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화. >
같은 시각.
래리는 밤새 마신 술 때문에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래리! 래리!”
세르게이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래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아프니까, 한 번만 부르라고!”
“지금 숙취따위가 중요한게 아니라고.”
“왜, 무슨일인데?”
온 몸을 이용해 다급함을 보이는 세르게이.
래리와 똑바로 눈을 맞추고 말한다.
“미스터 첸이 실리콘 밸리에 투자금을 뿌리고 있다고!”
“음?”
“정말이야! 지금 난리라고 난리, 이러다 우리에게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래리! 천만달러 작은 돈 아니야 알잖아?”
“알지···”
“우린 고작 20만 달러를 투자받기 위해 지분 15퍼센트를 양보하려 했다고, 알아? 단순하게 산술적인 가치로 천만달러면 우리가 설립할 회사를 사고도 남아.”
“그렇지···”
“근데 왜 자꾸 망설이는거야?”
래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안다.
자신의 마음도 이미 투자 받는것에 기울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무엇인가, 미래의 어떤 큰 가치를 잃는것만 같았다.
“천만 달러면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개발에만 몰두 할 수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을 큰 돈이라고! 혹시 첸이 코리안이라 그런거야?”
“으음.”
“그 똥 같은 백인우월주의따위 버리라고 했잖아! 아시아 인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들의 인구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고! 전 세계적인 기업을 꿈꾸면서 설마 인종차별적 생각을 품고 있는건 아니겠지?”
래리가 기분나쁜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세르게이, 아직 술이 덜 깼어? 날 어떻게 보고!”
“답답하니까 그래 답답하니까!”
“이것도 다 첸의 술수라는 걸 몰라?”
“알아! 우리를 조여오고 있다는 걸 안다고! 근데 래리, 너도 그걸 알아야해.”
“뭘?”
“그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와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라는걸 말이야.”
“뭐?”
“굳이 쓰지 않아도 될 헛돈을 쓰면서 우리 목줄을 조여오고 있다고! 그러다 정말 첸이 기분이 상하면? 투자를 철회하고 그 코리아라는 나라로 돌아간다면?”
“으음. 아무리 그래도 지분 49퍼센트는 정말 위험해! 우리가 추가 투자를 위해서 그에게 투자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우리 지분은 금세 역전되고 말거라고!”
세르게이가 쾅! 양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말했다.
“알아! 그런데 너도 그걸 알아야지! 천만달러면 우리를 사고도 남았어! 우리 같은 것들 수십을 살 수 있는 거금이라고!”
“우리가 돈 때문에 시작한게 아니잖아?”
“돈 때문에 시작하지 않았지만 돈이 필요한 것도 맞지, 자본주의에서 돈 없는 자유가 가당키나 해? 돈이 있어야 우리 뜻을 펼칠 기회라도 있는거야! 그리고 천만달러면 지름길이나 마찬가지라고!”
“······”
“눈 앞에 고속도로가 펼쳐졌어, 시간은 금이고! 난 하루라도 빨리 마음껏 내가 뜻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고! 그러기 위해 고속도로에 올라타고 싶고, 꽉 막힌 국도와 그 똥같은 신호등따위 없는 곳에서 마음껏 달리자고 래리!”
래리도 순간적으로 화가 났지만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세르게이의 말이 옳다는 걸 알지만 한순간에 회사를 뺐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고민하는 래리에게 세르게이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가 무한한 자유를 약속했잖아? 나는 그가 기분 나빠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게 맞다고 봐.”
“그의 말을 다 믿어? 어떻게 신뢰할 수 있어!”
“개뿔도 없는 우리가 그럼 뭘 할 수 있는데! 기회인지 아닌지 모르지, 잡아야할지 아닐지 모르지,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어 래리.”
세르게이의 말이 무엇인지 잘 아는 래리였다.
“비가 올 때면 물이세는 천장따위 없는 곳에서 개발하고 싶다고! 매일 먹는 페페로니 피자따위도 이제 질려! 래리 네 친구가 이렇게 간절하게 얘기한다, 우리 계약하자.”
래리가 결심한 듯 말했다.
“제길··· 나도 페페로니 피자는 이제 싫다고.”
“그래! 내가 당장 빌리에게 전화할게.”
“그래, 우리도 직원들도 좀 구하고 미친듯이 액셀 한 번 밟아보자고!”
“이래야 래리지! 이 새끼 돌아왔구나?”
***
하품이 나올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의 비젼에 대해서 들었다. 그들이 그리는 청사진은 다소 허황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미래를 아는 내게는 모두가 그럴듯한 얘기들이었다.
뭣보다, 젊고 어린 그들이 뿜어내는 열정과 노력, 그리고 희망과 꿈은 날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피곤함을 억지로 털어내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길 바랐다. 오늘만 벌써 300만 달러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높은 금액의 투자금을 원하지 않았다.
현실적이고 소박했다.
미래에 이 300만 달러가 휴지가 되어 돌아 올 수도 있다. 강기태에게 따로 얘기해, 내가 투자한 기업들을 살피라고 해야할 것 같았다.
“보스.”
