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화. >
할아버지가 픽 하고 웃고는 말했다.
“네 놈이 용이다?”
“그럼요, 4700억을 벌어왔습니다. 현존하는 어떤 인물도 제 나이에 이런일은 못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할아버지.
“그래, 내가 양지로 올라간다면 어찌하면 좋겠더냐?”
“종금사를 만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
“종금사를 욕해놓고, 종금사를 만들라?”
“예, 꼭 필요합니다. 자유로운 투자와 더불어, 할아버지의 모든 자금을 빠르게 ‘달러’화로 바꾸기 더 용이하지요.”
“네 놈이 바라는 것이 그게 전부더냐? 이 할애비가 종금사의 꼭대기에 앉으면 되는 것이야?”
자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염치 없이 할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 손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껏 주시는 것으로도 충분하고요.”
“그건 강영우 놈에게 입은 피해 보상이었지 않느냐?”
뭔가를 더 내어주고 싶은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 재미있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 좋은 정보를 드렸으니, 정보료를 받아야겠지요?”
“하! 처음부터 소원으로 돈을 달라고 하지 그랬느냐?”
알면서도 괜히 내 의중을 떠보려 하는 할아버지.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습니다.”
“크하하하, 쉬우면 재미가 없다?”
“예, 지금도 세상이 너무 쉬운데, 이것보다 더 쉬우라고요? 그럼 재미가 너무 없어서 실증날 것 같은데요?”
“녀석 오만하구나, 대한민국이 휘청이는 이유가 ‘오만’이라더니.”
“그건 능력 없는 것들이 품는 겁니다.”
“네 놈은 다르고?”
“예, 할아버지 손자는 용이니까요.”
피식 웃은 할아버지가 식혜를 한 모금 마시고, 할아버지의 눈이 아닌, 천혁수 회장의 눈을 날 바라보고는 말했다.
“네놈이 내게 넘긴 정보가 얼마짜리더냐.”
“일시불로 끊기엔 부담 되실 것 같으니 약간의 돈과 나중에 할아버지 힘을 한 번 쓰는 것으로 하시죠.”
“약간의 돈?”
“예, 사장단에게 줄 120억 정도만 받겠습니다.”
“내 힘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글쎄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말했다.
“녀석 한번을 속 시원히 얘기하는 법이 없구나··· 종금사를 만드는 일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닐게다.”
“설마요, 출혈은 있겠지만 할아버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맞는 말이니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인다.
“출혈까지 얘기하는 것을 보니, 네 놈이 말한 그 시기가 얼마 안 남은 모양이구나.”
“예, 길어야 1년, 그리고 6개월 뒤면 손쓸 수 없을 겁니다.”
“확신을 하는구나, 네 놈의 분석을 맹신하고 있어.”
분석이 아니라 팩트였지만, 굳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미래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한들 믿기엔 어려울테니까. 묵묵부답으로 있는 나를 힐끗 쳐다본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쯧, 언젠가 양지로 올라설 참이었다. 네 놈 덕분에 그 시기가 조금 빨라지겠구나.”
편안하고 잠잠하던 할아버지의 눈빛이 돌변했다.
세상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 같은 눈으로 백철웅을 불렀다.
“철웅아.”
“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여유자금이 얼마더냐.”
“지금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은 4조원이고, 3일을 주신다면 7조원까지 움직일 수 있으며, 한 달을 주시면 11조원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고작 한달이면 대한민국의 국가예산의 사분의 1과 맞먹는 금액을 움직일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그래, 대한민국 재벌 총수들도 머리를 숙인다는 현금부자다. 이정도 규모가 되니 불법과 합법이 오가는 사채시장에서 규모를 키울 수 있었겠지.
“이천 별장으로 전국 사장단 총집합하라 일러라, 그날이 왔음을 알려.”
“예!”
철웅의 두 눈에 기쁨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예전부터 준비하던 일인 모양이다.
“종금사라, 새 일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겠구나.”
“뭐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웃으며 식혜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그래, 돈 놓고 돈 먹기가 다 거기서 거기지.”
걱정따윈 찾아 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두 눈에서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적어도 ‘돈’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꼭 만들어야 하느냐?”
만들기보다 사오는게 쉽다는 얘기였다.
