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6화 (26/458)

< 제 26화. >

잠시 홀로 생각에 잠겨있다가 입을 여는 할아버지.

“말해 봐.”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내 눈을 읽었는지 미리 준비해온 것을 가져오는 호석. 두꺼운 서류뭉치 몇 개를 할아버지에게 건네고, 그걸 확인하는 할아버지.

“김화영 나이 32, 평범한 가정주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분식집 주방일을 시작함. 백윤기 나이 43, 이른 퇴직으로 건물 경비원일을 시작.”

서류를 읽던 할아버지가 다시 시선을 나에게 옮기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냐?”

“그게 대한민국의 현 주소고, 앞으로 더 악화될겁니다.”

“풀어서 말해.”

“경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가게 부채가 오르고 있다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그러니 할아버지의 주특기를 살리셔야죠?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 할아버지.

“돈을 굴려라?”

“예.”

“돈을 굴리는게 왜 명성을 쌓는 일이더냐?”

“당장 생계가 어려워지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게 될테죠. 그때, 우리가 돈을 빌려주는겁니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스륵 내려가고 기분나쁜 내색을 내비치며 말하는 할아버지.

“담보도 신용도 불안한 놈들에게 돈을 내주라는 얘기구나.”

“예.”

“종금사는 일반 시민들과 거래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내가 그걸 몰랐을까?

“그러니 이제, 은행을 만드셔야죠?”

“으음···”

아직은 상호저축은행법이 등장하지 않은 시점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 내 할아버지는 ‘저축은행’을 설립하지 못했다.

분명 할아버지는 ‘은행’을 설립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실터.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종금사, 종합금융회사라는 명칭에 걸맞게, 은행과 증권사도 가지고 있어야죠?”

“녀석, 지금 종합금융 ‘그룹’으로 만들라는 얘기구나.”

“예,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는 우리의 계획에 찬성표를 던져줄겁니다.”

“글쎄··· 은행이란 곳은 함부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쉬웠다면 어지간한 회사들은 다 하나씩 가지고 있었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말이니까.

왜 재벌들이 은행과 혼맥을 만드는가에 대한 ‘대답’과도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금고’의 형태로 시작하시죠.”

할아버지가 탄성을 토해냈다.

“아아, 협동조합의 형태를 만들라?”

“예, 지하경제를 양지에 올릴려고 이미 70년대부터 우리 사채시장을 조금씩 조금씩 끌어올려 세금을 걷어낼 생각을 하던 나라입니다.”

“그렇지, 그래서 상호신용금고가 생겼지.”

“머지않아, 분명 상호신용금고법은, 상호저축은행법으로 개정될겁니다.”

“예적금을 장려하게 된다는 얘기구나?”

확실히 할아버지는 ‘돈’적인 부분에서 이해가 빨랐다. 가타부타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만큼.

“예, 우리의 은행설립 목적을 먼저 제대로 얘기해줘야 합니다. 그러면서 살살 꼬시는거죠 경제침체로 흉흉한 민심을 달래주어야하지 않겠냐고.”

“하루 이틀걸려서 만들라는 얘기가 아니구나.”

역시 척하면 척이다.

겨우 1월 말인 시점이다. 한보를 시작으로 도미노처럼 무너질 회사들이 즐비했다. 아무도 한국의 경제상황의 현주소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알지 못하는 것도 정확하다. 여태껏 아니, 앞으로도 ‘나라’가 ‘대기업’을 먹여살려주는 형태일터.

나라라고 얘기하기도 웃긴다.

정확히는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란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늦어도 9월까지는, 전국 주요 도시에 적어도 1개 이상의 지부가 설립되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쉬운태가 역력한 할아버지.

“앞으로 8개월이라··· 한보 그룹이 부도라길래 당장이라도 뭔가 할 줄 알았더니, 아니었구나.”

“금융그룹을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급하면 체하죠, 내실부터 튼튼히 다지면서 가셔야 할 때입니다.”

너무 아쉬워 하시니 내 기분이 묘하다.

“내년엔, 진짜 ‘은행’이 되어 있을겁니다.”

할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뭐?”

“그렇게 될겁니다. 대한민국은 ‘외국인’보다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을 더 좋아하니까요.”

기대감 서린 눈으로 날 바라보지만, 더 이상의 힌트는 알려드리지 않았다.

“녀석 또 혼자 의뭉을 떠는구나.”

“하하, 기대감이란 것도 중요하니까요.”

“쯧, 오냐 어디 그런 시기가 오는지 내 두고보마.”

***

같은 시각.

이건 회장의 저택 집무실.

탁.

