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화. >
이건의 저택 집무실.
쫙, 쫙.
박중구의 뺨을 몇차례 후리며 호통치는 이건.
“내 삼현에 범죄자를 만들어? 내 아들을 전과자로 만들어!”
이건의 벼락같은 호통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 박중구의 몸에 손을대며 말을 이었다.
“10년? 일을 어떻게 한 거야? 그 놈이 아무리 망나니어도 마약이라니! 마약이라니!”
“유학을 다녀온 건양의 차남과 후성의 삼남에게서 정보를 획득한 것 같습니다.”
“이 새끼가, 누가 그딴 것 물었어? 어떻게 할거냐고!”
고개를 푹 숙이며 외치는 박중구.
“죄송합니다. 정의현 검사가 워낙 완강하기에···”
“헛소리 집어치워! 대한민국에 내 돈 거절할 놈 없어!”
“······”
“검사놈 하나 어떻게 핸들링도 못하고 쯧, 비서실장 자리 내려놔, 아무래도 네가 그 자리에 너무 오래있었던 모양이다.”
털썩 무릎을 꿇은 박중구.
“회장님! 살려주십시오··· 다음달에 늦둥이가 나옵니다.”
“내가 언제 죽인다 그랬어? 자리를 내려 놓으라고!”
“최선을 다해서 도련님을 빼 내겠습니다.”
“진즉에 그렇게 했어야지, 됐어! 이 일은 이제부터 종현이가 핸들링 할테니까.”
“기회를 주십시오···”
이건이 비릿하게 웃더니 말했다.
“기회는, 준비된 놈이 받아가는거야, 네 놈은 아직 준비가 안 됐어.”
“28년··· 28년을 회장님 밑에서 일했습니다··· 평생을 삼현인으로 살았습니다··· 삼현이 아닌 제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회장님.”
“하, 그 혓바닥으로 검사놈을 꼬셨어야지.”
“기회를 주십시오···”
무릎 꿇고 있는 박중구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이건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28년간 받아먹은 월급까지 다 토해내고 싶어?”
“······”
“조용히 가, 여태껏 일 했던 모든 건 잊어버리고, 아직 쌩쌩하니 어디 경비원이라도 취직하던가 해.”
타이밍 좋게, 노크소리와 함께 한 명의 사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찾으셨습니까?”
“그래, 종현아.”
“예, 회장님.”
“이놈 치워라, 그간 고생했으니까 퇴직금은 챙겨 줘.”
“예.”
“그리고 재현이 일, 네가 직접 핸들링 해.”
“예, 알겠습니다.”
종현이란 사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하는 이건.
“몇 년 받아올래?”
“2심에서 5년 받아오겠습니다.”
“너도 고작 그정도 밖에 안 되는거야?”
“대선 이후, ‘특사’로 도련님을 빼오겠습니다.”
이건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렇지, 마음에 드는 대답이구나.”
“예, 맡겨만 주십시오.”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 이건이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들어올리자 종현이란 사내가 박중구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옮기려는 그때. 박중구가 종현을 밀치고 이건에게 달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회장님, 제 평생이었습니다. 온 정성을 삼현에 쏟아부었습니다! 앞으··· 커억, 컥.”
이건이 들고 있던 책으로 박중구의 목울대를 사정없이 갈겼다.
“버러지 같은 새끼가 왜 말귀를 못 알아 먹어? 꼴 보기 싫다잖아! 전화라도 돌릴까? 대한민국 경제인들한테 사발 한 번 풀어줘? 3비서실장 맡고 있던 박중구가 일하는 회사는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고 얘기하길 원해!”
“크윽···”
종현이 서둘러 다가와 박중구를 끌고 집무실을 나왔다. 힘 없이 끌려나온 박중구가 종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종현이 형···”
“1비서실장 남종현.”
“시발··· 형, 비서실장 남종현! 우리는 그냥 사냥개야 사냥개··· 잘 못하거나 사냥이 끝나면 사냥꾼의 한끼 식량일 뿐이야.”
남종현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잘했어야지?”
“그 망나니 컨트롤 할 수 있는사람이 삼현에 어디있소?”
“쯧, 컨트롤 할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거야, 뒤처리만 깔끔하게 했으면 좀 좋아? 네가 자꾸 도련님을 컨트롤하려고 하니까 너한테 일정을 숨기지.”
“하아··· 형님이 나좀 도와주쇼, 나도 벌어먹고 살아야지 않소?”
“쯧, 기회봐서 괜찮은 자리 찔러 줄테니까 몇 달은 얌전히 기다려 하청업체 임원자리 알아봐줄테니까.”
“믿습니다 형님.”