난 웃으며 말했다.
“그건 할아버지 마음이 흐르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달.”
“예?”
“한 달안에, 내 종금사를 만드마 볼만 할게다.”
겨우 한달만에, 완전히 일어서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시작을 하면 망설임 없이 달려나갈 불같은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신다.
할아버지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하고, 신선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천혁수 회장의 눈빛에서 다시 ‘할아버지’의 눈빛으로 바꾸고는 내게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구나.”
“예, 말씀하세요.”
“왜 내게, 한 번도 삼현을 혼내달라 말하지 않느냐?”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 할애비가 놈들에게 부족할 듯 싶으냐?”
맞다, 솔직히 삼현에게 비비기 어려운 줄 알았다.
그러나 조금전, 철웅에게 할아버지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금 규모를 듣고, 그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삼현을 차지할 순 없어도, 흔들리게 할 순 있으셨고, 적어도 삼현의 기둥인 전자 만큼은 잘만 건드린다면 빼았을 수도 있을 정도의 자금력이었다.
물론 삼현과 정면승부를 벌인다면 이기긴 어려울지 모른다. 서로 피만 흘리고 손해만 입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부족해서 당장 달려 들자고 얘기하지 않은게 아니다.
“아뇨.”
“그럼? 부모 손에 자라지 않아, 부모에대한 정이 없는 것이더냐?”
직설적인 물음에 잠시 가슴 한켠이 아렸다.
“뭐,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할아버지가 제게 ‘부정’을 알려주셨으니, 아마 제 부모님도 저를 끔찍하게 사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어째서, 조무래기 강영우는 처리하고, 삼현은 그대로인게냐?”
꿀꺽, 꿀꺽.
이건을 생각하니 식도에 용암이라도 들어온 것 처럼,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둘러 얼음식혜를 목구멍에 쑤셔 넣어보지만, 여전이 속이 끓는다.
“강영우의 가장 큰 두려움은 역시 ‘목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해 보거라.”
“강영우 그 놈은, ‘자신’밖에 모르는 놈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이 가장 귀하지요, 자신이 잘 먹고 잘 살려고 돈 욕심을 부리던 놈입니다. 그 놈에게 무엇을 빼았아야, 그 놈이 가장 슬프고 분노하고, 좌절하며 절망할까요?”
“그게 목숨이다?”
“예.”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가 물었다.
“하면, 이건이 그놈은?”
“할아버지가 전심전력을 다하신다면, 놈의 목숨을 빼았는건 너무 쉬운 일입니다.”
“맞다. 전심전력을 다 할 필요도 없다. 내 재산의 반의 반절만 써도, 그 놈을 죽이겠다고 달려들 아귀들이 천지사방에 널렸을테니.”
난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의 가장 더러운 세상의 한 부분에서 왕이 된 사람의 말이었으니, 더욱 믿을 수 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는 단순하게 놈을 찢어 죽이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생각하는 ‘복수’가 아닙니다.”
“복수라··· 계속 해 보거라.”
“놈은 자신의 목숨도 중하게 생각하겠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역시 자신의 회사입니다. 이건회장은 이씨 집안의 삼남이었습니다. 그의 아비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고, 싸우고 싸워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그 놈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스러워 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삼남이 가진 회사가 가파르게 성장하고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1등이 되었습니다. 놈은 목숨이 아닌, ‘명성’이 더 중요한 놈입니다.”
“놈의 명성은 ‘삼현’이고?”
“예, 형누이와 싸워서 계열분리를 하고 여기저기 갈라진 삼현을 끝내 최고로 만들어 놓은 놈입니다. 결국 놈의 자부심, 삶의 원동력은 삼현에 있죠, 목숨보다 삼현을 더 중하게 생각 할 겁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내 말 뜻을 이해하신 모양.
“우진이 네놈은··· 녀석의 모든걸 빼았고, 끝내 목숨까지 빼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 알량한 숨, 제가 빼았을 생각은 없습니다. 스스로 끊게 만드는게, 제 목적입니다.”
“네 놈 앞에 무릎을 꿀려야겠단 얘기구나.”
“예.”
“이 할애비 힘을 빌리지 않고, 이왕이면 네 손으로 하고 싶은게고?”
