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4화 (14/458)

< 제 14화. >

항상 옆에 붙어다니던 정호석이 없으니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 대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물이 내 곁을 지켰다. SKY인베스트먼트로 향하는 차 안, 나는 한창 휴가중일 강기태에게 전화했다.

“본부장, 휴가는 재미있습니까?”

-하하, 아뇨··· 뭔가 어색합니다. 돈은 있는데··· 뭐 어디 쓸 때가 없어서.

“벌써 다 꺼냈어요?”

-아뇨··· 당장 쓸 생활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라.

“지금 뭐 하고 계십니까?”

-TV채널 돌려보고 있습니다.

“할게 없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

“댁이 어디시라고 했죠?”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대표님?

원래는 정말 휴가를 줄 생각이었다.

국제정세가 바쁘게 돌아간다고 해도, 세상 모든 일엔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난 먼저 대학에 집중할 생각이었지만, 할아버지가 새해가 밝기 전에 종금사를 만들겠다 호언장담을 하니, 손자 입장에서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기가 눈치가 보이던 참이다.

그래서 굳이, 휴가중인 강기태를 보고자 했다.

“나도 심심해서요.”

-아하하··· 바쁘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4700억을 보고 있으니, 얼른 어디든 투자를 하고 싶어지는군요.”

-그렇죠.

“저녁 전이면, 저녁이나 같이 드시죠?”

-예, 그럼 제가 나가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주소 알려주세요, 태우러가겠습니다.”

얼마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강남의 신축 아파트였다. 전까지 종금사에서 일하던 사람 답게, 제법 미래의 가치가 훌륭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강기태.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예.”

“오늘은 실장님이 안계시네요?”

“예, 공사가 다망해서.”

“하하, 그렇군요.”

“메뉴는 중국집으로 하시죠?”

“좋죠.”

요리 몇개와 제법 맛있어 보이는 간짜장이 나왔다.

“여기 빼갈 하나 주세요.”

내가 먼저 술을 시키자 조금 놀란 모습의 강기태.

내가 아직 미성년자임을 아는 것이다.

“술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나는 안 마시고, 본부장 입이 심심할까봐 시켰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간짜장을 모두 먹고, 안주 삼아 요리를 먹느라 젓가락질이 느려졌을 때, 내가 강기태에게 물었다.

“요즘 동남아 시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폭발적인 성장세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저렇게 생각하고 있을 시기였다.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니, 잠시 주춤한다.

두발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다.

“그렇습니까?”

강기태가 묘하게 빛나는 눈으로 고량주를 한 잔 들이켜고 깐풍기를 씹으며 말했다.

“다음 투자 시장이 동남아입니까?”

역시 제법 성공하는 사람들은 눈치가 좋다.

“우선은요.”

“어디를 보십니까?”

“우선 태국을 보고 있습니다.”

“태국··· 요즘 거품이 꺼지고 있다는 얘기가 루머처럼 떠도는 중이죠.”

“그 쪽에 관심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종금사가 생기면서 세계시장에 관심이 많은 편이죠, 대한민국도 선진국들을 따라하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OECD가입까지 했으니, 더 그렇고요.”

자칭 경제대국이라 부르는 현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이라고 느꼈다.

“8월.”

“예?”

“8월에 태국은 망할겁니다.”

“예에? 망해요? 태국이요?”

잘못들었다는 표정이다.

말도 안된다는 표정인데, 그의 표정 만큼 그의 몸 주변에서 피워오르던 초록색 연기가 일순간 노란빛을 띄었다.

“의심됩니까?”

“아, 음··· 죄송합니다.”

솔직하게 시인을 하는 모습이 오히려 내겐 더 좋아보였다.

“태국이 망한다는 가정하에, 우리가 태국시장에 투자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예상만 정확하다면···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겠죠.”

“그겁니다.”

“대표님이 워낙 공격적인 투자방법을 구사하시니··· 제가 따라가기가 좀 어렵습니다.”

씁쓸한 얼굴의 강기태에게 쪼르륵하고 고량주를 따라주었다.

