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12화 (12/458)

< 제 12화. >

할아버지가 잠시 망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네 놈이 이긴 것으로 해주마.”

몹시 궁금했다.

할아버지의 60억은 어떻게 되었을지, 그러나 할아버지는 끝내 말씀해주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내 고개가 자연스럽게 철웅에게 향했다.

철웅과 눈이 마주치고.

“얼마가 됐습니까? 제가 이겼죠?”

철웅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두분 다 이기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말이냐는 눈으로 바라보니, 그가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선 60억을, 도련님께 투자하셨습니다.”

“예?”

“60억으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인재들을 얻으셨습니다.”

그때 그, 울산의 소년이 떠올랐다.

“그, 철수처럼요?”

“예, 그리고 그 아이들은 지금 교육받고 있습니다. 그 밖에, 사장단에게 도련님이 빌려가신 돈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셨습니다.”

“예에? 아니 왜요?”

“그부분은 저도 확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도련님은 아실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 방 문을 쳐다보았다.

아직은 이 손주가 귀하기만 하신가 보다.

굳이 사장단이 품을 ‘흑심’까지 미리 사전에 차단하신 것이다.

자신이 직접 ‘이자’를 지급해주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내가 할아버지에게 신뢰를 받고 있으니,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경고였을터.

“하여튼, 은근히 츤데레라니까.”

“예?”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사실 오늘 내기의 보상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할아버지가 얘기하실 기분이 아닌모양이다. 급하다면 급하지만, 고작 하루도 기다리지 못할 만큼, 나는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

천우진이 방안으로 들어가고, 철웅이 천혁수 회장의 방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간 철웅이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시가를 손질하는 천혁수 회장에게 다가가 불을 붙여 주었다.

“쓰읍, 후. 4700억을 벌어왔다니 원, 참.”

“대단하신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맞지, 대단해.”

철웅이 뿌듯한 표정으로 웃는다.

“네 놈이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구나.”

“제가 그랬습니까?”

“그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야.”

작게 고개를 끄덕인 철웅이 천혁수 회장을 살폈다.

어쩐지 기쁨보다는 ‘걱정’이 먼저 보이는 모습이었다.

“걱정이 있으십니까 회장님.”

“모난 돌은 정을 맞는 법이지.”

“도련님이 너무 뛰어난게 걱정이십니까?”

시가를 두어번 뻐끔거리다 노을이 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하는 천혁수.

“철웅아.”

“예.”

“나는 정부에 의해 쓰러지는 공룡들과 거인들을 참 많이 보고 살았다.”

“예.”

“나도 바깥 양지의 냄새를 맡고 싶지만 아직도 그러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으음···”

쿵.

의자의 손잡이를 내려친 천혁수가 담담한 분노가 담겨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할때는 오체투지라도 할 것처럼 구는 것들이, 내가 조금만 기지개를 켜겠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 뜯지.”

“······”

“독재정권이 이 땅에 처음 들어섰을 때, 박가 그놈은 내 돈을 끌어다 써 놓고 ‘세금’도 내지 않는 다는 핑계로 이 사채시장의 규모를 축소시켰단다. 심지어 이자도 제한했지, 그 때 네 애비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

“매일, 술을 드시던게 기억납니다.”

“그래······ 벌써 20년도 더 지난 얘기다, 그때보다 더 덩치가 커졌고,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많은 현금을 들고 있는 ‘현금왕’이라고도 불린다지.”

철웅이 자랑스럽다는 듯, 천혁수 회장의 뒤통수를 뜨겁게 바라보았다.

“여태껏 나는, 내 배만 불리지 않았다. 다른 놈들의 배도 같이 불려주었지, 오체투지를 한다면 흔쾌히 돈을 내주며 살았다.”

석양 만큼이나 붉은 불꽃이 천혁수 회장의 두 동공에 활활 타올랐다.

“놈들이 두려워서 돈을 내어 준 것이 아니다. 언젠간 이 시리고 차가운 음지의 생활을 그만두고 청산해야 할 때가 있으리라 생각했지.”

“······”

뒤통수만 보이는데도 천혁수 회장에게서는 이세상 모든것을 집어 삼킬 것 같은 기세가 흘러나와, 철웅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두 귀를 열어 천혁수 회장이 하는 말을 가슴 깊이 새길뿐이었다.

“이제 그 때가 다가왔음을 느끼는구나, 손자놈이 뛰어나 내 그늘을 자꾸만 벗어나려 하니, 이제는 내가 덩치를 키울때가 도래한 모양이다.”