“예, 그 놈이 무릎꿇는 상대가 할아버지가 아닌, 저였으면 합니다.”
어느새 전화를 끝내고 다가온 철웅이, 내 눈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현재 나와 할아버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숨소리도 거슬리지 않게,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느순간 정호석은 자신의 존재감을 완벽히 지우고 있었다. 식혜를 가져오고 나서도 계속 이 자리에 있었을테지만, 전혀 그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할아버지의 든든한 왼팔과 오른팔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철웅에게 손을 뻗었고, 철웅은 품에서 얇은 시가 한대를 꺼내었다.
담배와 같은 굵기의 아주 얇은 시가였다.
담배를 입에 물며 할아버지가 말했다.
“무엇을 정정하느냐?”
“할아버지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는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얼굴에 연기가 닿지 않게, 고개를 살짝 위로 올려 연기를 내뿜고는 말하는 할아버지.
“내 힘을 빌리겠다?”
“정확히는, 할아버지의 인재들을 빌려써야 할 것 같습니다.”
“돈이 아닌 사람?”
“예, 할아버지의 진짜 힘은, 사람일테니까요.”
뿌듯하게 미소짓던 할아버지가 차갑게 말했다.
“우진이 네 애비와, 어미는··· 내게도 가족이었다. 자식잃은 마음과 부모를 잃은 마음, 그 것에 어디 경중이 있겠느냐마는··· 너 만큼, 이 할애비도 마음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무슨 말 뜻인지 알아 들었다.
할아버지는 당장이라도 삼현의 이건 회장을 찢어 죽이고 싶으신거다.
그게 여태껏 할아버지가 살아온 방식이고, 실패를 모르는 방법이었으니까.
여태껏, 내가 할아버지의 손자가 되고 약 6개월의 시간동안, 할아버지는 꾹 참고 있으셨던 것이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죽음에 연관된 모두를 찢어죽이고 싶으나, 내 걱정에 참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오냐.”
“제 방식의 복수가 할아버지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면··· 그땐 할아버지 뜻대로 하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지하경제시장의 왕, 천혁수 회장.
나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복수 했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 손자가 행여나 자신을 원망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왕이, 왕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내 눈치를 보신 것이다.
말로는, 행동으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옛날 ‘아버지’처럼, 지극히도 날 생각하지만 여태껏 표현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넓은 마음으로,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평범한 아버지들처럼, 날 이해해주고 내게 잠시 ‘복수’의 기회를 양보해 주시는거다.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울어라, 할애비 앞이다.”
티가 났을까? 할아버지의 말에 간신히 참고 있는 내가 휘청, 눈물을 쏟을 뻔 했다.
나는 끈어지려는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한글자 한글자 또박 또박 말했다.
“아니요, 모든 걸 끝낼 때 까지, 제 눈에는 피눈물만 흐를겁니다.”
할아버지가 듬직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음이 강철이구나, 강철이야.”
할아버지를 마주보고 있자니, 지금 이 격하게 올라온 감정을 참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저는 냉탕에서 열좀 식히다 가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내가 좀 늦을 듯 하니, 먼저 끼니를 챙기거라.”
“예.”
***
우진이 다시 탕 안으로 들어가고, 천혁수 회장이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으음, 담배 연기가 매워 좋구나.”
정호석과 백철웅은, 주변의 장정들을 물렸다.
어느새 정호석의 두 눈에는 주렁주렁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백철웅도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지만 안간힘으로 참았다.
“네 놈들도 담배 연기가 매운 모양이구나.”
“크흠, 예.”
“예.”
“그래, 오늘은 그래도 된다, 오늘은 그래도 돼.”
천혁수 회장의 말에 둘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우진이 저놈 피가 뜨거운 놈인줄 알았더니··· 시리구나, 아주 차가워.”
백철웅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예, 철혈의 군주가 되실 분입니다.”
“하! 군주는 무슨, 요즘시대에는 재벌이 군주지.”
“예, 철혈의 재벌···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되었다, 네 놈들도 그쯤 하고 냉탕에 열좀 식히고 오거라, 오늘부터 한 동안 여유가 없을 터이니.”
“예!”
“예!”
< 제 1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