“조용히 가 그럼.”
“예··· 진짜 형님만 믿습니다.”
“어허.”
박중구가 힘 없던 걸음에서, 다시 생기를 찾고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이건의 저택을 벗어났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고나서, 남종현은 다시 집무실로 들어갔다.
“보냈어?”
“예.”
이건이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을 읽으며 말했다.
“왕은 항상 주변의 눈과 입을 조심해야 돼.”
남종현의 두 눈이 떨렸다.
“··· 중구, 처리하겠습니다.”
“쯧, 제법 쓸만하다 싶어서 그 자리에 앉혀놨는데,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어. 평생을 데리고 가기엔 모자랐던게지.”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남종현에게 말한다.
“네 놈은, 그러지마.”
“예.”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간 남종현의 뒷모습을 확인한 이건이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를 꺼내었다.
“천우진··· 천혁수··· 까드득.”
***
이재현의 재판은 이례적일 정도로 빠르게 치뤄졌다. 이유는 ‘삼현’의 압박도 압박이지만, ‘미친개’라 불리던 정의현 검사가 ‘여론’을 등에 업고 미친듯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삼현의 삼남 이재현, 마약유통 혐의 부인, 1심 징역 10년.’
‘재벌가에 내려진 솜방망이, 국민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가.’
‘2kg 필로폰, 보통은 20년, 재벌가는 10년.’
‘누굴 위한 법인가?’
‘징역 10년 범죄자, 교도소 아니고 병원?’
1심에 10년.
시간이 지날수록 형량은 낮아질 터. 역시 예상했던 5년 형량이 나올것 같았다. 그나마 소소한 재미라면 이재현의 똥씹은 표정과 이건 회장의 똥씹은 표정을 신문 1면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정도다.
SKY인베스트의 사무실 테이블에 보던 신문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강기태가 내게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뭐죠?”
“음, 대표님이 구상했던 포트폴리오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봤습니다.”
딱히 할 일은 없으니, 동아시아 시장을 주시하고 있으라는 말에, 좀이 쑤셨는지 이런걸 준비해왔다.
서류를 살펴보니 구체적이고 매우 공격적인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왔다.
“기존, 대표님이 투자하신 옵션은 최대 기대수익이 50배 미만인데 반해, 이 포트폴리오는 최대 92배의 수익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실제로 97년 IMF이후, 다양한 경제분석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중에는 분명 ‘고효율’의 공격적인 투자방법들이 튀어나왔었다.
물론, 그것들은 전부 쓰레기다.
‘위기’는 돌고 돌아도, 전부 똑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나라고 높은 수익률을 기대 할 수 있는 투자 방법을 몰랐을까? 정답은 ‘아니’다.
알고 있지만, 굳이 50배 미만정도에서 머무는 이유. 한방에 너무 욕심을 내면, 힘의 우위에서 나보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놈들이 날 방해 할 것 같아서였다.
특히나 욕심이 많고, 악독하기가 상상하기 어려운 해외자본가들은 그 정도가 더했다.
위험이 된다 싶으면 철저하게 밟으려 들터.
“아뇨, 원래 계획대로 갑시다.”
“예?”
“본부장.”
“예, 대표님.”
“너무 과하면, 싹이 밟혀요.”
“······”
“동아시야 경제시장에 ‘틈’을 발견하고 잔뜩 벌리고 있는 놈들의 타깃이 될 필요는 없단 얘깁니다.”
“아아.”
강기태가 무엇인가 알아차린 모양.
“있는 놈들이 더한다는 말, 많이 들어봤죠?”
“아, 예.”
“진짜 그럽디다. 특히나 돈이 많은 놈들 중엔 ‘인종차별적’인 사상을 가진 놈들도 많죠, 그러니까 아직은 시기상조란 얘깁니다.”
“으음···”
“아직은 기지개를 켤 때가 아니에요, 우리는 지금 덩치가 너무 작거든요? 굳이 없던 옵션까지 만들어가며 투자한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강기태.
“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정 심심하면 도미노처럼 터져나올 동아시아 경제위기에서, 우리가 태국시장을 빠져나온 직후 대한민국에 어떤 투자를 해야 할까를 고민 해 보십시오.”
입술을 삐쭉이며 강기태가 말했다.
“그것도 이미 대표님이 다 정해놓으셨을 것 같은데요?”
크게 틀리지 않은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약속하죠. 최대한 본부장의 말을 경청하겠다고.”
“알겠습니다.”
“아! 본부장 개인자금 있잖아요? 그건, 본부장 뜻대로 움직여보세요, 98배의 수익이라니 어마어마 하잖아요?”