“그곳이 어디든, 숨이 다 할 때까지, 반드시 따라가겠습니다.”

“그래, 든든하구나··· 아마도 손자 놈이 아니었다면··· 나는 ‘현금왕’천혁수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설마’라는 표정으로 천혁수를 바라보는 철웅.

“나도 나이가 들었고 낡았던 모양이다. 그냥 ‘지금’이 좋고 ‘변화’가 두려웠던게야···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뒷방 늙은이처럼 말이다.”

“아직 혈기왕성 하십니다.”

천혁수가 피식 웃으며 시가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이놈, 우진이랑 며칠 일을 같이하더니, 혓바닥에 기름을 칠하고 왔구나, 이 나이에 혈기왕성이라니.”

“그만큼 정정하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

쏴아아아아.

목욕탕 천정에 설치되어 있는 인공폭포에 몸을 맡겼다. 운동이 끝나고 들어가는 사우나는 역시 최고라고 할 만했다.

할아버지가 연세에 비해 건장한 몸으로 사우나 바깥으로 나와 폭포수 쪽으로 걸어오셨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어 드리고, 할아버지도 등으로 폭포수를 맞았다.

할아버지 몸에는 그간의 세월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참 많았다. 대부분이 ‘칼 자국’이라는데 솔직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훈장’이라고 생각한다며 자랑스러워 하시니 나도 동조해 줄 뿐이었다.

탕 바깥으로 나와 샤워 가운을 입고, 여직원이 서빙하는 식혜를 받아 들었다.

“입이 간지러운 모양이구나.”

진즉 눈치채고 계신 할아버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렇게 티가 났어요?”

“그래, 내기에 이겼으니 보상이 있어야겠지 말해보거라.”

식혜를 단숨에 들이켜고 호석을 불렀다.

“정 실장님.”

“예, 도련님.”

“준비한 서류주시고요, 여기 식혜를 아예 말통으로 하나 가져다 주시겠어요? 목이 탈 것 같아서요.”

“예!”

식혜를 한 모금 마신 할아버지가 말했다.

“얼마나 대단한 얘기를 하려고, 미리 목이 탈 것도 준비하느냐.”

“백실장님도 이리 오시죠.”

준비한 서류는 2부였다.

철웅에게 한 부, 할아버지에게 한 부를 건넸다.

“읽으면서 들으시면 더 이해가 쉬울겁니다.”

“오냐, 얘기 해 보거라.”

하루동안 고이 모셔놓았던 투자수익보고서를 다시 꺼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녀석, 또 자랑하고 싶은게냐? 4700억 부자라고?”

“하하, 아뇨, 어떻게 이런 종목으로 돈을 벌었는지도 지금부터 제가 해야 할 말에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그래?”

“예, 굉장히 복잡한 얘기이고, 믿기 어려우실 얘기가 될 겁니다.”

계속 해 보라는 듯, 날 바라보며 식혜를 홀짝이는 할아버지.

“우선 제 소원부터 쓰겠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묻는 할아버지.

“설명을 하고 쓰는게 아니고?”

“예, 소원이 먼저입니다.”

“무엇이냐?”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믿어주실 것, 그게 제 소원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소원들을 빌까 머리가 복잡했는데, 의외로 간단하구나.”

“예, 들어주실거죠?”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는 할아버지.

“우진아.”

“예.”

“이 할애비는 항상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예.”

“네 놈이 가져온 결과가 너무 좋으니, 소원은 들어주겠으나, 아직은 네게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곰곰히 할아버지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아직 내가 바깥에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얼마전부터 계속 같은 뉘앙스의 말을 하고 있으니 아마도 내 생각이 정확할 터.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오냐, 그러면 말 해 보거라 네 소원, 할애비가 손자놈 말을 믿어주는 것 쯤이야.”

알았으니 말해보라는 제스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에 투자한 종목들은 대부분 IT산업에 관련된 선물 옵션들이었습니다. 물론 이왕이면 클렌턴 대통령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곳에 했죠.”

철웅이 순식간에 서류를 넘겨 할아버지에게 종목명을 보여준다. 식혜를 홀짝이며 눈으로 보고서를 확인한 할아버지, 나는 말을 계속 이었다.

“95년도, 대한민국은 마지막 기회를 놓쳤습니다.”

“무슨 말이더냐?”

“반도체 호황, 무진장 잘 팔았단 얘기입니다.”

