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3화. >
이재현이 머무는 삼현가의 저택 별관.
“어이.”
이재현의 부름에 황급히 달려온 사내.
그의 얼굴은 여기저기 멍이들고, 부어있어 보기 흉했다.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모진 구타를 당한 것 일터.
“예! 도련님!”
“이름이 김장군?”
“김장원입니다. 도련님.”
“그래 준비는 제대로 하고 있지?”
“예, 그람요! 도련님이 판때기만 맹글어 주시믄 천우진이 그 새끼 확실허게 담거불겄습니다.”
이재현이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천우진이 한테 확답을 받고 왔으니까, 조만간 자리 만들거야, 확실하게 가자고.”
“예!”
고개를 끄덕인 이재현이 층계를 올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김장원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이재현의 뒷모습을 무감정하게 바라본다. 이내 몸을 돌려 삼현의 저택을 벗어났다.
***
삼일 뒤.
수능 성적표가 배부된 날.
과거, 그러니까 정확히는 나의 전 삶에서 ‘역대급 불수능’이라는 악명을 가지고 있던 시험에 유일한 만점자가 등장했고, 때문에 언론은 시끄럽게 떠들었다.
“하, 종금사를 차린 것이랑은 비교가 안 되는구나.”
할아버지가 통유리 창을 통해 담장 너머에 진을 치고있는 취재진을 바라보며 내뱉는 말엔 묘하게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이렇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멋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웃기는, 만점이 대단하기는 한 모양이구나.”
“본고사 폐지 후, 최초의 400점 만점으로 시행되는 시험이니 더 그럴겁니다.”
“그래서 네 놈은 만점이고?”
“운이 좋았습니다.”
“답지 않게 겸손이구나.”
“하하하, 어떻게 인터뷰 한 번 제대로 해서, 우리 ‘대한종금’홍보나 할까요?”
“일 없다.”
몸을 돌려 먼저 식탁으로 향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일 없다’라고 말했지만, 내심 기대를 하시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식탁 앞에 도착했는데,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정말 대단한 진수성찬이었다.
아산댁 아줌마가 제대로 준비를 하신 모양.
“크음.”
할아버지가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니, 눈치가 빠른 아산댁이 ‘호호’ 웃으며 말했다.
“손자가 큰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왔는데 칭찬해주셔야죠 어르신~”
“내가 종금사 차린 건 별거 아니고?”
“어휴, 호텔에서 쉐프들이 차려준 진지잡수시고 오셔놓고 이러시기에요? 어르신도 내심, 기분 좋은 날 제 음식 말고 다른 손으로 한 음식이 맛있었던 것 아니시고요?”
아산댁은 할아버지가 내심, 손자를 돌려돌려 자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거다.
“고기나 줘.”
할아버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아산댁이 작은 화로위에서 바로 굽고 있던 꽃갈비살 한 점을 내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그게 왜 거기로가?”
“에휴, 오늘 주인공은 우리 도련님이죠~”
할아버지가 날 힐끗 째려보며 말씀하셨다.
“많이 먹어라.”
“하하하, 예.”
항상 무게를 잡는 할아버지지만, 아산댁의 너스레에 절로 가벼워지시는 것 같았다. 어쩐지 이 모습이 싫지가 않았다. 뭔가 더욱 할아버지와 내가 가까워지고 끈끈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구운소금에 살짝 찍은 꽃갈비살을 밥 위에 올려 한 수저 크게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는 할아버지.
“와.”
감탄과 함께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식사가 끝나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음?”
“오늘은 밤에 약속이 있네요.”
생전 없던 일이니 할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때 경제인 모임에서 할아버지도 보셨죠? 이재현.”
“아아, 그 새끼 살모사.”
“예, 그 놈이 보자네요?”
“흐음, 좋은 뜻은 아닌듯 한데?”
역시 우리 할아버지, 눈치가 부처님이다.
“어디 어떤 판때기를 깔아놓았나 구경 좀 해보려고요.”
