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9화 (19/458)

< 제 19화. >

골드만글러브에서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내 주머니를 털어먹을 생각만 하는 것들이었다. 제 살을 깎아먹는 짓인지도 모르고 환하게 웃으며 내가 원하는 옵션을 만들어주었다.

과연 내가 옵션 행사를 하는날 JB모건과 골드만글러브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할아버지가 용돈이라고 주신 3천만 달러 중, 1600만 달러 가량이 남았다.

“본부장님.”

“예, 대표님.”

차량 트렁크에 실려있는 보스턴백 2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파인애플 주식을 매집하세요.”

“저 돈을 다요?”

“예.”

“음, 알겠습니다.”

“천천히 월가 둘러보다 오세요, 내일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빌리가 도와줄거에요.”

“예, 감사합니다.”

“즐기다 오세요 일 처리는 다 했으니까.”

눈을 감고 호텔로 향하는 차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머릿속에 ‘이건’회장이 떠올랐다.

전 삶의 다양한 기억들이 사진이 되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내 입꼬리가 점점 길게 찢어졌다.

***

JB모건의 청리엔과 골드만글러브의 와나타베 준지가 해가지기 전 부터 펍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크흐흐, 이봐 준지, 내가 오늘 얼마짜리 호구를 물었는지 알아?”

“오, 너도 좋은 고객을 물었나보네? 나도라고.”

“그래?”

“어, 우리 대일본제국의 지배를 받던 나라에서 온 호구였지.”

“음? 설마 그 녀석 이름이 ‘첸’인가?”

“어, ‘초온’ 그런 성을 썼지.”

“아아! 우리 더블S고객께서 남은 돈을 골드만에 바쳤구만.”

무슨 소리냐는 듯 청리엔을 바라보는 와타나베 준지.

“널 만나기 전에 우리쪽에 와서 이상한 옵션을 만들어달라고 하더군,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동남아 시장에 대한 옵션이었어.”

“설마, 태국?”

“엇? 골드만에서도 태국 바트화 풋옵션을 넣었어?”

“어어··· 우리도 새로 만들었지.”

“참, 어느집 자식인지 돈이 썩어나는 모양이야.”

“으음.”

와타나베 준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청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답지 않게 왜 그래 준지?”

“돈도 제법 있는 놈이··· 어떤 정보가 있는 건 아닐까?”

청리엔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 정신차리라고 준지, JB모건과 골드만글러브의 전문가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옵션 개설을 승인했어, 그게 무슨소리겠어?”

“으음··· 하긴. 우리 대일본제국의 지배를 받던 조센징이 무슨 정보가 있겠어?”

“하하, 그렇지, 걱정말라고”

“그래,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산데, JB모건도 그렇고.”

청리엔이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나저나 우리 회사도 웃겨.”

청리엔의 말에 와타나베 준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가?”

“우리 회사의 고객 등급은 대충 알지?”

“알지, 10억달러 밑은 싱글S아닌가?”

“맞아, 그런데 무려 그 ‘첸’이라는 한국의 꼬맹이에겐 더블S등급을 매겼어.”

“엇? 그러고 보니 그 놈에게 10억달러가 있었던가?”

청리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 놈은 5억7천만달러정도만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더블S등급을 받은거야?”

“투자성향이 호구거든, 벗겨먹기 좋은.”

“아아.”

“더블S등급의 고객들은 어지간하면 잘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고, 공격적인 투자를 잘 하지 않아. 안정적인 걸 선호하지.”

와타나베 준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적은 수익이라도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액수니까.”

“크큭, 그런데 그 한국의 어린놈은 겂도 없이 엄청난 리스크에 투자하더군.”

“나도 우리 회사에 진지하게 등급 상향을 건의해야겠군.”

“그렇지! 내가 볼 때 그놈을 잘 구슬리면··· 어쩌면 내년에 승진할지도 모르겠어.”

“크크큭, 조센징이 내게 도움을 주다니 놀랍군.”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한참 대한민국을 무시하고, 리스크 높은 초 고위험의 투자를 한 천우진을 욕했다.

그러다 어느순간, 와타나베 준지가 말했다.

“흐음, 그런데 리엔.”

“왜.”

“만약 정말 바트화가 폭락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하하하, 이봐 준지 우리 JB모건에서 동남아 시장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지는 알고 하는 얘기야?”

“으음··· 우리도 다르진 않아.”