철웅과 할아버지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96년도. 지금 11월까지 반도체시장의 경제성장률은 오히려 적자라고 보아도 될 정도입니다. 경상수지 230억달러의 적자를 보고 있죠.”

할아버지도 철웅도 전혀 몰랐다는 표정이다.

“할아버지도 모르시는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그 누가 알까요? 반도체 시장의 주류들만 아름아름 알고 있을겁니다.”

“그렇겠구나.”

“95년도가 대한민국 기업들의 구조조정의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구조조정이 모든 경제위기 상황의 해결책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 말은, 썩은 물을 걸러낼 마지막 기회였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워낙 잘팔리니 내년에도 잘팔거란 생각에 썩은물을 지켜보았다?”

“예, 그거죠.”

호석이 내어온 식혜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96년도 반도체 시장이 성장할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더군다나 미국의 IT호황도 겹치는 상황이나, 더욱 긍정적으로 예상했죠.”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또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 할 겁니다. ‘올해는 별로라도 내년엔 괜찮겠지.’”

“그럴듯 하구나.”

“미국은 IT호황 투자유입과 함께, 부실이 커질것을 우려해 연방기금 금리를 인상했습니다. 그것도 94년부터 조금씩 올려왔죠. 원래 3퍼센트였던 금리가 6퍼센트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철웅은 아직 내 얘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달러’가 싸질 것으로 판단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니죠, 미국은 투자를 하면 돈을 버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축통화인 ‘달러’는 나날이 그 가치가 상승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원화’는 제자리 걸음 혹은 가치의 하락을 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으음.”

할아버지가 이제 조금씩 내 얘기가 무엇인지 깨닫고 계신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 대한민국은 ‘종금사’라는 것을 우후죽순 만들어 ‘해외시장’에 투자하고자 했습니다. ‘달러’를 빌려와서요.”

할아버지가 식혜를 비워내고 ‘탁’하고 세게 내려놓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우진이 네 말은 지금 대한민국이 욕심과 자만에 눈이 멀어 나라를 부실하게 만들고 있다는 얘기구나?”

정확했다.

아주 명쾌하고 쉬운 풀이었다.

“맞습니다.”

“대한민국이 망한다는 얘기로 들리는구나.”

“예, 순간이지만 분명 망하게 될 겁니다."

"....."

"더불어 큰 위기가 닥치면, 그 이면에 늘 새로운 도약의 발판과 기회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죠."

"그렇지."

"실제로 미국은 지금 돈이 남아 돌고 있습니다. 이자를 많이 주고, 이자를 많이 받고 있죠, 그만큼 경제가 윤택해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어진 내 말에도 할아버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철웅과 호석은 잘 못 알아들어도, 할아버지는 철썩같이 알아들으셨다.

“여유돈이 있으면 굴리고 싶지, 그리고 자본시장의 특성상 딴 놈이 있으면 잃는 놈이 있는 법이겠고. 그리고 힘이 센 놈은, 약한 자를 괴롭히고 싶어하지.”

역시.

대한민국 사채를 틀어쥐고 있는 현금왕 할아버지는 달라도 달랐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저 멀리에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지금 나도 쉽게 얘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국 결과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미래를 몰랐다면 현재의 지식수준을 가지고 대한민국에 경제위기가 올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해결책은?”

“할아버지가 이제, 양지로 올라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할아버지의 얼굴표정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나는 불쾌해 할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얘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이 아니니까.

“하! 네놈이 지금 이 할애비를 방패로 쓰겠다는 얘기구나?”

역시, 말 뜻의 진의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뻐하는 표정이라니 어쩐지 의아했다.

슬쩍 시야를 옆으로 돌리니 백철웅이 날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철웅과 눈을 맞추더니 이내 입꼬리를 슬쩍 들어올렸다.

“네 놈이 돈을 무진장 벌어 올 것인데, 이 할애비가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나보구나?”

할아버지가 정확히 핵심을 짚으셨다.

“하! 뱀 같은 놈은 삼현의 이건, 그놈 뿐이 아니라 여기 내 앞에도 한 놈이 더 있었구나··· 앞의 ‘경제 위기’에 대한 얘기로 네 놈 능력과 식견을 증명하려 하고, 설득력있게 포장해 놓은 다음, 결국은 나보고 방패가 되어라?”

나는 태연하게 손사래치며 말했다.

“에이~ 할아버지 꿈이 손가락질 받지 않는 일로 ‘돈 버는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죠, 그리고 뱀이라뇨? 할아버지 손자는 용이죠 용, 잠룡.”

< 제 12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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