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5화. >
전날.
이가 집성촌의 한 무덤에 이재현의 관이 묻히고, 며칠을 잠을 자지 않아 초췌한 몰골이 된 이건이 오랜만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재현의 무덤가에 털썩 주저 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 이건에게 그 누구도 말을 걸 수 없었다. 그 흉흉한 기운과 함께 서슬퍼런 눈빛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건의 주변엔 없었다.
“회장님··· 몸 상하십니다. 잠시 쉬시지요.”
남종현의 말에 허연 담배연기를 내뿜어내던 이건이 스륵 고개를 돌려 남종현을 바라보았다.
“뭐하는 놈들이냐?”
“··· 알아보고 있습니다.”
“내 아들들이더냐?”
“······”
“대관절 정말 내 아들들이 제 동생을 죽인것이야?”
남종현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서열 다툼, 후계 다툼따위에 삼현의 오너일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개입해선 안되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이었다.
“말해보거라, 네 생각을.”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무는 이건.
꼭 말해달란 느낌을 풍기지만 남종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이건의 곁을 지킨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지금 이건은 자신을 테스트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혀를 차며 담배를 태우던 이건이 중얼거렸다.
“쯧, 나를 닮은 건 재현이 이놈 하나뿐인 줄 알았더니··· 내 핏줄은 내 핏줄인 모양이야, 아주 독한놈이 숨어 있구나 막내를 삼킨 놈이 누굴까, 재영이? 재형이?”
남종현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사람이 어찌 생각이 없을 수 있는가.
생각하기에 사람이고, 사람이기에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데, 삼현의 ‘개’로 키워진 자신은 오너일가에 대한 ‘생각’을 품어서는 안되었다. 기계처럼 움직여야 하고, 어떻게 하면 삼현에 이로울까만 생각하도록 철저하게 교육받아왔다.
그러니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둘 다 아니다.’란 생각을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이건은 자신의 아들이 다른 사람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감히 신과 같은 삼현 일가의 핏줄에게 손을 뻗은 존재는 없어야 한다는 어떤 아집과 신념까지 비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자신의 핏줄을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들 밖에 없어야 한다는 편협한 생각이 가득할 터.
남종현이 조사한 모든 것을 보고 했지만, 이건은 결국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되었다. 어차피 버린 자식인 것을··· 대현의 노인네에게 전화 하거라 지금 당장 보자고. 먼저 내려가 잠깐 혼자 있을테니.”
“예!”
남종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이건이 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품에서 갈색의 새로운 담배를 두 개피 꺼내었다.
“이것이 그리 좋더냐?”
하나의 담배에 불을 붙여, 묘 귀퉁이에 손으로 흙을 파 꽂아주고, 자신도 같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읍···”
몇 모금 담배를 뻐끔거리던 이건이 말했다.
“확실히···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네 놈은 도대체 뭘 그렇게 잊고 싶었더냐? 이것은··· 입에도 대지 말아야 할 물건이었다.”
갈색의 담배를 바닥에 툭 떨어뜨려 비벼끄고는 이건이 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재현이 네가 마지막까지 아비를 위해 갔구나··· 그렇지? 이 아비가 더 쉽게 카이자동차를 삼키라고 큰 선물을 주고 갔어, 네 놈의 선물 내 잊지 않으마. 아마 재현이 네놈 꿈이 삼현이 만든 자동차를 타는 것이었지? 그렇잖아?”
혼자 무덤가에서 중얼거리는 이건에겐 어떤 광기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대현의 총수 정상영 회장은 몹시 불편했다.
꼴이 말이 아닌 이건회장을 보고 있자니 몹시 위태롭단 생각이 들었다.
“카이 자동차, 삼현이 가져야겠소.”
도대체 며칠을 쉬지 않았는지 모를 몰골로 쩍쩍 갈라지는 이건의 음성에 정상영은 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으로 말했다.
“이 회장, 우선 좀 쉬고 오시구려 사업 한다는 사람이 꼴이 이게 무엇이오?”
프스스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 소리를 흘린 이건에게는 언뜻 귀기마져 흐르는 것 같았다. 정상영의 측근들은 물론, 이건의 측근 남종현도 자리에 얼어붙어 긴장할 정도로 흉흉한 기세가 있었다.
“대마불사라 하더이다.”