“그래, 그런데도 그런 걱정을 해? 전조 증상은 충분히 느낄 수 있어, 나라가 망하는 일이야 그렇게 한순간에 일어날거라고 생각하는거야?”

“으음, 모든 경제위기는 한순간에 찾아오잖아?”

청리엔이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준지 너도 결국 소국의 생각을 품고 있는거야?”

와타나베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소국?”

“경제위기가 한순간에 찾아왔다고? 그건 개 소리야, 뭐든 방아쇠를 당기는 시점이 있는 법이라고, 전문가라는 놈이 그것도 모르나?”

“알지,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방아쇠가 있을수도 있다고.”

“쯧쯧,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우리야, 우리가 모르는게 있다고? 개소리지. 진지하게 말하는데 준지, 너도 큰 성공을 거두고 싶다면, 우리 대국의 마음가짐을 좀 배울 필요가 있어.”

“대국은 쯧, 됐다고 우리가 서로 싸우자고 만난게 아니잖아? 같은 동양인들끼리 합심해야지.”

“그래, 잘난 색목인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고!”

맥주잔이 부딪히고 둘은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워냈다.

“으음··· 그 조센징이 수익을 올린다면··· 우린 모가지가 뎅강 날아가겠지?”

“에잇! 술 맛 떨어지게! 나 먼저 일어나지 준지, 다음엔 좀더 대국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오길 바래.”

“이, 이봐!”

***

입국장을 벗어나니, 날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많은 인파들 사이, 풍체 좋은 노인.

겉보기엔 40대 후반,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강렬한 인상의 할아버지 천혁수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마주 웃으며 할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겼다.

“고생했다.”

“에이, 아니에요 재미있었습니다.”

“하하, 그러면 되었다. 가자.”

“예.”

차량에 오르니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무엇이 재미있었더냐?”

“새로운 인물, 꿈과 열정, 자신의 비젼을 제시하는 많은 사업가들이 재미있었습니다.”

“또?”

“자만심 가득한 미국놈들이 재미있었습니다.”

“음?”

“JB모건과 골드만글러브가 절 호구 취급 하더라고요? 나중에 제가 수익실현 했을때, 그 놈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너무 재미있어요.”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녀석, 돈 벌 생각에 신이난게로구나.”

“그렇죠?”

“하하, 그래. 이 할애비 선물은 어떻더냐? 마음에 들더냐?”

양손 엄지를 척 들어보이며 할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최고였죠.”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씰룩이며 올라갔다.

기분이 좋은데 크게 내색하지 않으려는 모양새다.

나는 품에 꼭 넣고 있던 할아버지 선물을 꺼냈다.

“음? 이건 무엇이냐?”

“선물이요.”

“선물?”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작은 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고급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앞으로 결제하실 일이 많으실 것 같아서요, 진짜 악어가죽으로 만든 놈이라, 그립감도 훌륭하고요 그리고 여기, 이 손자가 직접 손글씨로 쓴 글을 레이저로 각인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뿌듯하게 웃으며 만년필을 이리 저리 살펴본다. 크게 표현하지 않지만, 그가 지금 좋아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괜스레 내가 다 뿌듯했다.

“처음으로··· 내 핏줄이 주는 선물을 받아보는구나.”

비싸다고 하지만, 고급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범주다.

나나 할아버지에게 저정도 만년필은 ‘돈을 썼다’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무엇을 선물해드릴까 생각했지만 역시, ‘정성’을 선물하는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사내자식이 뜨게질을 하는 건 좀 그러니 생각하고 생각하다 결정한게 만년필이었다.

자신의 상의 안쪽에 만년필을 잘 갈무리 하는 할아버지.

“결제는 꼭, 이 놈으로 하마.”

“예.”

밝은 분위기기 때문일까? 백철웅이 말했다.

“도련님 제 선물은 없습니까?”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호석이 말했다.

“설마 준비 안 하셨겠냐? 트렁크에 잔뜩 있다 짜식아.”

“그래? 도련님 감사합니다!”

“하하하, 예.”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물을 받았으니 할애비도 선물을 해 줘야지, 철웅아 종로로 가거라, 그러고보니 우진이 이녀석, 옷이 몇 벌 없구나.”

“예!”

***

종로의 작은 양장점에서 구입한 수제 양복을 차려입었다. 규모가 작은 양장점이었지만 실제로 만들어진 양복을 입어보니, 그들이 꽤 대단한 장인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괜히 할아버지가 그곳의 단골이 아닌 것 같았다.