“이미 한 번의 성과로 믿음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뭐, 내가 계속 본부장을 설득하는 것도 웃긴 노릇이니 본부장이 알아서 신뢰하길 바라야죠.”

“으음.”

나긋나긋하게 자신을 꾸짖으니, 강기태가 몸둘바를 모른다. 고량주를 연거푸 두 잔을 비우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태국이 망한다면, 어떤 형태로 망하게 됩니까?”

“외환위기.”

“외환이요?”

“동남아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결국 수출의존국가 아닙니까?”

“그렇죠···”

“경상수지 적자를 막기 위해, 상대적으로 자국의 통화의 가치를 낮추는 방법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고, 그게 마치 정답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죠.”

강기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맞습니다. 그 부분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상당히 많죠.”

“예, 근데 당장 눈 앞에 경제 성장과 윤택해지는 서민들의 삶을 보고 착각들을 해버립니다. 그들의 걱정과 우려의 시기가 ‘아직은’아니라고.”

“음··· 어쩐지 우리나라도 그런 상황인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역시 본부장, 금방 알아듣는군요.”

“하하··· 어쨌든 돈을 만지는 사람이잖습니까.”

“그렇죠, 본부장은 ‘어음’이란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희한한 관행이죠.”

“관행이다라··· 나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엇이냐는 듯, 잔뜩 궁금해하는 강기태.

“폭탄돌리기.”

“폭탄돌리기요?”

“1금융에서 어음을 발행 받고, 2금융에 가면 어음을 바로 현금화 해주죠.”

“예, 그렇죠.”

“그럼 그 빚은 누가 갚습니까?”

“으음···”

“말도 안되는 ‘신용’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한 곳이라도 삐끗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달리는 말 위에, 승마를 배우지 않고 탑승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으으음···”

강기태가 술도 멈추고, 젓가락질도 멈춘 뒤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불현듯,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대표님, 잠시 전화좀 하겠습니다.”

“예, 편하게 하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의를 표하고, 살짝 몸을 돌려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예, 아버지 저에요··· 아니 지금 바쁘니까, 빠르게 얘기 할게요, 잘 들으세요? 예,예. 앞으로 어음거래는 절대 하지마세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아뇨 아버지! 무슨 관행이에요? 어음거래 하시지 마시라고요! 아들 말 믿고! 예, 꼭입니다 꼭이요!”

민망한지 나를 슬쩍 보더니 다시 이곳 저곳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깐풍기를 즐겼다.

***

같은시각, 천혁수 회장의 이천 별장.

전국각지에서 모인 200명의 사장단.

그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위계질서가 있는지, 가장 가까운 곳에는 명동과 서울 일대의 사장단, 그리고 부산일대의 사장단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장단 모두, 자신들이 모인 것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란 걸 예상했다.

그렇기에 그들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천혁수 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이 되었다.”

““으음!””

“오래전부터 내가 네놈들에게 얘기 했지? 사채시장은 분명 밝은 곳에 올라서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예!””

“이제 그날이 되었어.”

사장단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걱정스러워 하는 사람.

그러나 그들은 감히 천혁수 회장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그들이 가진 돈의 반절 혹은 그 이상은 분명히 천혁수 회장의 돈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채시장의 특성상 ‘주먹’들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각종 범죄조직도 마찬가지.

심지어 정치인, 기업가, 검사, 경찰등 정부 주요 각료들과 내노라하는 대기업과도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니, 천혁수 회장을 배신하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놈들에게 다 내놓으라고 하면 얼씨구나 좋다 하고 내놓을 놈들이 아니라는 것 안다.”

“아닙니다!”

박무성이 크게 외치자, 다른 사장단들도 ‘그럴리가요!’, ‘무조건 따르겠습니다!’와 같은 아부성 짙은 멘트를 날린다.

“됐다, 내가 양지로 올라선다고, 네놈들 전부 양지로 올라서라는게 아니다. 올라가고 싶은 놈들 있고, 남아있고 싶은 놈들 있을테니까.”

곳곳에서 사장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지’로 올라가 ‘합법’적인 일을 한다면 지금의 수익률보다 당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그게 싫었다.

