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5화 (15/458)

< 제 15화. >

미국행이 확정되고, 나는 잠시 여권 발급을 기다리며 대입시험에 대비했다.

목표는 서울대.

전 삶에서도 서울대에 합격했었다.

삼현의 한 사람으로서 ‘대기업’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이건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코피를 쏟아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었다.

대학만 서울대를 나왔느냐, 아니다.

대학생활 내내 ‘언어’공부를 미친듯 했다.

결국 영어, 중국어, 일어를 완벽하게 마스터 했고 원어민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능숙하게 회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게 내가 은혜를 갚는 방식이었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 주인의 편의를 봐주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이번 삶은 ‘부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부리는 사람’이 될 것이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서울대’를 가느냐?

그 곳에 ‘인재’가 많다는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것이다. 나 역시 그곳에 ‘인재’들을 주우러 가야하고, 또 서울대 ‘카르텔’은 생각보다 고지식해서, 자신들과 같은 학벌이 아니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많기에, 굳이 수고로움을 들여 서울대를 가고자 함이었다.

“솔직히 크게 어렵지도 않고.”

정말 크게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없으면 잠을 줄여서라도 공부했던 전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뇌 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보는 교과서는 어색했지만, 곧 적응되었고 묵혀 있던 기억은 날 명석하게 만들어주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할아버지가 내 방 안에 들어왔다.

“아, 할아버지.”

“그래, 공부중이더냐?”

“예, 수능이 코 앞이 잖아요?”

“하루에 다섯시간 이상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지?”

“아 그랬나요?”

할아버지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녀석, 집중력이 좋구나,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뭐, 쉬엄쉬엄 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어디로 가려고?”

“서울대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울대가 그리 헐렁하게 공부해서 갈 수 있는 곳이더냐?”

“글쎄요, 전 될걸요?”

못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럼 시간 좀 있겠구나.”

“예, 많죠.”

“그럼 나갈 채비 하거라, 오늘 갈 곳이 있다.”

“그래요?”

“그래.”

나는 망설임 없이 욕실로 향했다.

오늘은 또 어딜 데려가시려고 하나 궁금했다.

***

차량이 멈춘 곳은 서울의 외곽의 한 요정이었다.

전 삶에서도 왔었던 경험이 있어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전 삶의 미래에서와 같은 인테리어가 묘한 위화감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그곳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넓은 방에 할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누구 만나세요?”

자리에 앉으며 묻는 내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종금사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인물.”

“그래요?”

“이빨 빠진 호랑이지만, 호랑이는 호랑이지.”

누군지 궁금했지만 참았다.

곧 알게 될테니 굳이 묻지 않았다.

10분쯤 흘렀을까?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평한 이목구비, 작은 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얼굴.

“내가 조금 늦었나봅니다.”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받는 인물.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요, 오랜만입니다.”

그가 할아버지 옆에서 인사했던 날 바라본다.

“제 손자놈입니다.”

대통령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손자? 친손자인가요?”

“예, 친손잡니다.”

“흐음, 그래요 반갑습니다.”

“예, 대통령님.”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들기고는 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와 나도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천회장에게 연락이 왔다해서 놀랐습니다. 내가 파란지붕에 들어가고 연락 한 번 없어, 서운했지요?”

“아닙니다. 공사가 다망할테니 그럴 수 있지요.”

“하하, 이해해주니 고맙습니다.”

“예.”

곧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식사가 이어졌다.

시시콜콜한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할아버지도 전혀 급하지 않아 보였다. 다만 조금 어색한 것은 그 누구에게도 존대를 하지 않던 할아버지가 존대를 하기에 놀랐다.

약 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식사가 끝나고, 간단한 술상이 차려졌다.

할아버지가 술주전자를 들어 대통령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여기 이 손자놈을 죽기전에는 볼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요··· 나도 소식은 건너건너 들었습니다.”

대통령이 할아버지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고생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둘이 건배하고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할아버지가 안주 하나를 집어 대통령의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이 손자놈에게, 할애비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젓가락을 움직여 안주를 집으려던 대통령이 멈칫거렸다. 다시 젓가락을 내려놓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나도 올해 칠순입니다. 욕심은 덧 없어요.”

탁.

할아버지가 꽤 세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눈치껏 얌전히 앉아 있었다.

“금융실명제, 저에게 단 한번의 언급도 없이 진행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대통령이 심기가 불편함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기득권들 뒤통수를 칠려면 어쩔 수 없었소.”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물컵으로 사용되는 컵을 대통령 앞에 놓고, 자신 앞에도 놓았다.