“굳이,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겠다?”
“에이, 살모사라고 방금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뱀의 아가리와, 범의 아가리가 다르더냐?”
“다르죠, 뱀은 멍청해서 가끔 배가 터져 죽곤 하니까요.”
할아버지가 알겠다는듯,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놈, 다 계획이 있구나?”
그저 말 없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하거라, 살모사의 독기는 제법 독해.”
“걱정마세요, 분에 넘치는 독기는 오히려 제 살을 깎아 먹을테니.”
“오냐.”
***
서울에서 오가기 교통도 편하고, 가까운 곳에 바다를 볼 수 있는 대부도의 한 별장.
이재현은 항상 마음먹고 노는 날이면 그곳을 찾았다. 3층 구조의 건물에 2층 발코니에는 넓다란 수영장이 딸려있는 그곳은 헐벗고 놀기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주변이 그리 발달해 있지 않고, 주변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아도 좋으니, 그는 더욱 그곳을 좋아했다.
“읊어봐.”
소파에 몸을 파묻고 거만하게 명령을 내린 이재현, 김장원은 며칠전과는 다르게 멀끔한 모습으로 말했다.
“우선 도련님께서 천우진이를 쪼까 취하게 하셔야 합니다. 판단력이 빙시가 되야 편하다 이말입니다.”
“술은 안 마시는걸로 들었는데?”
“아따, 삼현의 이재현 도련님이 주는 술을 그놈이 안받겄습니까?”
김장원의 아부섞인 말에 피식 웃으며 계속 얘기하라는 듯 쳐다보는 이재현.
“술 한번 마셔보지 못한 놈이니께, 아마도 위스키 몇 잔이믄 헤까닥 하지 않겄습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김장원이 씨익 웃으며 품에서 알약이 들어있는 비닐을 꺼내더니 말했다.
“그때 요것을, ‘술 깨는 약’으로 소개를 하시믄서, 한 알 맥여불면 시마이~!”
이재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 약이 뭔데?”
“요거시 얼마전에 물 건너온 놈입니다, 일명 도리도리.”
“도리도리?”
“예, 정확히는 ‘엑스터시’라는 놈인디, 요것을 먹고 춤을 추면 더 빠르게 ‘환각상태’에 돌입한다, 환각상태에서 춤을추면 천상을 거니는 느낌이다, 뭐 그렇게들 표현합니다. 쉽게 야그해서, 허벌나게 좋아분다, 그런 얘기죠.”
“그게 끝?”
김장원이 씨익 웃었다.
“아따, 우리 도련님이 천우진이를 평생 개처럼 부리셔야 허는디, 여그서 끝나면 되겄습니까? 그 놈이 약에 취해서 사리분멸을 못헐 때!”
다시 품에서 스윽, 주사기를 꺼내며 말했다.
“요것을 혈관에다가 놔 주시면 되겄습니다.”
“그건 뭔데?”
“뽕입니다.”
“뽕? 필로폰?”
“예, 일명 작대기라고 부릅니다.”
이재현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놈이 약먹는 거랑, 내 밑에서 개처럼 일하는거랑 무슨 관계가 있어?”
“흐흐, 천우진이 할애비, 천혁수 그 노친네가 ‘마약’이라고 하면 치를 떨어붑니다.”
이재현이 알았다는 듯, 손뼉을 짝 하고 마주치고는 말했다.
“마약을 하고 논다는 걸 약점으로 삼아라?”
“예, 세상천지 뽕쟁이 말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 도박, 마약에 빠진 것들은 믿을 종자가 안 되지.”
“특히, 천혁수 그 노친네가 그쪽으로는 아주 오줌도 안눠 붑니다. ‘사채’쓰는 놈덜이 어디 정상이 있겄습니까? 대부분 약처먹고 도박허고, 그 것도 아니면 최소한 술은 처먹습니다.”
“실패한 인생들이 그렇겠지.”
