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7화. >
공룡들이 우수수 쓰러지던 7월의 중순.
대한민국의 재계서열 4위의 카이자동차를 모그룹으로 둔, 카이그룹의 부도가 알려지며 충격에 휩싸였을 때.
같은시각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바쁘게 돌아갔다.
“제기랄! 이제와서 바트화를 유동적으로 만들겠다고? 미친 것 아냐?”
와타나베 준지의 외침에 옆에 앉아있던 여자가 말했다.
“입 벌릴 시간에 빨리 대응부터 하라고!”
멀리서 한 흑인이 말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 변동제한폭 증가! 12%”
“시발!”
“개같은!”
“똥!”
욕설이 난무하는 골드만글러브 빌딩.
미친듯 마우스를 움직이고, 모니터에 들어갈 것 처럼 집중하고 있는 준지에게 한 사내가 다가왔다.
“헤이, 준즤.”
“아이씨, 바쁜데 뭐야?”
“보스의 호출이야.”
“뭐? 왜?”
“왜는, 너의 그 멍청한 대가리가 일을 똥같이 처리했기 때문이지, 같은 아시아인이라고 너를 붙여주었던 내 패착이야.”
와타나베 준지는 도무지 그의 상사가 뭐라고 하는건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래, 제기랄··· 너 뿐만 아니라 나까지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으니 쯧, 닥치고 따라와 그 가벼운 모가지를 지키고 싶다면.”
친구 같던 상사에게서 어색한 모습이 튀어나오니, 와타나베 준지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전형적인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모습.
노크소리와 함께 사장실에 들어간 준지는 날아오는 하얀 물체를 볼 수 있었다.
촤라라락.
“네 놈들이야? 이 똥 멍청이 새끼들! 네 놈들이 이 옵션을 받아들였어?”
준지의 상사 월슨이 말했다.
“보스! 당시엔 보스도 허락했던 일 아닙니까? 무려 수수료 0.7퍼센트를 인하해주는 조건까지 거셨잖아요?”
“네 놈들의 분석이 맞은 줄 알았지.”
“무책임한 말씀이십니다!”
보스의 시선은 준지에게 닿았다.
“저 놈이 떠들길 분명, 어린 애송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제야 와타나베 준지는 천우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린놈이 자신보다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었고, 휴지가 될 곳에 투자하는 꼴이 가관이라고 생각했었다.
“저새끼 잽스지?”
보스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준지의 상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잽스새끼들 코리안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얕잡아 본다더니, 쯧쯧 제기랄··· 일본인들 두뇌가 좋다는 편견에 너무 사로잡혔어.”
치욕스러운 상황에 준지가 얼굴을 붉히며 바닥을 쳐다보았다. 마침 떨어진 서류 하나에 시선이 닿는다.
골드만글러브에 입금된 천우진의 2억8천5백만달러가 100억달러에 근접해 있었다.
“월슨.”
“예, 보스.”
“저 새끼 책상 치워, 이제부터 우리회사에 ‘잽스’는 없어,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예.”
“보, 보스!”
쿵!
준지가 바닥 타일을 부술 기세로 무릎을 꿇었다.
“겨우 한 번의 실수입니다! 보스도 허락하신 사항이었잖아요?”
“미친, 네 놈의 보고를 믿은 내가 병신이야.”
“정확한 분석 아니었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골드만삭스의 대표 삭스.
“정신차려 멍청한 자식아,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결과로 말하는거야, 네 그 멍청한 분석이 틀렸다는 증거라고! 그러니까 당장 꺼져. 월슨!”
“예, 보스!”
“저 새끼 덕분에 꼴보기 싫은 영감들을 만나러가야 할 것 같으니까 24시간 대기하고 있어.”
“예···”
터벅터벅 회사를 나온 준지는 습관적으로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향하던 펍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 한국인은 태국의 망조를 발견했던 걸까? 자신을 비롯한 자신의 팀이 무능해서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을까? 분명 우려는 있지만 완벽하게 망할거라는 확신은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는 세상이었다.