주전자를 기울여 자신의 잔을 채우고, 대통령의 잔에도 술을 가득 채웠다.

꿀꺽, 꿀꺽, 꿀꺽 쾅!

단숨에 비워내고 컵이 깨질지도 모를 세기로 상에 내려놓았다.

대통령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지금 ‘매우 화났다.’하는 것을 보여 준다.

“형님한테 이 아우가 언제 한 번 섭섭하게 한적 있소?”

할아버지 입에서 ‘형님’이란 말이 나왔다.

“없지.”

대통령이 대놓고 반말을 내뱉었다.

“금융실명제 때, 제일 피해를 본 놈이 대한민국에 누구인것 같소?”

“자네겠지.”

쿵!

주먹으로 상을 내리치고 말을 잇는 할아버지.

“그런데도 난 형님한테 한 마디 안 했소.”

“쯧.”

“금융 실명제로 내가 날린 돈이 3조요.”

이어진 할아버지의 말에 대통령이 주전자를 뻗어 할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래··· 미안하네.”

그 술도 연거푸 원샷 한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나도 손가락질 받는 일 그만 두고, 멀쩡한 일 하겠소, 손주놈한테 부끄럽지 않은 할애비가 되겠다 이말이오.”

“그래서, 이 노인네를 이리 핍박 하는가?”

“아직 대한민국은 형님 거 아니오?”

“흥, 벌써 이빨 빠질대로 빠진 나야, 금융실명제 그 걸로 기득권들이 아주 이를 갈고 있을걸?”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를 갈긴 무슨, 알음알음 정보를 흘려준걸 내가 모를것 같소? 나 천혁수요!”

대통령이 쾅! 하고 상을 내리쳤다.

“자네 지금 내 앞에서 주름잡나? 호랑이가 이빨만 있어? 앞발도 있어!”

“그래서 부탁하겠다고 이렇게 연락 한 거 아니오?”

“지금 자네 태도가 부탁하는 태도야?”

“애초에 들어줄 생각은 있었소?”

“크흠.”

할아버지와 대통령의 대화에서 놀라운 건, 할아버지가 생각보다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형님’이라 얘길하는 할아버지의 말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이전부터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평생 돈 놀이 하던 놈이오, 다른 욕심 없소, 건전하고 합법적으로 돈 놀이 할거요.”

“자네가?”

“사채를 손 놓고, 금융회사 차려볼 생각이오 이정도는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좀 도와주시오.”

“하··· 놀던 물에 있지 왜 뭍으로 나오려고 하는가?”

“말했잖소? 부끄럽지 않은 할애비가 되겠다고.”

대통령이 온몸 가득 ‘거부의사’를 보여준다.

어째서 할아버지가 양지로 올라오는 걸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술을 홀짝이는 사이, 할아버지가 크게 외쳤다.

“철웅아!”

드르륵 문이 열리고 백철웅이 007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뒤이어 세 명의 검은정장 사내들이 들어왔다.

“네 놈들은 나가 있어!”

대통령의 호통에 사내들이 나가고, 백철웅이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을 열어 대통령에게 보여준다.

“형님도 이제 다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소? 깨끗한 걸로 한장이외다.”

가방 속에는 무기명채권이 가득 들어있었다.

‘한장’이란 말로 미루어보아 1000억인 것 같았다.

“으음.”

가방이 닫히고,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종금사 하나 차릴거요, 나도 국가에 이바지 해, 바깥에서 달라를 벌어 올테니 대한민국에도 손해는 아닐거요.”

“쯧, 알아서 하시게.”

“예.”

할아버지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대통령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풀렸다.

천억.

방금 전까지는 온 몸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하던 대통령이 사르르 녹아버린 액수였다.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오늘 무엇을 봤느냐?”

“음, 대한민국의 윗물은 썩었다?”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옳게 봤구나.”

할아버지는 자신의 일처리 방식을 보여주셨다.

꼭대기까지 썩어 있는 이 대한민국에서 ‘돈’쓰는 법을 제대로 보여주셨다.

“썩었지, 대한민국은 썩었어, 대한민국만 이럴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든, 안 썩었을리가 없으니까.

“썩었으니 돈을 번 것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돈을 번다고들 얘기한다.

그건 결국,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다.

“꼭대기부터 내 편으로 만들어야 일이 편해진단다, 명심하거라.”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냐는 듯 날 빤히 바라보는 할아버지.