빌리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덩치에 맞지 않게 센스가 좋은 빌리가 차가운 커피를 내밀었다.
“아, 고마워요.”
“래리와 세르게이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이어진 말에 난 피식 웃어버렸다.
벌써 입질이 오다니, 생각보다 더 순진한 친구들이다.
“당장 계약 하겠답니다.”
“그렇군요, 데려오세요.”
“이곳으로요?”
“예.”
빌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전기를 통해 뭐라고 얘기했다. 차가운 커피를 두어모금 마시니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손님이 올 것 같으니, 2시간만 더 하고 종료할까요?”
변호사가 살았다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예, 그럼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요?”
“예.”
***
아쉬워하는 벤쳐사업가들이 발걸음을 돌리고, 회의실 내부로 래리와 세르게이가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은 오히려 더 없이 환했다.
경영권과 연구개발의 방향에 대한 걱정따윈 전혀 없고, ‘천만달러’라는 물질에 대한 환희만 가득해보였다. 변호사가 사전에 준비된 계약서를 내밀었다.
래리가 꼼꼼이 읽다가 물었다.
“여기, 직원 한 명을 추천한다고 되어 있는데, 반드시 고용해야 합니까?”
나는 웃으며 말했다.
“반드시 고용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아마 고용하게 될걸요?”
“예?”
“마침 저기 여러분이 고용해야 할 직원이 들어오는군요.”
래리와 세르게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음? 철수?”
“저 괴물?”
어쩐지 철수가 벌써 저들에게 괴물이 되어 있었다.
“홀리 쉿! 저 괴물이 우리 직원이 된다고? 하아··· 벌써 피곤하다고!”
세르게이의 격한 반응.
래리의 표정은 좋으면서도 좋지 않았다.
그 이중적인 표정에 내가 물었다.
“왜 그러죠 래리?”
“하아··· 철수는 정말 똑똑하고 대단한 친구죠, 그런데 질문이 너무 많아요 정말 쉴 틈을 주지 않는다고요!”
“하하하하, 그렇군요 언젠가 궁금증이 사라질 날이 오겠죠?”
끝내, 계약서에 서명한 래리와 세르게이, 나는 웃으며 그들과 악수하며 물었다.
“그래서 사명은 뭡니까?”
“구골.”
“구골.”
둘이 동시에 말하는 사명에 내 입꼬리는 더 없이 길게 찢어졌다. 전 삶, 내 마지막 기억속 래리의 지분은 16퍼센트였다. 그래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위 안에 들어가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결국 래리와 세르게이는 ‘돈’보다는 어떤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완벽한 ‘독점’기업이 된 ‘구골’은 여느 대기업처럼 갑질과 행포가 만연했지만.
미래의 수퍼파워를 하나 얻었다.
좋은 카드를 얻었을 뿐이니까 만족감 따위는 없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실리콘밸리의 그 누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가시밭길이니까.
제조업 왕국의 왕조를 뿌리째 뽑아버려야 하는 일이니까 쉬울리가 있을까.
“어쨌든 철수를 잘 부탁합니다.”
“······ 쉿!”
“예.”
“추가투자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내게 먼저 말 하세요, 언제나 당신들에겐 기회가 열려있으니까.”
피식 웃는 래리와 세르게이를 뒤로 하고, 철수에게 다가갔다.
“잘 배워.”
“예.”
어느새 녀석의 몸에서 피워오르던 노란색 연기가 조금이나마 초록빛을 띄우고 있었다.
붉은색 연기를 줄기줄기 뿜어대던 모습이 며칠 전인데, 래리와 세르게이를 만난 이후 부쩍 내게 신뢰가 상승한 모습이다.
폭력과 힘을 동원해, 녀석의 몸에서 피워오르는 연기를 녹색에 가깝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순수한 내 능력을 증명하고 놈이 진심으로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 더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그래도 어째서인지.
난 그 길을 가고 싶었다.
나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있던 철수.
그 놈에게 ‘진심’을 얻어내면 어쩐지 전 삶에서 내가 동경했던 ‘이건’보다는 최소한 한 걸음 더 나은 사람이 될 것 같기에.
툭툭.
철수의 어깨를 두들겨주고는 망설임 없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
전세계 금융의 중심지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닐, 뉴욕 월스트리트.
저마다 오른손에 커피, 왼손에 서류가방을 든 양복 신사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곳.
황인종이 낯설진 않지만, 그렇다고 좋지는 않은 듯, 날 쳐다보는 사람들을 지나,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JB모건과 골드만글러브를 방문하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처음 방문할 장소는 JB모건.
강기태는 제법 긴장한 얼굴이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제법 휘황찬란한 인테리어를 해 놓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전에 연락을 했기에, 일반 창구를 지나 안내를 받은 사무실에 들어가니 날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날 맞이해 준다.
특이하게도 동양인이었다.
“반갑습니다. 청리엔이라고 합니다.”
“아, 중국분이시군요?”
“중국계 미국인입니다.”
JB모건의 배려라면 배려고, 상술이라면 상술이다.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젓고 앉으며 말했다.
“피차 바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예, 약 5억 7천만 달러··· 한화로는 약 4700억을 투자할 계획이시라고요?”
