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32화 (32/458)

< 제 32화. >

대통령 성명문과 함께 IMF의 현 총재 캉드시의 발언이 화제가 되던 8월 15일.

대통령 성명문의 내용은 한국은 일시적 경제위기고 벗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 주였으며 IMF총재 캉드시는 ‘한국은 경제 위기 아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하며 경상수지 적자도 충분히 타파할 수 있다는 얘기가 주가 되었다.

촤락.

신문을 찢어버릴 듯 내려놓은 나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지랄이 풍년이구나.”

대통령은 강을 건넜다.

캉드시 이 놈은 미국과 사바사바를 하고 한국에 뭔가 빼 먹을게 없을까 하는 와중일터, 경제위기가 아닐 수가 없는 상황에 대처를 내놓긴 커녕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질 못하냐 이 망할 나라는··· 쯧.”

원래도 알고 있던 일이지만, 실제로 다시 확인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서민들을 어디까지 나락으로 빠트려야 정신을 차릴지 모르겠다. 원래 준비하고 있던 할아버지의 기자회견 날짜를 조금 더 앞으로 당겨도 되겠지 싶었다.

‘대통령 한국 경제위기 아냐’

‘IMF캉드시 총재 한국 문제 없다 발언’

보기 싫은 헤드라인에 신문을 스레기통에 처넣고 말했다.

“이재현 나왔어요?”

“예, 대표님 오전에 출소했습니다.”

긴장된 표정의 박중구.

싱글싱글 웃고 있는 김장원.

“박중구씨.”

“예, 대표님.”

“좀 아플 수 있거든요? 참으세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박중구씨한테 위험 될 일은 없을겁니다. 고통은 있어도 죽음은 없다는 얘기에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

“아따 대표님 저한테는 뭐 할말 없으십니까?”

김장원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골이 나신 분이랑 경험이 없는 분이랑 같나요.”

“워따 서운허네요, 나도 사람인디요.”

“하하하, 표정을 보니 걱정은 전혀 없으신 것 같은데요?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표정인데요?”

“흐흐, 사지로 들어가는디 워째 더 신나는지 몰겄네요잉.”

피식 웃으며 정호석을 쳐다보았다.

내가 할 질문을 예상했는지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현재 이재현의 위치는 강남의 한 빌딩인데, 빌딩 소유주가 후성그룹의 삼남 유영국입니다.”

불쑥 박중구가 말했다.

“아아, 거기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건양의 차남, 후성의 삼남 그리고 이재현이 그 놈까지 셋이 자주 모이던 곳입니다··· 연예인 지망생들이 자주 드나들죠.”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나와 비슷한지 김장원이 말했다.

“워따워따, 출소 하자마자 아주 지랄이 나부렀네요잉, 과외선생도 예쁜 여염집 처자 변호사로 얻더만 진짜 징글징글 한 놈이네.”

박중구가 김장원의 말을 거들었다.

“평생 고치지 못할 버릇이죠··· 게다가 다음달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니, 아마 한달간은 미친듯이 놀아댈겁니다.”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글쎄요, 그런일은 없을 겁니다. 오늘이 마지막일 예정이라.”

박중구도, 김장원도, 정호석도.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 지가 재미가 없을 수가 없죠잉.”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합시다.”

***

강남의 한 빌딩 지하 밀실.

“이 개새끼가 나를 감아?”

이재현이 이를 씹으며 뱉은 소리에 김장원이 말했다.

“도련님 오해십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도련님이 도리도리를 겁나 드시더니 저한테 더 기분이 좋은 약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셨잖습니까!”

되려 성을 내는 김장원.

바닥에 쓰러져 몸을 떨고 있는 박중구.

“제가 그럼 뭐한다고 외국에서 있지 박중구 비서실장 저 썩을넘을 잡아다가 이리 왔겄습니까? 오해십니다 오해! 박중구 저 씨벌놈이 허락을 해부러서 명령에 따른겁니다!”

김장원이 무릎을 꿇고 있다가 벌떡 일어서서 피떡이 된 박중구를 몇 차례 밟았다.

“이 개 잡놈새끼 뒤져! 뒤져!”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이재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삼현의 3비서실 선임비서가 다급하게 김장원을 말렸다.

“어허, 그만그만! 도련님 앞입니다!”

김장원이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재현이 의심의 눈초리로 김장원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내가 오늘 풀려난걸 알았냐?”

김장원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따 필리핀서 요 후레잡놈을 떡 하니 보는순간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도련님이 풀려나는 날, 나가 이놈을 델꼬 가믄 우리 도련님이 나를 다시 한 번 품어주실지도 모른다! 요로코롬 생각해부렀지요.”