“꼭대기를 부리면 더 편하지 않을까요?”

“꼭대기를 부린다?”

“예, 저는 부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부리는 사람이니까요.”

“하하하, 이 놈 갈수록 혓바닥이 기름지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요 할아버지, 삼현의 이건은 분명 꼭대기를 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입 밖으로 생각을 뱉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가 자존심 상해 할 수도 있으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할아버지가 살아왔던 세상은, ‘돈’보다 ‘권력’이 막강하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앞으로는 ‘돈’이 곧 권력이 되는 세상이 찾아올테다.

“네 놈의 세상에서는 꼭대기를 부릴 수 있더냐?”

“안 되면 되게 해야죠.”

“하! 좋은 말이구나, 오냐 지켜보마.”

“예.”

고개를 돌린 할아버지가 철웅에게 말했다.

“철웅아, 종금사 차리는데 관련된 인사들, 내일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라고 일러라.”

“예, 회장님.”

이미 대통령을 구워 삶았으니, 각 부 장차관들이야 쉽겠고, 그 아래에 딸린 여기저기 행정기관들의 장들을 삶아 먹기도 쉬울터.

할아버지는 정말로 한 달 안에 종금사를 차릴 모양이다.

“할아버지.”

“오냐.”

“그런데 금융실명제 때문에 진짜 3조를 날리셨어요?”

할아버지가 입꼬리를 들어올리셨다.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대통령에게 3조를 날렸단 얘기는 ‘거짓’이라는 걸.

***

하루가 멀다 하고, 집으로 각 행정부의 장들이 집을 들락거리니, 도저히 눈치가 보여 집에 있기가 어려웠다.

할아버지가 저리 열심히 일을 하시니, 손자놈 입장에서 발뻗고 공부가 되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며칠동안 전국각지의 ‘천가키즈’들을 보러 다녔다.

그러던 찰나,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둡게 인사하는 아이.

울산에서 할아버지가 직접 데리고 온 철수였다.

“그래, 내가 해보라는 건 다 해봤어?”

“예.”

슥 이면지를 내게 건넨다.

그 이면지에는 연필로 쓴 필기가 잔뜩이다.

“처음 해보는데 어렵지 않디?”

“재밌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논리적인 사고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아이였다.

할아버지는 그걸 알아보고 녀석을 ‘법조인’으로 만들려고 한 것 같은데.

내 눈엔 아니다.

법조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천부적인 재능을 살릴 일이 있어보인다.

“철수야.”

녀석은 배운대로, 철저하게 아랫사람의 자세로 작게 ‘예’하고 대답했다.

“뭐가 되고 싶냐?”

녀석이 고개를 들어올려 날 바라본다.

눈빛 가득 질투가 보였다.

내가 물고 나온 ‘수저’가 부러운 모양.

그래, 한때는 나도 저런 눈으로 이건의 삼남 이재현을 쳐다볼 때가 있었다.

부러움에 시기와 질투를 하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다. 끝내 복종을 택했고 호랑이를 업고 달리며 내가 호랑이인냥 행새했었다.

“판검사를 하라셔서, 판검사가 되려고 합니다.”

“네가 되고 싶은게 판검사고?”

“······”

아직은 어려서 그럴까, 속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붉은색 연기도 마냥 귀여웠다. 동질감 때문에 녀석에게 이런 좋은 마음을 품는게 아니다.

녀석의 재능이 진짜니까, 써먹기 좋으니까.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의 생각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내가 부럽냐?”

“······”

대답하지 못한다.

부러운데, 부럽지 않다고 해야 하는 걸 아는데, 녀석의 자존심이 지금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능력도 없는데 너보다 위에 있어서 화가나니?”

“예, 억울합니다. 지도··· 좋은 집에 태어나가, 하고 싶은 거 하고, 뜻도 펼치고···”

녀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굳이 내 눈을 피하지 않는다.

녀석에게는 내가 고작 두살 위의 ‘형’정도로 보일테다.

“너, 나랑 일 하나 같이하자. 적어도 네 자식들은 ‘나’처럼 살 수 있게 만들어주마.”

저 녀석의 저 건방진 ‘눈빛’도, 몸에서 피워오르는 저 붉은 연기도, 바꾸는데 제법 쏠쏠한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녀석의 동공이 세차게 떨렸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나와 함께하게 될 거라는걸.

녀석이 내게 건넸던 이면지에는 정자로 쓰여진 알파벳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컴퓨터 언어, C언어였다.

< 제 1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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