그의 말에 강기태가 스윽,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우리 투자 계획은 이렇습니다. 한데 우리 입맛에 맞는 옵션이 없더군요.”
빠르게 서류를 파악하는 청리엔.
“으음, 이건 엄청난 베팅이군요.”
베팅이라고 말했지만, 돌려까는 것이었다.
바트화가 몰락하지 않으면 결코 행사 할 수 없는 옵션이다. 바트화 폭락, 상대적 달러와 폭등.
그것에 모든것을 거는 옵션이었다.
5억7천만 달러를 들고 있으니 함부로 말하긴 어렵고, 말하지 않자니 또 직업의식에 좀 그렇고.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한바구니에 다 담기는 어렵고, 절반 정도만 우리가 설계한 옵션으로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만.”
“2억8천5백만 달러정도를 말씀이시죠?”
“그래요.”
잠시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저 홀로 결정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말 개인적으로 말씀드립니다만, 이 투자는··· 한 순간에 고객님의 자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뭐, 리스크는 우리가 감당할 몫이죠, JB모건 입장에서는 좋은 일 아닙니까? 공돈 약 3억달러가 생기는데?”
“크흠, 우선 새로운 옵션을 만드는 것은 제가 결정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되도록 빠르게 부탁합니다.”
“예.”
바깥으로 나가는 청리엔의 눈이 빛났다.
겉보기엔 담담하고 제법 프로다운 모습이지만 내 눈엔 보였다.
깊숙하게 숨겨놓고 싶은 탐욕이.
저 놈은 지금 곧 휴지조각이 될 3억달러 가량이 자신의 성과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녀석이 자신의 상사에게 가 할 말이 대충 예상이 되었다.
‘무조건 만들어야 합니다! 이건 그냥 꽁돈이에요!’
대충 그렇게 말할 터.
문제 없이 옵션은 설계가 될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밝은 표정으로 눈을 희번덕 거리며 돌아온 청리엔.
“제가 어떻게든 고객님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는 방안으로 결제를 받아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심지어 수수료 0.5%의 인하까지 허가를 받아 왔습니다. 고객님이 요구하신 옵션은 문제 없이 처리될겁니다.”
“좋네요, 그럼 바로 사인할까요? 좀 바빠서요.”
“그러시죠.”
그가 가져온 서류를 변호사와 강기태가 글자 하나하나 빼먹지 않고 확인했다. 연신 침을 꼴깍 삼키며 서둘러 내가 펜을 놀려 사인 하길 바라는 한 쌍의 눈이 보였다.
우스웠다.
이 옵션이 행사되는 날, 제 모가지를 날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이 놈을 비롯해 이 놈의 상사까지 모가지가 달아날 터.
IMF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재미를 보는 JB모건에게 잽도 한 번 던져주고, 돈도 벌고.
일석이조나 다름없다.
문제는 일회성이라는 것.
이번 태국 일을 시작으로 앞으로 새로운 옵션을 만드는데 큰 어려움이 생길 것이 뻔했다.
가능한 현재 만들어져 있는 옵션들로 최대한 수익실현 방향을 연구해야 할 것 같았다.
투자금을 한 바구니에 담아 꽤 아픈 훅을 날릴 수도 있지만, 굳이 JB모건의 원한까지 사고 싶지 않으니 반절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다.
“대표님, 문제없습니다.”
강기태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자, 한국말을 모를테지만 눈치껏 내게 만년필을 건네는 청리엔.
어서 자신의 보너스를 위해 사인을 해 달라는 무언의 압박.
피식 웃으며 만년필로 일필휘지 사인을 휘갈겼다.
절로 함박웃음을 짓는 그에게 만년필을 건네자 그가 말했다.
“아, 고객님께 드리는 제 작은 선물입니다.”
고가의 만년필이다.
그걸 굳이 내게 선물하고 싶다는 청리엔.
피식 웃으며 만년필을 책상위에 내려 놓았다.
“글쎄요, 이 만년필을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을걸요?”
“예?”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짓는 청리엔을 무시하고 난 자리에서 일어나 JB모건 건물을 빠져나갔다.
골드만글러브로 이동하는 중에 전화를 받았다.
국제전화였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이 놈이, 미국에서 재미가 좋은 모양이구나.
반가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 할아버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네 놈도 참 무심하구나.
“죄송해요,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호석 삼촌이 매일 보고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말씀을 안 드렸네요.”
-됐다, 엎드려 절 받기지.
“하하, 죄송해요.”
-언제 들어 올 생각이냐?
“오늘 뉴욕에서 일 끝나고, 이틀정도 관광후에 귀국할 예정이었습니다.”
-내일 바로 귀국 해.
“예?”
-일이 있다. 네 놈도 참석했으면 싶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내가 참석해야 할 자리가 무엇이기에 할아버지가 이러실까?
“무슨 자린데요?”
-경제인 모임.
“아.”
-이건 그 놈도 올게다.
“예, 최대한 빠르게 귀국하겠습니다.”
-오냐.
전화를 끊고, 난 나도 모르게 웃음지었다.
“재밌네.”
< 제 1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