“그래서.”

“제가 또, 요 약으로는 한가락 허지 않았습니까? 그랴서 마약병동에도 안테나가 솔찮이 많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 하다가 도련님이 광복절 특사로 나간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바로 밀항해부렀습니다. 도련님, 저 인자 진짜 개뿔 한 푼도 없는 그지새끼가 다 되어부렀습니다. 밀항에 전 재산을 다 쏟아부렀다 이말입니다.”

선임비서가 이재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확실히 저 두 놈의 출입국 기록은 없었습니다.”

“으음.”

“그리고 김장원 사장 무일푼인 것도 맞습니다. 천혁수 회장 쪽에서 모든 자산을 가져갔습니다.”

김장원이 무릎으로 기어와 이재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했다.

“도련님, 한번만 살려주십쇼, 나가 뭐한다고 사지까정 걸어 왔겄습니까? 인자 도련님 아니먼 저는 천혁수 그 노친네한티 뒤져불겁니다.”

밀실의 유일한 출입구가 열리며 등장한 어린 사내들.

“야 재현아 아직도냐?”

“재현아 뭐 개새끼들한테 손을 대고 그래? 그런건 아랫것들한테 맡기고 그냥 놀자.”

“그래 임마, 너 미국가는 날 얼마 안 남았잖냐?”

“아이씨, 나도 재현이 따라갈까? 미국가면 서양누나들이랑 놀 수 있잖아?”

“크크크큭, 넌 키 작아서 졸라 무시당할걸?”

김장원이 벌떡 일어나서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그 어린 사내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들!”

“뭐야 이 개새끼는, 뭔데 아는척이야?”

“하하하, 도련님들 담배 태우십니까?”

품에서 고급스러운 담배케이스를 꺼낸 김장원이 그들에게 갈색의 담배 하나씩을 건넸다.

“요거시 물 건너온 거신디, 기가맥혀 붑니다.”

뒤 퐁~

라이터에 불을 켜고, 어느새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그들에게 불을 붙여주는 김장원, 그 기가막힌 처세술에 이재현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선임비서가 이재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도련님, 회장님께서 당분간 자중하시길 강력하게 권하셨으니··· 피는 제가 알아서 묻히겠습니다.”

“확실하게 처리해라.”

“예, 믿어주십시오.”

이재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다. 네가 하지 말고, 어이 김 사장.”

담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던 김장원이 바로 뒤 돌아 무릎을 꿇면서 말했다.

“예! 도련님!

마치 어명을 받드는 신하같은 모습.

퍽 만족스러운지 씨익 웃으며 말을 잇는 이재현.

“네 충성심을 보여줘 봐.”

“예?”

이재현이 싸늘한 눈으로 박중구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김장원이 입술을 혀로 적시며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이내 비장한 표정을 하더니 박중구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이 갓나구 처리해불믄, 나으 앞에도 고속도로가 깔리겠지요?”

“너 하는거 봐서.”

“저는 암것도 모르겄고, 도련님만 믿고 갑니다.”

김장원이 축 늘어져있는 박중구를 반쯤 일으키더니, 그의 뒤에서 양 팔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기절 해 있던 박중구가 정신을 차렸는지, 발버둥치기 시작하고 김장원의 팔을 미친듯이 뜯어내려 하지만 끝내 김장원의 팔을 뿌리치지 못하고 눈을 뒤집어 까며 풀썩 자리에 쓰러졌다.

“허억, 허억, 허억. 씨벌···”

김장원이 팔을 풀고 광기어린 눈으로 이재현을 쳐다본다. 이재현은 눈짓으로 선임비서에게 명령했다.

선임비서가 박중구에게 다가가 코 위에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젓는다.

“워따··· 기분 뭣 같네요잉, 도련님 오늘은 저도 술 한 잔 사주십쇼.”

이재현이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사줘야지 우리 김사장이 이렇게 충성을 다하는데, 안 그러냐 얘들아?”

“오 대박, 나 눈앞에서 사람 뒤지는거 처음봤다.”

“와, 졸라 영화는 아무것도 아니네.”

이재현이 김장원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한다.

“김 사장, 나도 저거 줘봐 애새끼들 지들만 좋은거 물고 나한테는 권하지도 않네?”

“아따, 드려야죠잉.”

“후읍, 콜록콜록.”

기침하며 담배를 쳐다보는 이재현, 그리고 그런 그를 쳐다보며 말하는 어린 사내들.

