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9화 (29/458)

< 제 29화. >

힐튼 호텔의 커피숍.

호석의 얼굴을 알아 봤는지, 앉아서 영문으로 된 신문을 읽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깡마른 몸에 각진 턱, 작은 안경까지.

동물로 비유하자면 그에게는 삵과 같은 느낌이 풍겼다. 중저음의 좋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

“반갑습니다. 찰리 박입니다.”

전 삶.

내 앞에 이 인물은 일명 ‘기업사냥꾼’으로 불리며 M&A계의 유명한 인물이 된다.

“반갑습니다. 천우진입니다.”

“아, 고용주께서는 이쪽이셨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럴 수 있죠.”

이 사람과 연락을 하기 위해 꽤 공을 들였다.

한국에서는 전혀 활동이 없는 ‘검은머리 외국인’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존재였지만, 굳이 큰 돈을 들여 스카우트를 제안했다.

커피숍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피차 바쁘시니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죠.”

“아시아 발, 혹은 멕시코 발이라고 표현할까요? 나는 이번 경제위기가 이곳 한국에도 상륙할거라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가 스윽 주변을 둘러본다.

“음, 고급 정보를 말씀하시긴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역시 주 무대인 미국에 적합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워낙 별의 별 M&A가 다 이루어지는 미국에서 왔기에 조심성이 대단했다.

희귀한 방식으로 매우 공격적인 M&A를 진행하는 미국이다. 자연스럽게 도청이나 쁘락치, 스파이와 같은 방식은 흔하다면 흔했다.

내가 손을 들자, 우리 주변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리 박의 얼굴에 일순간 놀라움이 떠 오르다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준비가 철저하신 고용주님이군요, 과연 제가 능력을 발휘할 건수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의 말에 웃으며 손을 내렸다.

스륵, 스륵. 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주변의 인물들이 하나라도 된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호석에게 눈짓을 주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서류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스윽,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찰리 박이 흥미진진하단 표정으로 서류를 들었다.

샤락, 샤락.

누가 보면 무슨 사진이라도 찾는 것 처럼 빠르게 서류를 넘기는 찰리 박. 대충 살피고 있다고 오해한다 해도 이해 될 속도였다.

탁.

약 5분만에 두꺼운 서류철을 내려놓은 찰리 박이 내게 물었다.

“공격대상입니까?”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격 할 필요나 있습니까? 이미 무너진 기업을요.”

고개를 끄덕이는 찰리 박.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커피잔을 들어올려 한모금 마시더니 다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커피잔을 내려 놓는다.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모습.

“그렇죠, 혹시나 해서 여쭸습니다. 그냥 적절한 액수만 제시하면 넘어올 기업이었습니다.”

난 손가락으로 툭툭, 서류철을 두드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근데 난 이걸 이용해서 더 큰 물고기를 잡고 싶네요.”

내 의중을 눈치 챘을까?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면 허연 이를 드러내는 찰리 박.

“아, 재미없을까봐 걱정했는데 갑자기 흥미진진하군요?”

말을 하면서도 내려놓았던 서류를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맞추고 자신과 정확히 평행하게 각도를 유지하려는 일종의 강박이 보였다.

그런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모든것이 자신의 컨트롤에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비로소 만족하는 인물로 느껴졌다.

완벽주의자.

“효율을 극대화 시키시는게 전문이실텐데, 이번에는 좀 다를겁니다.”

입술을 핥으며 대답하는 그.

“무차별 폭격, 효율을 무시한 공격적 인수합병.”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하죠, 하겠습니다. 이거 한국에 온다길래 재미는 없고 짭짤한 수익이나 만지다 가겠거니 했는데 크게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팀은 다 꾸리셨죠?”

“그럼요, 호텔에서 대기중입니다.”

고개를 돌려 호석에게 말했다.

“찰리 박의 팀도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까 실장님이 모쪼록 잘 챙겨주세요.”

“예, 지금 여기 로비에 있는 친구들이 24시간 밀착 경호할겁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찰리 박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위장이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이정도 수준의 인원은 고급인력인데 이런 경호는 또 처음이군요.”

자신감이 뚝뚝 떨어지는 음성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국과 다르게 총기 사용은 없으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겁니다.”

“그렇죠, 한국은 총이없죠.”