“예! 그라니까, 이것을 빌미로 ‘유산’을 받고 싶으면 처신 잘해라, 내가 평생 비밀로 해주겠다. 네 놈은 개처럼 짖기만 혀라~ 이렇게 야그만 해도 될거시다 이 말입니다.”
이재현이 간사하게 한쪽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리고 말했다.
“좋네, 어차피 나도 천우진 그 새끼 ‘엿’맥이는게 목적이었지, 개처럼 부리는게 목적은 아니었는데, 실패해도 최소한 제대로 ‘엿’은 먹이는거 아냐?”
“그라죠잉, 여윽시 나으 도련님은 척하면 척입니다.”
“무조건 성공하는 작전이다?”
“그렇습니다!”
이재현이 웃으며 손목에 감긴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
“3시간 뒤가 약속시간이니까, 술자리 시작되면 적당히 분위기 봐서, 슬쩍 약 넣어.”
“예, 누구한테 넘겨드리면 되겄습니까?”
뱀처럼 혀를 낼름거리며 말하는 이재현.
“내가 해야지, 그 재미있는 걸.”
김장원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예, 그라믄 그렇게 알고 준비하겄습니다.”
“그래.”
***
끼익.
자동차의 사이드 브레이크가 채워지는 소리에 스륵 눈을 떴다.
“도착했어요?”
“예, 도련님.”
정호석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자, 얼른 차에서 내린 정호석이 차량의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훑으니 보이는 것은 없다.
파도 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바다가 어디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깜깜한 어둠이 날 맞이했다. 그에반해 뒤를 돌아서면 휘황찬란한 조명과 함께, 여인네들의 하이톤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2층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어! 왔냐~ 우진아? 네가 늦길래 먼저 시작했다. 빨리 올라와!”
고개를 들어올리니 이재현이 죽마고우라도 만난 듯 반가운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피식 웃고는 정호석을 쳐다보았다.
호석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모습이 사뭇 비장해 웃음이 터질뻔했다.
“하하, 걱정마세요 별일 없을겁니다.”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예, 편히 쉬고 계세요.”
정호석이 품에서 무엇인가 하나를 건넸다.
“뭐죠?”
“워키토키입니다.”
“워키토키?”
“여기, 이 버튼을 누르면 저한테 신호음이 울립니다. 그 순간 비상상황으로 판단하고 바로 돌입하겠습니다.”
믿음직한 표정에 난 절로 기분이 좋아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예, 안심하고 놀 수 있겠네요.”
“예, 신명나게 놀다 오십시오.”
“하하하, 그러죠.”
호석의 말처럼 한 번 신명나게 놀아봐야겠다.
계단을 오르니, 몸뚱이에 천쪼가리 몇개 입고 있지 않은 여인들이 나를 반겼다. 물에 젖은 생쥐꼴을 한 이재현이 반갑다는 듯 날 껴안으려 했다.
슬쩍 놈을 제지하며 말했다.
“아, 비싼 옷이라.”
“하여간 새끼, 까칠하기는.”
이재현이 내 주변을 포위하듯 서 있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뭐하냐? 비싼 옷이라니까 살살 벗겨 드려라, 빤스만 남기고 죄다 벗겨!”
“자, 잠깐.”
당황하며 여인들을 말려보려 했지만, 여기서는 이재현이 법인 모양, 그녀들은 내 말은 신경쓰지도 않고 빠르게 내 옷을 벗겼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이재현과 같은 빤스 바람을 하고는 수영장에 몸을 담궜다.
12월, 추운 겨울에 수영장은 다행이 온수 풀이었다. 뜨뜻하게 몸을 적시는 그 감각은 어쩐지 절로 흐뭇해지는 느낌이었다.
“새끼 좋지?”
“뭐, 괜찮네.”
“자자, 이것도 한 잔해.”
이재현이 건네는 음료는 ‘칵테일’이었다.
“술이야?”
내 질문에 이재현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마셔봐 새끼야, 뿅간다 맛이 기막혀, 설마 천하의 천우진이 알콜에 쫄진 않겠지?”