“크크큭, 이 새끼 담배 처음피냐?”

“에이, 오랜만에 피는거겠지 빵에 있었잖냐.”

이재현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아니 새끼들아 이 담배 졸라 독한데?”

“크크큭, 됐고 빨리 올라가자 귀염둥이들이 우릴 기다린다. 오늘은 내가 삼촌한테 말해서 특히 에이스들로 뽑아왔다! 우리 재현이 감옥 탈출 기념!”

이재현이 김장원의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말했다.

“우리 김 사장 파트너도 있겠지?”

“흐흐, 원래 두당 세 명이었는데, 내가 특별히 한 명 양보한다.”

“오케이! 나도 좋은 담배 줬으니까 한 명 양보한다!”

이재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새끼들, 난 통크게 두명!”

김장원이 넙죽넙죽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아따 이 놈이 오늘 호강 제대로 해붑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밀실을 떠난 넷.

적막이 맴도는 어두운 밀실에서, 선임비서가 작게 말했다.

“후아··· 선배님 진짜 뒤탈 없는거죠?”

죽은척 하던 박중구가 스륵,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종석아.”

“예, 선배님.”

“선배님은 시발, 내가 아직도 삼현 사람이냐?”

“······”

“봤지? 이재현 그 새끼 우리 사람취급이나 하는 것 같냐? 우린 개야, 개. 삼현의 개새끼들 언제든 우리 같은 것들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널리고 널렸어.”

“으음···”

“너도 대충 알잖아? 그래서 도와준거 아냐?”

선임비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 애들때문에 그런거요, 그 어린것들 불쌍하잖소, 형만 건드리면 되지 왜 엄한 보육원을 건드리는지, 쯧.”

“걱정하지마라 내가 살아 있는 거 보면 모르냐? 아무일 없다. 이재현이 저 새끼 곧 죽을테니까.”

“예?”

“됐고, 조용해지면 우린 나간다.”

***

빌딩 앞.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오는 박중구와 이재현의 비서가 보였다. 정호석이 라이트를 깜빡이자 그들이 차로 다가왔다.

특별히 세단이 아닌 봉고차를 끌고 왔고, 개조된 차량 시트에 박중구가 몸을 파묻었다.

차량은 바로 움직여 한적한 곳에 다다랐다.

“고생했습니다.”

“아닙니다 대표님.”

고개를 돌려 선임비서란 사람을 쳐다봤다. 저 사람도 참 기구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저 얼굴도 잊기가 힘들다. 나와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 나보다는 한참 먼저 삼현가의 ‘개’가 된 사람. 월급의 대부분을 보육원에 후원하며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더 없이 착한 사람.

그러나 짐짓 모르는척, 그를 불렀다.

“이름이 김종석씨?”

“아, 예.”

“고생하셨습니다.”

“후우··· 뒤탈만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공터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호석의 부하들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저 둘을 따라가세요, 당분간 지낼 곳을 안내 해줄겁니다. 그리고 이거.”

품에서 메모지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바깥에서 지내기 어려울테니 준비한 계좌입니다.”

김종석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염치 없이 이런것까지··· 저희 보육원을 구해주신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종석 선배는 젊은시절 이렇게 순하고 선한 사람이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을 제끼고 비서실장이란 자리에 올랐었구나 싶어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전 삶, 김종석 선배가 퇴사한 이후 내게 몇번 찾아온 적이 있었다. ‘돈’때문이었다. 보육원을 위해 후원해줄 수 있냐며, 염치없이 부탁해 미안하다고 하던 사람.

“아뇨, 원래도 우리는 보육원과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을 많이 지원했습니다. 원래 하던 일이란 얘기에요. 목숨을 걸고 하신일에 어울리는 대가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받아두세요 그게 내 마음이 편합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받겠습니다.”

박중구가 김종석의 어깨를 두들겨주고 말했다.

“기회가 되면··· 제가 뭔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꼭 불러주십시오 대표님.”

믿을만한 사람이고, 능력도 나쁘지 않다.

어쨌든 대기업에 입사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사람이니 능력은 보장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번 삶에서까지 그를 이용하고 싶진 않았다. 보육원 설립 혹은, 평생 아이들에게 봉사하며 살고 싶어하는 그에게, 내가 갈 가시밭길을 굳이 함께하자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없어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예, 편안한 은퇴생활 하십시오.”

박중구와 김종석이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떠나고 정호석이 물었다.

“끝난겁니까 대표님?”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새삼스럽기는... 그럴 리가 있나요 이제 막 찌를 던졌는데.”

< 제 32화.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