대충 얘기는 끝난 것 같으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청하시는 모든 자료들은 여기 정실장님을 통해서 전달 될겁니다.”

찰리 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용주께서는 그림자처럼?”

굳이 대답은 필요없으니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호텔을 벗어났다. 빠르게 다가온 정호석이 차량의 문을 열어주고 난 차량에 올랐다.

“나비효과라···”

전 삶에선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론.

그러나 막상 회귀라는것을 하고 보니 확실히 무언가 일을 진행할때 ‘나비효과’라는 걸 염두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지금부터 몇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월, 내가 막 대학교 신입생이던 때.

할아버지도, 나도.

누군가에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성격상 지기를 싫어하니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다.

게다가, ‘이건’이라는 뱀과 같은 놈이 호시탐탐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테니 우리도 자연스럽게 이건이 그 놈에게 안테나를 세워 놓아야 했다.

“금융정책실장에 이어서 대외경제국장, 경제수석까지?”

할아버지의 말에 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 놈이 확실히 무슨 낌새를 차린 모양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예, 아마도 할아버지의 움직임에서 뭔가를 발견 한 모양이네요.”

“하여간 뱀 같은 놈 냄새 한 번 기가막히게 맡는구나.”

원래는 전 삶 이건 회장은 이 시기에 유보금을 늘릴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그는 차일피일 대금치루는 일을 멈추고 현금 보유량을 늘리고 있었다. 중소기업은 죽어가는데 ‘돈’이 없다는 핑계로 대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아주 악질중의 악질이다.

“하여간 이 놈은 옛날부터 상도덕이 없어. 쯧쯧.”

할아버지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우리 대한종금에 삼현건설 사장이란 놈이 와서는 어음을 디밀더구나,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사원급 인사를 붙여줬다.”

“큽.”

웃음이 터져나왔다.

엿을 먹이려 왔다가 도리어 고철만 홀라당 팔고 갔겠다 싶었다.

‘사장’이 왔는데 ‘사원’이 응대했다.

명백한 무시가 깔려있는 일이었다. ‘접대’의 기본을 배하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놈들이 원하는 건 달러죠?”

“그렇지, 나날이 솟구치는 환율에 감히 원화를 통째로 들고와도 내줄까 말까 한 판국에, 어음을 디밀어? 원화 어음을? 미친놈들.”

할아버지의 노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이 달러를 모은다? 그 이유는 분명 할아버지의 행보에 관련해 어떤 ‘이상’을 감지했을게 분명하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먹잇감의 정보를 찾는 뱀처럼.

“흐음··· 이건 그 놈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호오’하며 흥미롭단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이내 피식 웃으며 말을 뱉는다.

“어떻게 할 셈이더냐?”

“놈은 평생의 숙원처럼 생각하는 사업이 있습니다.”

“그래?”

“예. 그 사업을 좀 건드려봐야겠습니다.”

“놈의 욕심을 노리겠다?”

“그렇죠.”

흐뭇한 표정을 짓는 할아버지.

“녀석, 따로 조사를 많이 한 모양이구나.”

“그럼요, 철저하게 망가뜨려야하는데요.”

“그래, 그 뱀놈이 원하는 사업이 무엇이냐?”

“놈은 제조의 꽃을 ‘자동차’라고 생각합니다. 단가 자체가 제 놈이 팔던 것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니까요.”

“으음, 확실히 그렇겠구나.”

“1대 팔아도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죠, 매출규모나 시장경제에 미치는 규모나. 마침, 조만간 놈에게 좋은 먹잇감이 포착될겁니다.”

확실히 그럴테다.

전 삶에서는 보유자금이 없어 무리하게 손을 쓰지 못했을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려 달러를 모으고 있다고 하니, 놈은 자신 스스로의 ‘욕심’과 싸워야 할터, 하지만 과연 그 놈이 자신의 욕심을 이겨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 놈을 그 자리에 끌어올린 원동력은 그 놈의 욕심과 뱀심이니까.

“하하하, 그래 잘하고 있는 것 같으니 되었다. 어차피 나도 그놈 따위한테 신경쓸 겨를이 없구나,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삼미가 무너졌어, 삼미가.”

“달러 수급은 순조로운가요 할아버지?”

“오냐, 최대한 끌어당기고 있다. 지하에 묻혀있는 묵은 달러들도 싹 긁어 모으고 있어.”