복잡한 머릿속에 시각이 전달하는 정보가 입력되었다. 맞은편에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 처럼 똑같은 얼굴을 하고 걸어오는 사내의 이름을 부르는 준지.
“청리엔···”
고개를 든 JB모건의 청리엔이 준지를 바라보더니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너도?”
“야, 나도.”
한국인과 한국을 무시하던 둘은 사이좋게 실직자가 되었다.
***
7월 19일.
JB모간의 대표와 골드만글러브의 대표가 비밀리에 대한민국에 방문했다. 주한미군기지에서 그들의 방문을 맞이한 사람은 CIA한국지부장이었다.
“본사 위치는 찾았습니까?”
JB모간의 대표 체이스의 질문에 CIA한국지부장 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비밀도 아니고 버젓이 영업하고 있는데요.”
“제기랄, 위장 지부인 줄 알았는데 여기가 본사가 맞다니 지랄같군.”
캐딜락 SUV에 오른 셋, 체이스와 골드만글러브의 대표 삭스는 차창밖의 발달한 도심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한국이란 말이야?”
“놀랍군, 정말 고도의 성장을 했어.”
이윽고 명동 SKY인베스트 사무실에 도착한 셋.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고 사무실 내부로 들어가니 처참한 광경이 그들을 맞이 했다.
컴퓨터 3대, 책상 세개, 7인용 소파가 끝인 단출한 구성에 한 번,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여직원의 놀란 얼굴에 한 번.
체이스가 성난 얼굴로 CIA한국지부장 윌리에게 소리쳤다.
“여기가 스카이 인베스트먼트라고?”
“간판에도 써있잖소? 시발 무슨 하루만에 얼마나 대단한 정보를 바라는거야? 당신이 우리 월급주나?”
삭스가 둘을 말리고는 당황이 가득한 여직원에게 물었다.
“여기가 스카이인베스트먼트의 사무실이 맞습니까?”
여직원의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표정의 윌리가 나섰다. 서툰 한국어.
“스카이 인베스트먼트 사무실 맞아여?”
그제야 여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네! 맞아요! 한국말 잘하시네요!”
“초큼 할 줄 알아여, 대표님 만나고 싶어서 미국에서 와쒀효.”
“아! 본부장님 금방 오실거거든요? 잠깐 앉아 계세요.”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7인용 소파에 앉은 그들.
참담하던 표정이 어느새 어처구니 없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어이가 없군.”
“나도 마찬가지야.”
윌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 무거운 엉덩이를 여기까지 옮긴거요?”
“자네는 몰라도 돼.”
“아이, CIA가 무슨 당신들 하청업체도 아니고, 나도 알 건 알아야 할거 아닙니까? 내 엉덩이는 가벼운줄 알아요? 내가 뭐 가이드도 아니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윌리, 인상을 찌푸리는 체이스. 그런 둘을 삭스가 만류했다.
“체이스, 자네도 좀 진정해 어쨌든 우리를 도와주기위해 발걸음한 사람이라고, 윌리 지금 체스와 내가 컨디션이 별로라서 예민한 것 같으니 너무 기분나빠하지 말게.”
윌리가 ‘쯧’하고 혀를 차곤 고개를 끄덕이자 삭스가 말을 이었다.
“여기 대표가 나와 체이스의 회사에 옵션을 행사할게 있어, 그래서 왔고.”
“얼마나 큰 돈이기에 움직였습니까?”
“후우··· 알 수 없네.”
“뭐요?”
“지금은 약 210억달러정도인데··· 앞으로 더 커질수도 있어.”
입을 떡 벌리는 윌리.
셋이 쉴새없이 영어로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 여직원은 한시라도빨리 본부장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랬다.
여직원의 간절함이 느껴졌을까? 서둘러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한 남자. 그를 보고 소리지르듯 외치는 여직원.