이어진 이건의 말에 정상영이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타타다우의 노괴 김중우 회장이 입 버릇처럼 말하던 경영철학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국에도 그 말이 어울린다고 보시오?”
이건이 정상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정 회장께서 필요한 말이외다, 대마불사.”
정상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지금 이 회장이 나를 겁박하겠다 이거요? 도가 지나치군.”
붉어진 정상영의 얼굴.
대마불사.
큰 말은 죽지않고 반드시 살 길이 열린다는 뜻이었다. 이건은 지금 대현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대현이 위태롭게 변할 수도 있으니 살길을 찾아보란 뜻으로 들렸기에 정상영이 분노한 것이었다.
“카이가 대현에게 그리 맛깔난 먹잇감이오?”
“크음··· 가만히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들어올 보너스 같은 것이었소.”
“우리가 나타났잖소? 우리 삼현이 욕심을 낸다 하지 않습니까!”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자동차 일이란게 마냥 쉽게 볼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쾅!
테이블을 내려친 이건이 서슬퍼런 눈으로 말했다.
“아들을 잃었소.”
“으음.”
언뜻 광기까지 비치는 눈.
“삼현의 조건은 변함이 없소, 수락하지 않으면 전면전이오.”
완벽한 선전포고였다.
“아들을 잃은 일과 사업이 무슨 관계요?”
“아들이 자동차를 정말 좋아했소, 우리 삼현이 만든 자동차를 타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생각했다 이 말이오.”
명분.
이건 회장의 입에서 명분이 튀어나왔다. 정상영의 얼굴은 굳을 수 밖에 없었다. 억지도 이런 생억지가 없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는 이건의 마음 만큼은 확실하게 알아 들었기 때문이다.
“손을 떼지 않으면, 대현이 전면전을 수락한 걸로 이해하겠소.”
“이 회장, 왜 이렇게 무례한지 모르겠군!”
“분명히 말했소, 반도체로 벌어드린 돈을 모조리 투자해서라도 자동차를 가져오겠소.”
“하!”
“조의금이라 생각해주시오.”
이건이 강짜를 부리고 있다는 것은 장내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우리와 삼현이 싸워 서로에게 이득이 뭐가 있소?”
“나는 갖고 싶은 걸 가져야겠소.”
끝내 물러서지 않는 이건.
정상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그냥 물러날 수 없겠소.”
이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 번, 딱 세번의 양보를 하겠소.”
처음 두 번의 양보에서 한 번의 양보를 더 얻어낸 정상영.
“그 약속을 지켜야 할 거요.”
정상영이 손을 뻗었고 이건이 그 손을 마주잡았다.
대현과 삼현이 싸워 서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크지 않다. 오히려 둘에게 모두 손해였다.
재계서열 1,2,3위가 모두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니 서로 줄다리기를 해 봤자 피해만 볼 뿐이었다.
정상영이 아들을 잃었다는 이유로 강짜를 부리는 이건에게 양보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도 그것을 알고 이용하는 것이었다.
구태여 대현 입장에서도 피를 볼 필요가 없었다. 이건의 뜻이 확고하니 한 발 물러서 줄 뿐. 또한 정상영의 머릿속에는 ‘자동차 산업’이 만만치 않다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부채와 적자가 큰 카이자동차를 삼현이 너무 쉽게 보고있다는 생각이었다.
포기한 것이 있으면 얻을게 있어야 하는 법. 이건에게 세 번의 ‘양보’를 약속받았으니, 그로써 손해나는 거래는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다.
남종현은 가까스로 흔들리는 눈을 바로했다.
아들의 죽음마저 이용하는 이건이란 사람에게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
기자회견장에서 바로 힐튼호텔로 왔다.
내가 스위트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찰리 박의 팀원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안내했다.
털썩 소파에 앉으니 찰리 박이 말했다.
“어제 모종의 이유로 이건 회장과 정상영 회장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 만남 이후로, 카이그룹에 대한 대현의 조사가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기웃거리던 대현쪽 사람들이 사라졌다?”
“예, 그리고 삼현 쪽 사람들이 카이그룹의 본사를 거의 점령하듯 대놓고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입니다.”
결정되면 최대한 빠르게 상대가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로 속도전을 즐겨하는 이건이다.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고 봐야겠네요.”
“예.”