할아버지뿐 아니라, 몇몇 정재계 인물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전신 거울 앞에 ‘시계’를 착용하며 옷 매무새를 점검했다. 아침부터 ‘샵’이라는 미용실에서 머리와 메이크업까지 받은 상태였다.

제법 근사한 ‘도련님’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녀석, 잘 어울리는구나. 제법 어른 같아.”

“그래요?”

할아버지의 칭찬에 피식 웃었다.

할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왜? 이 할애비는 뭐 다른게 없어서 실망한게냐?”

“아니요, 그냥 한 번 쳐다봤습니다.”

할아버지가 내 옆에 서서 거울속 자신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말했다.

“이 할애비는 벌써 30년째 양복을 입는다.”

조용히 할아버지 얘기를 들었다.

“용모단정이란 얘기는 들어봤지?”

“예.”

“기본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단다, 사채업자라는게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심어 줄 수 있지, 그리고 그 위압감을 더 심어주려고 화려한 옷을 입는 인물들이 있단다.”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사람들의 이미지에는 ‘사채업자’라고 한다면 화려한 무늬의 양아치 복장이 떠오를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적당한 위압감과 함께 ‘신뢰감’도 함께 심어주어야 하는 것이야, 내가 준비가 되어 있어야 고객도 신뢰할 수 있지.”

“아아.”

“그러니까 이 양복은, 그리고 내가 정갈하게 외모를 가꾸는 것은 전투에 나서기 전, 준비를 하는 것이지, 가장 기본중의 기본.”

“유니폼이자, 전투복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알아들었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있는 말이었다.

분명, 800달러로 수백조의 부자가 된 댄 페냐도 저와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몇 십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런데 수십년 전이 할아버지가 비슷한 얘기를 한다. 어쩌면 이건 성공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마인드’가 아닐까?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단다. 어리석은 노력을 하라는게 아니야, 추구하는 바,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인식하고 하나부터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챙겨야 하는 법이란다. 나는 그 출발을 이 옷과 외모를 정돈하는 것으로 출발하지.”

디테일.

디테일을 중요하게 챙기라는 얘기 같았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오냐, 알아들은 것 같구나··· 이제 가자, 그들의 1분 1초가 다 돈이다.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주어야지.”

“예!”

할아버지에게 양복과 외모가 전투복이라면.

나도 마찬가지다. 9천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파텍필립의 시계를 어루만지며, 이 시계가 내겐 전투복이라고 생각했다.

“가시죠, 전쟁하러.”

“하하하, 그래.”

고려호텔의 대형 연회장.

할아버지가 입장하자, 어디서 우리를 발견했는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지금, 천혁수 회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무슨 중세시대도 아니고 이런걸 알려주나 싶었지만, 자주 겪었던 일이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경제인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헐레벌떡 다가오는 인물부터, 멀리서 곁눈질 하는 인물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이목을 집중했다.

“아이고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뭘, 신년 행사에 봤지 않나?”

재계서열 50위 안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은마그룹의 총수가 가장먼저 인사했다. 할아버지에게 빌린 돈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그를 필두로 꽤 많은 인물들이 할아버지에게 인사했고, 나를 ‘손자’라고 소개했다.

덕분에 나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기를 수십차례.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명실공히 부동의 1위, 삼현의 이건 회장이었다.

할아버지의 타오를 듯 뜨거운 눈이 이건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오랜만이구만.”

이건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가 나를 바라본다.

“손자분이시라고요?”

“그래, 내 손자지, 평생을 찾지 못할 뻔 했는데 운이 좋았어.”

“그렇군요.”

이건의 몸 주변에 흘러나오는 핏빛 연기.

그가 지금 나와 할아버지를 얼마나 적대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게 손을 뻗어 악수를 요청하는 이건.

난 항상 저 손을 두손으로 맞잡고, 허리를 깊이 숙이던 사람이었다. 저 손 한 번을 잡으면, 집이 바뀌었고 차가 바뀌었었다. 그때마다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더 충성해 ‘인생’을 바꾸고자 했었다.

그러나.

저 손을 단 한번도 잡지 않은 이번 삶이 오히려 내 ‘인생’을 바꾸었다. 오냐, 잡아주마.

그리고 이번에 바뀌는 것은, 내 차도, 집도, 인생도 아니다. 네 놈의 인생이고, 네 놈의 회사고, 네 놈의 운명일테다.

꽈악.

일부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으음?”

놈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 제 1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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