“좋네요.”

“우진이 네 돈은 어떻더냐?”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비밀입니다.”

“하, 이 놈이 또 의뭉을 떠는구나 내가 내어준 3천만 달러는 어찌하고?”

“아주 요긴하게 썼습니다.”

“그 돈이 뱀놈을 사냥하는데 쓰이느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돈으로만 처리합니다.”

“호오, 끝내 이 할애비 손은 빌리지 않겠다?”

“최후의 최후가 아니라면, 굳이 그러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냐, 네놈 뜻이 그러하다면 나도 거들지 않으마.”

“예.”

편안한 얼굴의 전형적인 조손을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무엇이든 씹어삼킬 것 같은 표정으로 변한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얘기했다.

“그래도 놈의 숨은··· 내 것이었으면 좋겠구나.”

난 가볍게 얘기했다.

“예, 그건 양보해드려야죠, 저는 놈의 절망과 나락이면 충분합니다.”

“껄껄 오냐.”

끼이이익.

사이드 브레이크가 채워지는 소리에 회상에서 깨어났다. 도착한 곳은 스카이인베스트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 앞이었다.

철컥.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대표님!”

우렁찬 강기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붉게 상기된 얼굴의 강기태가 어서 앉으라는 듯 소파를 손짓한다.

피식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걸 보고는 강기태가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들을 챙기며 말했다.

“혜원씨 이제 부하직원들 생기겠다?”

“네에?”

“크큭, 그런게 있어, 아~ 우리 혜원씨가 타주는 커피가 제일인데 뭔가 아쉽네.”

“오오! 드디어 후배 리셉션의 등장?”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웃으며 자리에 앉은 강기태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흐음, 예상외로 반응이 가볍네요?”

질문에 크게 웃으며 답하는 그.

“하하하, 처음 투자때는 진짜 식겁했습니다만, 그래도 체이스랑 삭스를 봤는데 이정도 돈은 이제 놀랍지도 않더라고요? 뒷구멍으로 굴리는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그 둘이 직접 이 사무실에 왔다는게 워낙 충격적이었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확인했다.

약 236억달러가 적혀있는 서류.

“음? 예상보다 금액이 크네요?”

강기태가 씨익 웃으며 영문으로 된 서류를 하나 들어올리더니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우리의 파트너 천에게. 나와 삭스 우리둘은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선입견도 많았고, 조금은 무시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당신의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데 베팅하려 합니다. 천, 당신은 우리에게 ‘수수료’를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아!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한국시장에서 스카이 인베스트먼츠의 행보에 대하여 우리 JB모건과 골드만글러브는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합니다. 다음에는 미국에서 한 번 만나고 싶군요, 당신의 넓은 식견을 좋아할 영감들이 꽤 많답니다. 체이스가.”

강기태의 긴 영문 낭독이 끝나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흠, 발음이 좀 공부좀 하셔야겠습니다.”

“큽.”

“흡.”

김혜원과 정호석이 웃음을 참느라 애를쓴다.

236억 달러.

외환위기 당시 달러당 2천원까지 치솟는 환율로 계산해보면 약 47조에 달하는 금액이다.

“환율이 2천원까지 치솟을겁니다. 2천원이 있어도 못사는게 달러가 될거고요.”

강기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예, 외환위기요.”

“그렇죠.”

멀리서 듣고 있던 김혜원이 갑자기 질문했다.

“어? 그런데 236억 달러면 1달러당 2000원이 되면 얼마에요?”

“47조.”

대답을 해주니 김혜원과 정호석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헙.”

“컥.”

강기태를 빤히 쳐다았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하하, 워낙 현실성 없는 액수라 놀랍지도 않네요.”

“배포가 커지는건 좋은 일이죠, 본부장은 한국이 외환위기로 IMF에 간다는 전제하에 투자를 진행하세요.”

“옙!”

어느새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정호석에게 말했다.

“실장님, 김장원씨 어디있죠?”

“필리핀에 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이재현이 입원해있는 병원에 계속 감시 인원 붙어있죠?”

“예.”

“좋네요.”

그 놈을.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그 놈을, 고작 뽕쟁이로 만들었다고 끝내면 섭섭하다.

놈도, 이건도 아직 모른다.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라는 걸.

< 제 2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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