책상위에 서류를 내려놓은 이건 회장이 1비서실장 남종현을 바라보았다.

“달러를 매입하고 있어?”

“예.”

“천혁수 그 노친네가 무슨 생각일까···”

“환율이 제법 오른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아냐아냐, 천혁수 그 돈 귀신이 그런 푼돈 때문에 움직일리 없어. 단순 환차익을 노린다? 웃긴 얘기지.”

남종현은 그저 말없이 같은 자세로 한참을 서 있었다. 이건은 혼자 만년필로 서류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어떤점이 그렇습니까?”

“모르겠군, 전혀 모르겠어··· 천우진 그 노친네가 왜 이런짓을 벌리는지, 그 노친네 성격이면 진즉에 깡패새끼들을 내 집 안방까지 보냈어야 맞아.”

그간 이건은 최대한 외출을 자제했었다.

어지간한 업무도 직접 자신의 저택으로 임원들을 불러서 지시하거나, 남종현이 대신 말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었다.

‘건강상의 이유’라는 핑계였지만 남종현은 도무지 그 이유를 몰랐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드라이브에도 손을 땠기에 진짜 이건이 어디 안 좋은가 했었더랬다.

그런데 방금 이건의 말로 남종현은 깨닫게 되었다.

이건은 자신의 신변을 위협할 ‘깡패’가 두려웠던것이다. 말도 안되는 이유라고 생각하기에 그는 불쑥 입을 열었다.

“겨우 깡패들입니다. 감히 회장님을 어쩌지 못합니다.”

이건이 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돈으로 못할게 없는 대한민국이야.”

“······”

“천혁수 회장의 현금유동량은 어마어마해, 과소평가는 금물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강영우는 아직도 연락이 안되고?”

“예.”

“죽은게 확실하군, 그래서 더 이상하단 말이야··· 가만히 있을 성정이 아닌데.”

“더 조사하라고 하겠습니다.”

이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쪽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왜 ‘달러’를 사들이는지도 철저하게 분석하라고 그래, 그리고 쓸만한 경제 전문가가 누가 있지?”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 대외경제국장을 부르겠습니다.”

“그치들이 최고야?”

“사전에 ‘달러’에 대해서 연구하고 오라고 언질을 넣겠습니다.”

“좋아··· 오늘 한보가 무너졌어, 쓸만한 물건들 있나 기획실에 조사하라고 일러. 고작 50억이 없어서 무너지다니 쯧쯧, 모래성을 쌓으니 장마를 견디지 못하지.”

“예. 다각화를 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건이 남종현을 새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제 네 놈도 제법 늘었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쓸만한 것들로 물어 와.”

마치 테니스 공이나 뼈다귀를 던져놓고 애완견에게 물어오라고 명령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남종현은 익숙한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이건이 손짓하자 남종현이 집무실을 나가고 이건은 홀로 책상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돈귀신이 무슨 계획이 있을텐데··· 으음.”

***

시간.

그것은 좀처럼 잡히지 않고 나이든 사람은 다시 젊음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랐다.

꽃피는 춘삼월.

할아버지는 바쁜 일정을 뒤로 하고 굳이 나와 동행하셨다.

“여기서 세워 주세요.”

내 말에 백철웅이 룸미러로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니, 차량은 서울대의 정문에 부드럽게 멈추었다.

“녀석, 안 까지 같이 가자는데도.”

“됐어요, 점점 흉흉해질텐데 돈 많은집 자식이라고 하면 괜한 질투나 받죠. 여기저기서 돈 빌려달란 소리라도 할까봐 무섭습니다.”

풋 하고 웃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 문 손잡이로 손을 뻗으려는 때,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우진아.”

“네.”

“이건 그 놈이 우리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음, 우리 동향이 궁금한 모양이네요.”

“그래, 그 망나니 삼남에대한 일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가 제 놈을 건드리지 않으니 궁금한 모양이야.”

“그렇군요.”

“어제 경제수석에게 전화가 오더구나.”

완전히 몸을 돌려 할아버지에게 집중했다.

“무슨 내용이었죠?”

“환율이 오를걸 알고 있었냐는 물음이었다. 혹, 경제상황에 대한 자문을 받을 수 있냐고 묻더구나.”

팍,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어떤, 나비효과가 일어날 것 같았다.

“경제수석은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혈세를 뜯어먹는 놈들 중, 믿을만한 놈이 있겠느냐? 마땅한 돈놀이가 없어서 샀다고 얘기했다.”

“잘하셨네요··· 이건, 그 뱀이 움직였겠죠?”

“그렇겠지, 콧대만 높은 놈들이 나를 찾은 이유가 별거겠느냐.”

