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화. >
세상이 조금 시끄러워 지겠다 싶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몇개의 신문사에서 아주 소소하게 다룬 이재현의 죽음.
그도 그럴것이, 국가에서 관리하는 기관에서 ‘마약’을 과다복용 해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그 사실을 국민들이 알면 당연히 분노할 것이 뻔했고, 국가기관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질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삼현에서도 ‘이재현’을 지우고 싶어 하는 움직임을 보이니, 자연스럽게 그의 죽음은 비중없이 다뤄지게 되었다.
사찰에서 이루어진 이재현의 장례식장에 나와 할아버지가 방문했다. 알음알음 정재계인사들만 참석하는 나름 비공식적인 장례식이었다.
할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조문객을 받고 있는 이건에게 다가갔다.
“쯧, 약물중독이었다고?”
이건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에 굳이 사람 많은 곳에서 듣고 싶지 않은 얘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할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더 자극하는 것이고.
“예, 어린것이 많이 힘들었나봅니다. 그런 약물에 기댈정도로.”
“쯧쯧, 자식 앞세우는 애비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나도 그 마음 잘 아네.”
‘나도 누구 덕분에 자식을 앞세웠지.’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위로의 말을 가장한 뼈 있는 한 마디였다.
이건이 작게 이를 깨무는게 느껴졌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을 뿐, 어떤 말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이건이 그런 내 모습이 아니꼬왔는지 인자한 얼굴 뒤로 잔뜩 불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재현이가 처음 약에 손댈 때, 너도 같이 있었다지?”
“아~ 그날이요.”
“너는 왜 약을 하지 않았니?”
“글쎄요? 재현이 형이 주는 술에 너무 취했었나? 기억이 없네요.”
“기억이 없었다?”
“네, 눈 떠보니 경찰서던데요?”
“하!”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건.
거짓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고 싶은걸까? 곁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흐음, 지금 내 손주에게 ‘공범’프레임이라도 씌우고 싶은겐가? 아무리 상심이 크다지만 지나친 행동 같은데?”
주변을 쓱 훑어보던 이건이 주변을 의식해 아들을 잃은 아비의 표정으로 말했다.
“벗이란 나의 거울이 아니겠습니까?”
나와 이재현이 그 나물에 그밥이란 표현에 할아버지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말했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않겠나?”
할아버지의 돌려 말한 비꼼에 이건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죠,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죠.”
얼굴은 그대로지만 눈 만큼은 아니었다.
‘경멸’이 담긴 눈으로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본다. 사채업자 손자가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냐는 말이나 진배 없었다.
그 눈빛과 진의를 읽지 못했을 할아버지가 아니다.
“예쁘다 예쁘다 하면 비뚤어지는게지.”
까드득.
휙휙 주변을 훑어보는 이건, 마침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한다.
“아직도 내가 당신에게 돈을 빌리던 아버지 아들인 줄 아시는 모양입니다.”
할아버지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 허면? 자네 아버지가 세상에 없다 하여, 자네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게야?”
“아버지 그늘아래 있던 어린아이가 이제는 이 나라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네 놈이 기둥이 되었다?”
“말씀 가려하시지요.”
“파하하하하하.”
장례식장에 어울리지 않는 파안대소가, 할아버지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건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웃음을 멈춘 할아버지가 이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건도 지지 않고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쳐다보았다. 자연스럽게 키 차이 때문에 할아버지가 이건을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서로 말 없이 쳐다보기도 잠시, 할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영정사진 앞에 향을 하나 꽂고는 그대로 뒤 돌아섰다.
이건의 시선이 내게 옮겨졌다.
난 피식 웃으며 뒤돌아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굳이 이재현의 명복을 빌어줄 생각 따윈 없었다. 열이받았을, 자식을 잃은 고통을 느낄 이건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자.”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걸었다.
문득, 할아버지가 정말 크게 웃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할아버지.”
“오냐.”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셨어요?”
“하하하, 그게 궁금했더냐?”
“예, 진심으로 좋아하시던데요?”
“이건이 그 뱀 같은 놈이 항상 무게만 잡다 크게 흔들리더구나 그런데 어찌 재미가 없을 수 있느냐?”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도 나처럼 이건의 똥 씹은 얼굴을 보고 싶어 굳이 이곳에 발걸음을 하신 모양이다.
차량에 올라 할아버지가 말했다.
“뒤처리는 깔끔한게냐?”
할아버지의 말을 정호석이 받았다.
“예, 회장님.”
“그래, 호석이 네가 처리했으면 믿을 만 하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녀석, 독심을 품었구나.”
“단단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 돈 떼일 일은 없겠구나 그 정도 독심이면 무슨 짓을 못할까?”
사채업자였던 할아버지다운 말이었다.
“내일 바로 기자회견 하시죠?”
“그래야지, 사방에 날 물어뜯으려는 개들이 즐비하겠구나.”
“어차피 지금도 돈 내놓으라 강짜를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지만,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달러화도 만만치 않았다. 할아버지의 자금은 물론, 지하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하던 무수히 많은 자금들이 모두 달러로 변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이 손을 뻗고 있었다. 제발 좀 돈을 빌려달라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한 푼도 내어주고 계시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정치인들과 나랏일 하는 것들에게 그 소식이 들어가고 손을 뻗쳐 ‘대출’을 강제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치인과 행정부가 경제인들과 짝짜꿍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한국은행이 환율방어에 달러를 쏟아붓다 이제 넘칠 시깁니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에요.”
“오래도 기다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채 국가에게 기만당하고, 대기업에게 헌신하는 국민들이 알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다.