“본부장님! 왜 이제오세요?”
거의 울기 직전인 그녀의 반응에도 스카이인베스트먼트의 투자총괄본부장 강기태의 시선은 서양인 셋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허억··· 체이스? 삭스?”
서양인 셋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
1학기 종강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방학이 찾아왔으니 기분좋아야 할 청춘들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 없다.
“쯧.”
절로 혀를 차게 되었다.
경색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연말, 그리고 내년에는 더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킬텐데 벌써부터 저리 표정들이 어두우니 어쩐지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누가 방아쇠를 당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방아쇠는 당겨졌고, 이제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찰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끝내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기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분명, 전 삶에서 1997년도 3월 말쯤에 한국은행에서 외환보유고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었다. 경제수석을 비롯한 각 관료들이 그 보고서를 보고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 했지만, 하루 이틀 시간만 흐를뿐 딱히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대한민국은 IMF에 돈을 빌리게 된다.
그래놓고 한다는 말은 ‘국민들이 사치를 부려서 외환보유고가 바닥났다. 모두 국민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서다’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내놓는다.
순진한 국민들은 ‘사치’를 줄이자고 얘기하며 ‘사치’를 부리는 사람들을 마치 ‘매국노’처럼 대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품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모로로라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대, 대표님··· 지금 사무실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요? 태국 시장에 뭐 이상이라도 생겼습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니고··· 체이스와 삭스가 찾아왔습니다.”
“예? 누구요?”
-JB모간의 체이스, 골드만글러브의 삭스요.
궁둥이 무겁기로 소문난 인간들이 한국까지 날아왔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최대 50배 짜리 베팅이었다. 그런데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인다고? 이해는 되지 않지만 우선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사무실 내부로 들어가자, 서양인 셋이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반갑습니다 JB모간···”
“골드만글러브···”
“CIA···”
인사를 대충 받고,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이미 저들이 이곳에 발걸음 한 순간,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는 방증. 그리고 그것에 쐐기를 박는 순간이었다.
딱히 불만스러운 표정들은 아니다.
“피차 바쁘실테니, 본론만 얘기할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체이스가 서류를 내밀자, 삭스도 서류를 내밀었다. 두 개의 회사에서 서류기준 날짜에 내게 줘야 할 돈은 총 211억 달러.
“지금도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입술을 잘게 깨물며 말한 체이스.
“그래서요?”
어쩌라는 반응을 보여주니 삭스가 말했다.
“고객님의 옵션은, 가변적으로 그 시기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입꼬리가 들려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맞다.
분명 JB모간과 골드만글러브와의 계약서를 살펴보면, 언제든 옵션행사 날짜를 바꿀 수 있었다.
그들이 이것에 동의 한 것은 태국의 망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내 돈이 탐났을 뿐.
“그래서요?”
알지만 물었다.
지금 저들은 똥쭐이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태국에 들어선 망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투기세력은 더욱 미친듯이 공격하고 있을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얼마전 태국이 결국 ‘고정환율’을 포기하고 유동적인 환율을 적용시켰기 때문이다.
“옵션을 행사해주십시오.”
저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돈을 가져가라는 얘기다.
어서 돈을 맡기라며 수수료까지 깎아주던 놈들이 이제와서 제발 돈을 가져가라고 사정하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앉아서 돈을 버는데, 굳이?”
두명의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필요 없이 저자세를 보이고 그래요? 비즈니스적으로 냉철하게 갑시다.”
무슨 말이냐는 듯 날 바라보는 둘.
“조건, 조건을 말해보란 얘깁니다. 미리 다 준비해 왔을거 아닙니까?”
거인 둘이 나를 찾아오는데 입맛을 다실 미끼를 준비해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말이되지 않는다. 과연 얼마나 구미가 당길 미끼를 준비했을지, 나는 둘의 입에 집중했다.
< 제 2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