지금도 충분히 권력을 쥐고 있고, 충분히 잘 벌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벌 자신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네놈들 전부, 내 돈 70퍼센트만 뱉어 내.”

3할은 남겨주겠다는 말.

그것은 천혁수 회장이 그들에게 남기는 자비였다.

“당장은 힘들어도, 남은돈 굴려서 돈 벌고, 그러고 남은 3할도 갚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감히 반발은 상상 할 수 없다는 듯, 그들은 기계적으로 ‘예’만 내뱉었다.

“이틀.”

천혁수 회장의 말에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틀을 줄테니, 같이 뭍으로 올라갈 놈들은 따로 얘기를 해, 잘들 생각하고 결정해 ‘강요’는 아니니까 걱정말고, 사채시장에 남아 있겠다고 해도 상관 없어, 나 그렇게 인색한 놈 아니야.”

““예!””

천혁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마지막으로, 내돈 7할, 그거는 일주일 준다 그 안에 들고 와, 저기 백 실장, 정 실장이랑 보고 싶은 놈들은 알아서 버텨보고.”

“며, 명심하겠습니다.”

“꼭 기일안에 올리겠습니다.”

그들은 마치, 백철웅과 정호석을 저승사자보듯 쳐다보았으며, 천혁수 회장은 감히 올려보지도 못할 ‘염라대왕’처럼 보았다.

“멀리서 온 사람도 있을테니까, 오늘은 양껏 먹고 즐기다가 내려가라고.”

호텔 뷔페 부럽지 않은 음식들이, 별장 마당에 가득 깔리고, 곳 테이블들이 여기저기 설치되기 시작했다. ‘하하, 호호’웃으며 음식과 술을 즐기는 테이블은 얼마 없었다.

모두 죽상을 쓰고 있었다.

당장 천혁수 회장의 돈을 회수하고, 거기에 이자까지 붙여줘야 하니 골머리를 싸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들이 ‘돈’을 벌 수 있었던 건, 다 쩐주인 천혁수 회장이 뒷배로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었다.

“철웅아.”

“예, 알아보았느냐?”

“예.”

천혁수 회장이 독한 소주를 들이켜고 말했다.

“그래, 어느놈부터 만나야겠더냐?”

“꼭대기부터 만나는 것이 편하실 것 같습니다.”

“꼭대기라···”

“큰놈으로 한 장 준비하거라.”

“예···”

정호석이 천혁수 회장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아이들도 준비시킬까요?”

천혁수 회장이 위험하지 않겠냐는 물음이었다.

“아니 되었다, 대한민국에 그정도 돈에 안 움직일 놈 없다.”

자신만만한 천혁수 회장의 태도에 철웅과 호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휴대폰을 내려놓은 강기태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닙니다. 잘하셨어요, 어음거래는 위험하죠.”

“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대충 무엇인지 짐작가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태국에 외환위기가 온다는 가정하에 투자를 시작하려면 어떤게 좋겠습니까?”

“역시, 환차이를 이용한 선물옵션이죠.”

“그렇군요.”

역시 저 정도가 한계선일까?

실제로 외인 거대 자본들은 환차이를 이용한 선물옵션으로 더욱 빠르게 아시아 시장을 붕괴시키고 이익을 실현했다.

그들을 욕할 순 없다.

빈정이 상하고 욕을 내 뱉고 싶지만, 결국 약자의 발악이니까, 자본시장은 잃은 놈이 있다면 딴 놈도 있어야하는게 당연한 이치니까.

“풋옵션은 어떻습니까?”

“으음, 또··· 어마어마한 위험성이 있는 투자를 생각하시는겁니까?”

“글쎄요, 확신이 있으니 과연, 어마어마한 위험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다양한 옵션들을 확인해 보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증권사들 말고, 이왕이면 해외 증권사들을 이용하세요 ‘미국’이 가장 적당해 보입니다만.”

“예, 우선 알아보겠습니다.”

“수익을 가장 극대화 할 포트폴리오를 원합니다.”

강기태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쯧, 휴가는 반납해야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뇨, 진짜 제대로 된 휴가를 가셔야죠?”

“예?”

“미국으로.”

“미, 미국이요?”

< 제 14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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