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31화 (31/458)

< 제 31화. >

조간, 석간 할 것 없이 신문 1면에는 대한금고의 대출상품에 대한 기사가 도배되듯 뿌려졌다.

할아버지의 연설내용에 대한 칭찬도 많았으며 자연스럽게 대한금고와 우리집안의 이력까지 화제가 되었다.

몰랐는데, 일제의 막바지 나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의 자금까지 댄 이력이 있었고 일본의 순사를 ‘죽였다’는 것까지 밝혀지며 이미지는 더욱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대출 손님들 뿐 아니라, 불안한 경제상황에서 ‘예금’손님이 부쩍 증가했고 대한종금은 어느새 믿을만한 은행이 되어버렸다.

“할아버지 독립자금도 대셨어요?”

“쯧, 그거 몇 푼 된다고 난리들인지··· 내게 처음 ‘돈’이라는 무서운 놈을 알려준 사람에게 보답의 의미로 내가 버는 수입의 십분지 일을 매달 보냈지, 그 치가 알고보니 독립운동가더구나.”

“아아, 좋은일 하셨네요.”

“그게 이리 돌아오니, 헛살진 않은 것 같구나.”

“예 자랑스러운 일이죠.”

신문 1면에 나온 기사 중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순사를 진짜 죽이셨어요?”

할아버지가 신문을 내려놓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더니 어딘가 서글픈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손에 죽은 놈이 어디 순사뿐이겠더냐, 참 많은 피가 묻은 더러운손이지. 그시절의 우리 사람들 목숨은 파리목숨이었어··· 그 이후라고 달라졌느냐? 멍청한 윗 놈들의 정치 싸움에 나라가 반으로 갈렸지, 그러고도 모자라 젊은이들 씨를 말려버렸어.”

뭔가를 회상하는 듯, 회한에 젖은 눈.

“그땐 무엇이 그리 욕심이 났는지··· 쯧.”

나를 바라보더니 어느새 뿌듯한 눈을 하고 말했다.

“그래도 네 놈같은 손주를 봤으니 마냥 헛 살지는 않은 것 같구나.”

“에이, 갑자기 칭찬을 하고 그러셔요?”

“하하하, 네 놈 나이에 50조 부자라니 대단한 일 아니더냐?”

“아직 50조는 조금 안돼요.”

“단순산술적 가치가 50조지, 실제 가치는 그보다 더 하지 않으냐?”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말이 맞다.

단순 환율로 계산했을때 올 해 말이면 내가 가진 달러의 가치는 약 47조. 그러나 원화를 아무리 준다고 해도 살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가치는 판단하기 나름이다.

“이상하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하세요?”

“우진이 네 말처럼 우리 경제가 심각한 상황이라면,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내게 손을 내밀어야 정상인데··· 어째서인지 나랏일 하는 놈들에게 별 연락이 없구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아마 당분간은 연락이 없을겁니다.”

“어째서 그렇더냐?”

“국민들 혈세를 월급으로 받는 것들이, 국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기업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거든요.”

“으음.”

“서민은 더 서민이 되고, 건실한 중소기업들이 썰물처럼 무너질겁니다. 그리고 그 중 맛있는 반찬들은 대기업들이 쇼핑을 하듯, 쓸어담아 갈 겁니다.”

“그렇겠지. 늘 그랬으니까.”

욕지거리가 올라오는 것 같은데 가까스로 참는 할아버지, 거친 숨을 몇 번 내뱉고서는 차분하게 말했다.

“정말 장사 한다는 놈들이 상도덕을 버렸어 쯧쯧, 아귀들이 따로 없지.”

“정치 한다는 놈들도 마찬가지고, 나랏일 한다는 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제 목구멍 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아무리 처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는 놈들이죠. 그러니까 도려내고, 바꿔야지요.”

“네 손에도 많은 피가 묻겠구나.”

“더러운 피에 썩은내가 깊게 베겠죠.”

“할애비가 도울 건 없더냐?”

진심이 느껴지는 질문.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다는 진심이 느껴졌다.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말했다.

“아뇨, 제 힘으로 하겠습니다.”

“으음, 오래걸리겠구나.”

“제가 지배해야 할 세상이니까요.”

“손수 일구겠다라···”

“바쁠겁니다. 정말 바쁠거고 뭔가를 챙길 겨를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서민 경제를 살려라?”

“더러운 놈들을 쳐 낸 자리에, 다시 더러운 놈들이 앉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예, 깨끗하고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야겠죠.”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이 할애비는 돈 벌기는 글렀구나.”

“에이, 할아버지가요? 설마요.”

“오냐, 벌 만큼 벌었으니 말년에는 쓰는 재미를 알아보자, 얼마나 재미있는지.”

돈 벌긴 틀렸다는 할아버지 말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내가 알던 ‘천혁수 회장’이 내 할아버지가 맞다면, 절대 그럴리 없었다.