그래야 기득권이 눈치를 보느라 조심스럽게 움직일테고, 그 곳의 빈틈을 찔러야 할 것 같기 때문에. 또한, 이제 슬슬 스카이 인베스트먼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내일이 기대 되네요.”
“이놈! 할아버지가 욕받이로 나서는데 고작 기대밖에 안 되더냐?”
“에이, 내년부터 대한종합금융그룹의 위상은 어마어마하게 뛸걸요? ‘외환위기’를 정면으로 경고하는 유일한 금융회사인데요?”
“하! 신뢰도가 상승한다?”
“그렇죠, 게다가 서민들을 위한 대출까지 이미 실행중이니까, 아마 신규 예금계좌가 폭발적으로 증가할겁니다.”
“오냐, 어디 네 놈 뜻대로 되나 보자.”
문득 궁금함이 떠올랐다.
“아, 할아버지. 조의금은 얼마나 하셨죠?”
“네 놈은 얼마를 했느냐.”
나는 안 했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도 고개를 저었다.
***
세상에 모든 주목을 받아낼 것 처럼.
번쩍이는 플래시 세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편안한 걸음으로 단상위에 올라 선 할아버지.
불과 몇 달만에 할아버지의 위상은 달라졌다.
대한금고는 여태까지의 은행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주기에 그랬다. 여타의 은행들은 자금이 말라 대출을 내주긴 커녕, 기 대출 회수를 위해 온 힘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대한금고만이 ‘대출’을 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생활 안정 자금’이라는 명목이기에 목돈이나 사업자금을 빌려주진 않는다. 다른 은행들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신규 예금 개설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그게 다 ‘새마음 새출발 대출’덕분이었다.
다른 은행들은 몸을 사리는데 대한종금은 돈을 푼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금여유’가 있는 은행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심어졌다.
어제까지 총 500만명에게 약 2조 5천억원 가까이 대출을 해 준 상황이었다. 민생경제 살리기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은행이니 국민들의 신뢰도는 말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기자회견에서 할아버지의 입에 집중하지 않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천혁수입니다. 얼마 전, 대한금고 창립일 이후로 이렇게 또 여러분께 얼굴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국민여러분들께 충격으로 다가갈 수 있는 얘기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담담하게 내뱉는 말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까? 곳곳에서 긴장한 듯, 침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한민국은 현제, 커다란 경제위기에 직면한 상황입니다. 많은 언론을 비롯해 정부까지 곧 다가올 커다란 ‘외환위기’상황을 숨기고 있습니다.”
웅성웅성.
순식간에 기자회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저는 이 자리에서 국민들께 알립니다. 이미 많이 늦었겠지만 지금부터 어떠한 ‘어음 거래’도 안전 할 수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분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어음거래를 중지하고 현금거래를 적극추천드립니다. 방비하고 또 방비하십시오, 다가올 경제 위기에 대비하고 또 대비하여야 합니다. 단기외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설비증축 사업확장이란 명목하에 대기업들은 제2금융, 종금사에 돈을 빌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지난 1월 한보를 시작으로 공룡같은 대기업들이 우후죽순 쓰러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어디입니까? 종금사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타오를 것 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장내를 쭈욱 훑어보는 할아버지. 나와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기업에게 어음을 받고 돈을 빌려준 종금사들, 무리하게 외채를 들여온 종금사들! 기업은 무너지고 종금사는 빌려준 돈을 받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외채를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종금사들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엄청나게 시끄럽던 장내가 오히려 조용하게 변했다. 너무 충격적인 얘기였을까? 아니면 기자나 언론사들은 어느정도 예견하고 있던 일이었을까?
“모든 국민들께서 제 말을 믿기엔, 그간 보여드린 신뢰가 부족할 것이라 생각해, 이 서류를 준비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들어올린 서류는, 올 3월경 한국은행에서 만들어진 외환위기 가능성에대한 보고서였다. 비밀에 묻혀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던 보고서가 할아버지 손에 들려 있었다.
기자들이 바쁘게 셔터를 누른다.
“또한, 계속해서 한국의 경제위기를 제보하고 경고하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셨습니다. 왜 그들은 일자리를 잃었는가, 어째서 정부는 그들의 이야기를 묵살하는가! 그분들의 얘기도 함께 들어보시죠.”
말 그대로 폭탄이 투하되는 순간이었고, 과연 앞으로 정부와 IMF의 대처는 무엇일까 기대되는 순간.
“대표님.”
정호석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찰리 박의 전화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한 곳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받았습니다.”
-보스, 어째서인지 대현이 카이그룹을 포기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럴리가 없을텐데?”
-오늘 아침부터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으음, 우선 바로 가죠.”
-예.
탁!
폴더를 조금 세게 닫았다.
또 다른 변수가 등장했다.
“재밌네.”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니 자꾸만 변수들이 생긴다. 잔뜩 움츠려들어 구조조정만 하던 삼현이 돈을 모아 카이그룹을 먹으려고 들고, 이제 대현은 카이그룹을 포기하려 들고.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이 나타난다.
회귀한 이후, 내가 알던대로 착착 진행되던 미래의 일들에 좀 싱겁던 찰나, 오히려 변수도 반갑게 느껴졌다.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는 법 아니겠는가?
“확실히 재미있어.”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는 내게 정호석이 말했다.
“차량 준비됐습니다.”
“바로가죠.”
“예!”
슬쩍 단상위에 열변을 토해내는 교수들 뒤로 할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살짝 손을 흔들었고, 할아버지는 작게 손짓으로 ‘어서 가거라’한다.
망설임 없이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 제 3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