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하는 강기태.
“아닙니다. 대표님도 피하는 힘대결을 제가 굳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현명하다.
물론 강기태의 개인자금 규모가 얼마 되지도 않으니, 큰 견제따위는 올리가 없다. 하지만 내 말을 신뢰하고, 혹시나 모를 위협에 접근하려 하지 않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꼭대기에서 내려볼 날 있을테니까.”
“옙! 대표님만 믿습니다.”
“TV틀어보세요, 뉴스를 봐야 될 것 같아서요.”
“예.”
공영방송을 켜니, 마침 내가 기다리던 뉴스가 ‘속보’로 떠올랐다.
[ 속보입니다. 한보철강이 금일 부도······]
뉴스를 다 보기도 전에, 품에 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예, 할아버지.”
-진짜구나.
“예, 고작 50억을 어쩌지 못해 무너졌습니다.”
-세상이 시끄럽겠어.
“도미노의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한보’는 도화선에 불을 당긴거죠.”
-도무지··· 네 놈은 무당도 아니고 어찌 아는 것이냐?
“한보가 ‘무당’을 믿다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철 냄새를 맡아야된다는 헛소리에 철강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이모양이 되었지요, 그냥 잘 하던 부동산이나 했으면 될 일을 말이에요.”
-쯧쯧, 욕심이 과했던게지,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던게야, 우선 들어오거라 오늘 할 얘기가 많을 듯 하니.
“예.”
모로로라 휴대폰을 다시 품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강기태가 물었다.
“들어가십니까?”
“예.”
“그나저나··· 한보가 부도라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요.”
“대충 예상하고 있었잖아요?”
“그래도 재계서열 20위 내 기업이 이렇게 쉽게 부도가 날 수 있다는게 참···”
“쉽게 난 거 아닙니다. 비리와 욕심을 기둥으로 삼은 기업이에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죠. 이번 부도를 막아보겠다고, 여기저기 돈을 끌어다 썼습니다. 저 살자고 나라를 부실하게 만들었어요··· 미친 놈들이죠.”
“으음.”
“세상이 시끄럽고 힘들겁니다. 곳곳에서 곡소리가 들릴겁니다. 우린 그 상황에서 ‘돈’을 버는 거고요, 쉬운일 아닙니다. 강기태본부장,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오세요.”
강기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막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강기태의 무거운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소문 정도는 내 보세요, 믿으면 다행이고 아니어도 상관 없을 것 같으니까.”
“소문이요?”
“예, 달러를 사라고 한다던가, 어음거래를 절대 하지말라고 한다던가. 직접적으로 도울 순 없어도 간접적으로는 도울 수도 있겠죠.”
조금이나마 밝아진 강기태의 표정.
온 국민이 뜬 눈으로 밤새는 일이 많던 97년도다.
아마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할터.
***
집에 도착하니, 할아버지가 몸이 닳았는지 처음으로 일어서계신 모습으로 날 반겼다.
“어서 오거라.”
“예.”
약간의 흥분이 느껴졌다.
‘돈’냄새를 맡은게 분명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할아버지의 질문이 날아왔다.
“달러를 언제 풀어야 하느냐?”
“탐나는 물건이 있을때, 기꺼이 지갑을 열어야죠.”
팍 미간을 찌푸린 할아버지가 말했다.
“으음, 아직은 아니다라.”
“예, 천정부지로 치솟을 겁니다.”
“억지로 억지로 끌어당겨 모은 보람이 있구나.”
금새 표정이 풀린 할아버지는 동네의 푸근한 어르신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조부의 심리가 편안하다는 것의 방증이리라.
“기껏 종금사 차려놓고 심심하셨죠?”
“그랬지, 뭐 일이야 내가하냐마는··· 그래도 역시 제조업, 건설업 하는 놈들이 부럽더구나.”
나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저건 내 밥그릇이니까, 할아버지가 손댈 분야가 아니다. 게다가 ‘금산분리’때문에, 할아버지는 손에 쥐기도 어렵다. 기껏 차린 종금사의 경영권을 포기하고 단순투자로 전환하면 모를까.
“그런거 하시겠다고 종금사 경영을 포기하시진 않으실거죠?”
“그렇지··· 아직은 아니지.”
묘하게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그럼 할아버지의 못 이룬 꿈은, 이 손자가 대신 이루겠습니다.”
“하! 네 놈 밥그릇은 넘보지마라?”
“많이 심심하셨죠?”
“그랬지.”
“이제 기지개좀 켜셔야죠? 우리 ‘대한종금’도 이름 한 번 날릴 때 된것 같습니다.”
“기지개라···”
< 제 2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