“예, 조심하라는 얘기로 알아듣겠습니다.”

“그래 알아 들었으니 되었다.

신입생 OT때도 참석하지 않은 나는, 당연히 강의실 내부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힐끗힐끗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굳이 내게 말을 걸진 않았다.

파릇파릇하고, 풋풋해야 할 학생들의 얼굴에, 꽤나 그늘진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느 가족의 가장이 ‘고용 불안’과 ‘빚’에 허덕일 시기, 그러나 아직은 웃고 있는 학생들이 훨씬 많았다.

아마 저 웃음도 머지 않아 울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곧 삼미도 터져나갈테니까.

그놈의 ‘다각화 전략’이라는 허울좋은 사업계획에 포함된 ‘철강’을 너무 쉽게 봤다.

어차피 제 돈으로 하는 ‘사업’도 아니라서 그랬을까? 부채만 썩어지게 많아지고 부실기업만 미친듯이 증가했다.

어음거래가 횡횡하고, ‘대기업’이라는 미명을 이용해 결국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그 폭탄은 중소기업들의 줄도산으로 이어질테다. 하루하루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서민들만 죽어나간다는 소리다.

이것이 작금의 대한민국이다.

쿵.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문이닫히는 소리에 시선을 강단으로 돌렸다. 작은 안경을 쓴 신사가 씨익 웃으며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들을 훑는다.

“반갑습니다. 자랑스러운 경영학과 신입생들 나는 경영을 위한 경제학을 가르칠 김광진입니다.”

짧은 소개에 박수가 이어지고, 그가 얇은 출석부를 펼치더니 말했다.

“그럼 출석부터 불러볼까요? 김가영, 김가은··· 천우진.”

내 이름에 손을 살짝 들어 대답했다.

“예.”

샤샤샥.

강의실 내부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교수가 피식 웃다가 마저 출석을 불렀다.

탁.

출석부를 덮은 교수가 말했다.

“첫날부터 빡세게 강의하면 다들 지치겠죠?”

학생들이 하나 같은 마음으로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럼 경제수업 답게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보죠?”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자, 우리 수석입학한 천우진 학생, 내가 질문을 해도 될까요?”

어쩐지 강의실에서 내게 주목한다 했더니, 수석이었기 때문이었나보다.

“예,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야~ 수석 아니랄까봐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좋네요.”

“감사합니다.”

교수는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하는지 개구장이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현재 태국의 경제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천우진 학생의 생각이 궁금하네요.”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 날아왔다.

하지만, 전삶 지겹도록 ‘외환위기’에 대해서 공부했었기에 태국의 현 상황은 오히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건의 눈과 귀가 어디에 어떻게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굳이 ‘정보’를 풀어 낼 이유는 없다. 과시욕에 휩싸여 주머니속 송곳 처럼 튀어나가는 우를 범할 필요도 없겠지.

“96년도 하반기의 불경기 때문에 흔들리는 듯 해 보였지만 현재는 괜찮아 보입니다. 실제로 3월부터 ‘정상화’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꽤 많지 않습니까?”

교수가 안경을 추켜 올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또 다른의견 있는 학생 있습니까?”

아무도 질문이나 의견을 내지 않았다.

하긴, 대학 초년생에게 ‘경제’란 어려운 것이니까 어쩌면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보였다.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면 ‘투자’하지 않았을리 없다. 눈 앞에 ‘자산증식’의 길이 있는데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번쩍 손을 들어올렸다.

교수가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음? 할말 있습니까 천우진 학생?”

“예.”

“말해보세요.”

거만하게 날 바라보는 교수에게 뭔가에 홀린 연기를 하며 말했다.

“태국은 해외거대자본에게 휘둘리지 않고 성공적인 방어를 한 것 같아보입니다.”

“아직은 지켜봐야 하겠지만··· 큼, 그래서요?”

“그럼 당장 바트화를 끌어모아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태국시장에 새로운 투자를 하거나요,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면 대외 신인도가 올라갈 수 있는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군요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또 다른 의견···”

역시, 현재 거대자본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잠깐은 잠잠한 듯, 끝난 듯, 완벽한 방어에 성공한 줄 아는 태국이지만 그렇지 않다.

욕심에 불타오른 거대 투기세력이 어디 가만 둘 것 같은가? 고정환율이란 미친짓을 해버린 태국이다. 그런 맛있는 식사를 가만 두고본다고? 어림도 없지.

어떻게 아냐고?

‘내가 그 투기 세력이니까.’

시간이 좀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

5억4천만 달러가 얼마가 될지 너무 궁금하니까.

< 제 26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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