나이답게 유치한 도발이었다.
제딴에는 제법 그럴듯한 도발이었는지 몰라도 내게는 전혀 아니다. 어쨌든 판때기에 앉아 주었으니, 이 정도는 속아줘야겠지.
붉은색 칵테일을 단숨에 비워냈다.
첫 맛은 달달한 과일향을 내지만 끝맛엔 알싸한 보드카가 목구멍에 용암이라도 넣은 듯한 느낌을 내준다.
의도치 않게, 원수 같은 놈 덕분에 이번 삶에서 처음으로 ‘술 맛’을 느끼니 뭔가 느낌이 애매했다. 좋으면서 싫고, 싫으면서 좋고.
“죽이지?”
“좋네, 한잔 더 줘봐.”
내 말에 이재현이 ‘어어! 그럼 줘야지!’하며 신나서는 뒤로 손짓한다. 그 사이 거의 내 몸뚱이를 숙주삼아 기생하는 기생충처럼 붙어 있던 여자가 말했다.
“와아~ 오빠 술 잘마신다~”
“뭐야 이 아줌마는? 내가 열 살은 어려보이는데.”
눈썹을 꿈틀거리며 가까스로 화를 참는 모습.
“아, 걔가 네 스타일이 아니야? 야야, 바꿔바꿔.”
똥 씹은 표정의 여인이 사라지고 다른 여인이 나타났다. 유흥을 즐기러 온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맞춰줘야겠지.
“이야, 네 스타일인가 보다? 싫은 티를 안내네?”
“아, 뭐, 쩝.”
“새끼 부끄러워 하기는 마셔마셔!”
이재현과 내가 건배를 하며 연거푸 술을 마시기를 한 참. 이재현이 날 걱정한다는 듯 말했다.
“야야, 천천히 마셔 새끼야, 오늘 밤 길다? 내일까지 있어도 된다고.”
“아아 그뤠?”
혀가 살짝 꼬인 내 말에 더 없이 자상하게 웃으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약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하나 먹어라, 술 깨는 약인데 효과가 기가막힌다 다음날 숙취도 없어, 아 너는 숙취가 뭔지 아직 잘 모르지?”
약간 떨어진 거리였기에 앞으로 한 걸음 내딛다 내가 비틀 거리며 수영장 물에 고개를 처박았다.
첨벙.
“어머 오빠! 으이구, 많이 취했네, 내가 가져다 줄게 잠깐만~”
친절하게도 파트너가 이재현의 손바닥 위에 알약을 오른손으로 집어오더니 요사스럽게 웃으며 ‘아~’하고는 왼손을 쭈욱 뻗으며 내 입을 벌리라 재촉한다. 이재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만 먹어? 형도 같이 먹자.”
“어어? 어어, 그 그래.”
놈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입을 벌리고 내 파트너가 약을 넣어주는 모습을 보니, 이재현도 어쩔 수 없이 약을 제 입에 처 넣는다.
잔에 가득 담겨 있던 칵테일을 원샷 했다.
“아아, 나 먹었다? 보이지? 없는거?”
이재현이 흐뭇하게 웃더니 저도 입을 크게 벌리며 입 안을 보여준다. 혀도 이리저리 돌리며 약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을 그냥 겉으로 토해냈다.
“크크크, 기분이 왜 이렇게 좋아?”
내 말에 더더욱 입꼬리를 들어올리는 이재현.
“그렇지? 죽이지? 크크큭 춤이나 땡길까?”
“춤?”
“그래, 잘 보고 따라해라.”
놈이 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짓하자, 커다란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치해도 이렇게 유치할 수가, 되도 않는 춤솜씨를 뽐내며 궁둥이를 실룩이는데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꼴 뵈기가 싫어야 할 상황에도 이상하게 자꾸만 자꾸만, 웃음이 흘러 나왔다.
궁둥이를 흔드느라 바쁜 나머지, 수영장에서 녹고 있는 알약은 관심도 없어 보였다.
< 제 2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