뭔가 대단한 ‘캐시 카우’를 찾아 낼터.

그게 뭐가 될진 모르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건 그 뱀같은 놈은 어찌 되고 있더냐?”

“곧 있으면 뱀이 미끼를 물 겁니다. 지금 아주 맛 좋은 먹잇감이 눈 앞에 아른거릴테니까요.”

“카이그룹?”

“예, 정확히는 그룹의 모체, 카이자동차죠.”

“흐음 보고서를 보니, 부채 규모와 적자규모가 커 인수할 기업들이 있을까 모르겠구나.”

맞다.

분명 전 삶에서도 카이그룹 부도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사실상 부도’라는 말이 나돌았지만, 한 순간에 커다란 기업체를 무너뜨릴 순 없었다. 쏟아질 실직자 수가 어마어마했으니까.

어떤 기업도 굳이 카이자동차를 탐내지 않았다.

IMF는 대한민국의 많은 기업들의 자금줄을 말려버렸으니까. 또한, 대한민국 기업들이 어디 자기 주머니를 털어 사업을 하던가? 무능한 정부의 이상한 ‘경제살리기’정책이 알고보면 ‘대기업 어화둥둥’이다. 제 돈으로 사업하는 대기업이 없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많은 대출과 국민들의 혈세가 놈들에게 쓰인다.

실제로 대현그룹이 카이 자동차를 인수할 때, 부채 7조가 훌쩍 넘어가는 비용을 ‘나라’가 탕감해주었다. 나라가 돈이 어디있는가? 사업체도 아니고 당연히 그것은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었다.

“삼현은 지금 주머니가 꽤 든든합니다. 게다가 놈들은 ‘습관’을 버리지 못할 겁니다. 나랏돈이, 국민들의 혈세가 제 놈들 돈인 줄 착각하거든요.”

“지금 ‘총알’이 있는 놈들은 몇 없을테니 경쟁자는 얼마 되지 않겠구나.”

“예, 이번엔 놈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할아버지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 있느냐?’하고 묻는 것 같았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으실겁니다.”

“오냐, 해 보아라.”

“그래서 말인데요 할아버지.”

“으음, 어쩐지 귀찮아 질 것 같구나.”

듣지도 않고 정답을 맞추시는 할아버지.

나는 풉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론에 한 번 더 나오실 생각 있으세요? 우리 대한종합금융그룹의 명성을 쌓는데도 더 도움이 될겁니다.”

“흐음 그래?”

“예.”

***

언론의 현 시국에대한 평가는 여러갈래로 갈라진다. 어떤 언론은 경제위기는 일시적이란 얘기가 있고, 또 어떤 언론은 지금 심각한 위험단계에 있다는 얘기들이 있다.

물론, 잠깐의 경제위기라는 얘기들은 대부분 1면, 2면의 비중으로 다루고, 심각한 위험단계라는 기사들은 뒤로 밀려 아주 자그맣게 쓰여져 있었다.

나라가 경제 위기를 부정하고 있고,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었다. 많은 기업들이 연쇄부도를 일으키고 있는 현 시국에도 ‘어음 거래’는 펼쳐지고 있었다.

국민들은 빚잔치를 벌이느라 바쁘고, 정치인은 주머니 챙기려고 기업가들을 만나느라 바쁘고, 경제인은 더 덩치를 불릴 껀덕지가 없나 쇼핑하느라 바쁜 시국.

이건 회장이 고급요정에 등장했다.

“아이고, 이제 오셨습니까?”

이건을 반기는 인물은 대현그룹의 총수 정상영이었다.

“음? 내가 늦었나봅니다.”

“그럴 수 있죠, 들어오세요 입이 심심해 먼저 시켰습니다.”

“하하, 잘하셨습니다.”

한참을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며 술이 몇 순배 돌았다. 둘의 볼이 붉게 변할 때 쯤, 이건이 입을 열었다.

“카이자동차, 가져가실겁니까?”

정상영이 올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으음, 부채규모가 커서 힘들지 싶은데···”

“하하, 정 회장님 어차피 그 부채 정 회장님 주머니에서 나올 돈 아니잖습니까?”

“크흠.”

“카이자동차,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정상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명백한 적의가 느껴지는 눈이었다.

“이제 자동차도 넘볼 셈입니까?”

“반도체 가전 팔아서 얼마나 남겠습니까? 애초에 먹는 단가가 다르잖소.”

“자동차 이 놈이 참 컨트롤이 어려운 놈입디다, 노조들도 하루가 멀다하고 큰 소리를 내지요.”

“반도체라고 다릅니까? 제 놈들 병치레를 왜 내 탓을 하는지, 쯧쯧.”

“흠, 흠. 타타다우와 경쟁도 치열한데··· 삼현까지 한발을 걸치시겠다라, 흐음.”

