되니까.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대통령의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IMF에게 굽실 거리는 것이 싫은 거라면, 분명 흔들리고 혹할 만한 아주 좋은 미끼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먼저 일어나야될 것 같습니다.”
나를 보는 할아버지.
그 눈에 ‘녀석, 또 재미난 일을 꾸미는구나.’하는 의중이 느껴졌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통령에게 인사했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대통령을 뒤로 하고, 방 바깥으로 나가자 철웅과 호석이 날 바라보았다.
“백 실장님, 할아버지 잘 모셔주세요.”
“예, 도련님.”
“정 실장님은 저랑 같이 가죠.”
“예, 대표님.”
빠르게 요정을 벗어나 차량에 올랐다.
“우선 힐튼호텔로 가주세요, 찰리 박을 만나야겠습니다.”
“예, 연락 해 놓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예, 대표님.
“아, 본부장 요즘 심심했죠?”
-예? 나름 바빴습니다.
억울하다는 목소리의 강기태 투자총괄본부장.
“힐튼 호텔로 오세요, 나는 한 30분이면 도착하겠네요.”
-지금이요?
“예, 바로 오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
스위트룸 안에 담배연기가 희뿌옇게 올라오고 있었다. 강기태는 물론, 찰리 박도 입에서 담배를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보스 말씀은, 저와 여기 강기태 총괄본부장님이 같이 언론에 나서라는 말씀이시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현재 우리의 자금 보유 현황을 공개하고 대한민국에 투자 할 의사가 있음을 명백하게 밝히세요.”
찰리 박이 잠시 고민을 하다 말했다.
“제가 아는 대한민국은, 외국 자본을 상당히 경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한국 사람들은 같은 ‘한국인’을 더 신뢰하고 좋아했다.
“예, 그러니 두 분이 나서시는겁니다. 오늘부터 찰리 박은 스카이인베스트먼츠의 대표이사입니다.”
“저와 여기 강기태 본부장이 한국인이니 그나마 괜찮을거란 말씀이시군요?”
“달러가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된 국민들입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수백억 달러의 투자회사가 떡하니 등장하면 당연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여론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강기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정부와 기득권들이 움직이겠네요··· 제 놈들 밥그릇 지키려고.”
“그렇겠죠. 반응은 크게 두갈래로 갈라질겁니다. 어떻게든 우리 자본을 한국시장에 들여오고 싶은 놈들과 빼앗을 생각으로 가득찬 놈들.”
강기태와 찰리 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완벽하게 내 계획을 이해한 것 같으니 말을 이었다.
“236억 달러, 적은 돈 아닙니다. 당장 한국은행의 외환보유고를 압도 할 만큼은 될 겁니다.”
강기태가 담배를 비벼 끄고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아, 대표님.”
“예.”
“그, 우리가 가진 자본이 236억 달러가 아닙니다.”
“예?”
히죽 웃는 강기태가 말했다.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대한민국의 외환위기 상황을 맞이한다는 가정하에 투자하라고.”
“그랬죠.”
“그래서 제가 좀 불렸습니다.”
저 자신만만한 웃음에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얼만데요?”
“254억 달러쯤 될 것 같습니다.”
“그 사이 20억을 벌었어요?”
“예, 대표님 예측이 딱딱 맞아 떨어져서 뭐··· 거의 돈을 줍듯이 불렸습니다. 아 물론, 리스크가 적은 것들에만 투자해서 이익금이 그렇게 크지는 않네요.”
역시, 강기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맞았다.
찰리 박이 고개를 돌려 강기태를 대단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20억 달러가 어디 개 이름도 아니고, 그 정도면 충분히 칭찬을 받아도 될 성과기 때문이다.
“20억 달러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씀하시는 두분의 배포가 참, 하하.”
잠시 방안에 훈훈한 웃음이 흘렀다.
쫙!
크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자, 그럼 내일은 어렵겠고, 모래 바로 실행하죠 언론사는 내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예, 대표님.”
“예! 대표님.”
< 제 3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