원래라면 삼현과 대현이 대립각을 세우고, 우리 스카이인베스트가 그 틈바구니에서 가격을 올릴 셈이었다. 카이그룹의 적자규모와 부채규모는 그렇게 매력적인 회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현그룹이 그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왔다고 하니, 이제 삼현이 마음놓고 도마위에 카이그룹을 올려놓은 뒤, 떡주무르듯 주무를 터.
“내일부터 세상이 시끄러울겁니다. 아니, 당장 오늘 밤부터 세상이 시끄러울거에요.”
찰리 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대한종합금융그룹의 천혁수 회장의 기자회견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먼저 좀 살펴봅시다.”
찰리 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께선 아직도 대한민국이 IMF로 가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난 웃으며 말했다.
“예.”
“어째서 그렇게 멍청한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거죠?”
“대책을 세우기 보다는 제 배를 불리는데 더 혈안이 되어 있거든요.”
“으음··· 부정부패가 그렇게까지 심각합니까?”
찰리 박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목적은 카이그룹이 아니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찰리 박.
“삼파전이 아니어도 상관 없습니다. 삼현과 우리, 둘의 싸움이라고 해도 우리의 포지션은 변함이 없어요.”
“예.”
“대현이 없는 것을 가정으로 다시 계획을 세워보세요, 어차피 삼현이 카이를 먹는다고 해도, 단기간에는 불가능할테니까, 대기업들은 지금 IMF에 가길 바라고 있을겁니다.”
***
다음날.
대한민국이 시끄러웠다.
돈을 내놓으라 울부짖던 사람들의 분노가 정부로 향했다. 할아버지가 내밀었던 서류가 사실이냐는 질문에 청와대 대변인은 ‘확인중’이라는 답변만 늘어놓고 있었다.
한국은행 측에서는 보고서의 진위여부를 묻자 담당자가 휴가중이라는 허무맹랑한 답변을 내 놓았다.
공식적인 대답은 피하는 중이었고 한국은 경제위기가 아니라던 IMF측에서도 총재가 부재중이라는 답변을 내 놓았다.
매시각 뉴스에서는 ‘외환위기’가능성에 대해서 떠들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전문가들은 각 언론사를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자신들의 분석 결과를 설파했다.
전화를 끊은 백철웅이 할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또 어디야?”
“재정경제원의 전화입니다.”
차를 홀짝이며 여유를 보이는 할아버지.
오늘만 벌써 백철웅의 전화가 울린게 20번째다.
“외화 보유량을 묻더냐?”
“예.”
“알 수 없다 얘기했고?”
“예.”
“하하, 놈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떨어졌구나, 이제서야 내게 전화를 하고.”
정부와 기득권에게 정면돌파를 선언했음에도 할아버지는 전혀 흔들림 없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내 질문에 할아버지가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무엇이?”
“저기 파란지붕이랑 국회의사당에서 할아버지를 좋게 보지 않을텐데요?”
“독재가 끝난지가 언제인데 그런것을 걱정하겠느냐?”
할아버지 다운 대답에 픽 하고 웃음이 세어나왔다.
“손자놈도 두려워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두려워해야겠더냐?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면 어디 사내라고 말 할 수 있더냐?”
맞는 말이다.
고작 구더기들일 뿐이다.
국민의 혈세를 빨아먹고 기생하는 구더기들.
“자본주의 세상이야, 오히려 정치한다는 놈들, 나랏일 한다는 놈들도 그걸 깨닫고 어떻게든 대기업에 기생해보려 안간힘을 부리는 중이지 않으냐?”
현 시국을 정확히 관통하는 말이었다.
그 사이 다시 전화를 받은 백철웅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걸음걸이로 할아버지에게 다가왔다.
“회장님.”
백철웅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던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냐, 이제야 늙은이가 전화를 한 모양이구나.”
백철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청와대입니다.”
“하하하, 그래야지 그래야지!”
어쩐지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그간의 울분이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7시, 자주 뵙던 요정에서 뵙기를 청했습니다.”
“그래 그 노인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내가 꼭 보고 싶구나.”
까드득.
할아버지가 이를 갈았다.
“자! 청와대에서 어떤 미끼를 던지나 어디 한 번 구경하러 가 보자.”
내게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가요?”
“그래, 우진이 너도 가자.”
“그러죠 뭐, 재미있겠네요.”
< 제 3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