이건이 술잔을 쾅, 내려놓고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대현이라고 ‘가전’이 없소? 아니면 ‘전자’가 없소?”

“크음.”

“지금은 내가 이기고 있지만, 사업이란게 한 순간 아니겠소? 지금 시국에 카이자동차를 가져갈만한 곳이 나와 정회장뿐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습디다.”

“흠, 이 얘기는 후에 다시 합시다.”

이건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우리끼리 싸워봐야 서로 피를 볼 뿐입니다. 이왕이면 짐은 덜고 가져와야 이득이 아니겠소? 서로 인수경쟁을 벌인다면··· 그것만큼 돈지랄이 따로 없지요. 카이자동차를 내준다고 확답한다면, 대현이 먼저 손을 뻗을 사업에서 최소한 2번, 양보하겠소.”

정상영이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는 이건이 뭔가를 양보할 인물이 아닌데, 양보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자동차를 원하고 있다는 것에 한 번, 카이자동차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에 또 한 번.

“우선, 잣대를 한 번 대봐야 알것같습니다. 이 회장 얘기는 잘 알아들었습니다.”

정상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상의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

“근 시일내에 또 볼날이 있겠습니다.”

“살펴가십시오, 나는 한 잔 더 걸치다 가야겠습니다.”

막 요정의 문을 열려고 하던 정상영이 뒤 돌아 이건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회장은 언제부터 경제위기를 예상하고 유보금을 늘렸습니까?”

이건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말했다.

“쥐 쫓다 꿀단지가 얻어 걸렸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상영.

이건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을 뿐, 더 말이 없었다.

정상영이 나가고 잠시, 남종현이 노크와 함께 들어왔다.

“회장님, 차 대기 시킬까요?”

이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 잔 하고 가지.”

“예.”

“대현이 움직일게다··· 노인네 눈깔을 보니, 욕심이 덕지덕지 붙었어, 이제 우리가 카이자동차를 탐낸다는 걸 알았으니, 뭔가를 내 놓으라 할테다.”

“전략기획실을 가동해, 정보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싹싹 긁어와. 지금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이 얼마인지도 알아보고, 재계서열 100위내에 있는 기업들 제무제표도 분석해, 다음에 쓰러질 놈들은 누군가, 그 알짜배기는 뭐가 있는가도 알아오고, 정상영 저 노인네 어지간한 미끼에는 꿈쩍도 안 할테니까.”

“예!”

“바깥에 아이들 좀 불러.”

이건의 말에 바로 문을 여는 남종현.

문 밖에서 대기중이었을까? 젊은 여인 몇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이건의 주변에 앉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건이 남종현을 바라보다 물었다.

“재현이 그 놈은 어떻게 되고 있어?”

“빠르면 올 광복절에 나올 수 있을겁니다.”

“그래, 종현이 네 일처리가 부쩍 마음에 드는구나.”

“감사합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라는 손짓에 남종현은 바깥으로 나갔다.

-아잉, 회장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혀를차며 주변의 경호원들에게 명령하는 남종현.

“애들 뒤로 물려, 10미터 내로 접근하지마.”

““예””

***

각 그룹들의 재무제표를 보고 있던 내게 정호석이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

그의 부름에 고개를 드니 그가 내 맞은편 찰리 박을 쳐다보고 있었다.

찰리 박이 정호석의 눈길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읏차, 보스 저는 시가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려는 그.

“태우면서 하셔도 됩니다.”

그에게 말하며 정호석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보고하기 시작했다. 찰리 박은 슬쩍 자리에 앉아 품에서 시가를 꺼냈다.

“이건이 정상영 회장을 만났습니다.”

“대현 총수요?”

“예. 대화내용까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도청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이 쉬울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굳이 도청하지 않아도 뭐 때문에 만났는지 예상이 되었다.

“이건 그 놈이 대현에게 무슨 약속을 했을까는 궁금하긴 하네요, 안테나를 대현에도 심어주세요.”

“예, 대표님.”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찰리 박. 그는 나와 정호석의 대화에는 일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철저하게 본인의 일에만 집중하고 클라이언트의 모든 비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다던 명성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고개를 돌려 정호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또 있나요?”

“삼현의 법무팀과 김&장의 만남이 잦습니다. 법조인들끼리의 만남이 잦고, 정치인 몇이 오가는 정황으로 보아, 이번 광복절에 이재현이 출소 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이었지만, 준비가 안 된 건 아니었다.

“김장원 사장에게 일 시작할 때 됐다고 준비하라고 얘기하세요.”

“예!”

“할아버지 기자회견은 잘 준비되고 있나요?”

“예, 문제없습니다.”

“좋네요, 알겠습니다.”

찰리 박에게 말했다.

“이제 찰리도 슬슬, 준비해야겠습니다. 기자회견 뒤에 바로 미팅해보세요.”

“예스, 마이 보스.”

< 제 31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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