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화. >
사장단은 한 동안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왕 시작을 했으니 몰아쳐야 할 때.
“내기 받아 들이시겠습니까?”
박무성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강영우 사장의 일은··· 우리는 정말 알지 못했습니다. 그 놈이 그런 음흉한 속내를 속이고 접근을 하는데 우리가 검찰도 아니고 어찌 알았겠습니까?”
완벽한 존대.
이미 그의 마음이 내게 굴복했음이다.
이제 나는 이들에게 스스로를 낮출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저’혹은 ‘제가’라는 말이 필요없다는 얘기였다.
이렇게까지 몰아부쳤으니 이제는 잠시 얼러줄 타이밍이다.
“그래요, 나도 그런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사장님들을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번에 20억을 대출해주시는 것으로 그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가 가져가겠다는 얘기입니다.”
사장단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래의 후계자가 될 나에게 원한을 사서 좋을 것이 없는 건 본인들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20억으로 미래의 원한을 없앤다.
싸게 먹히는 일이라는 걸 이들도 아는거다.
“이기던 지던 그 20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6개월, 딱 6개월 뒤면 다시 사장님들 품으로 돌아갈 돈입니다.”
반쯤 넘어왔다.
박무성의 얼굴도 한 결 편안하게 풀렸다.
“지금 나는 여러분께 큰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합니다.”
내가 스스로를 낮추니 사장단이 더욱 편안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상황에도 흔쾌히 손을 내민 여기 6인의 사장단 여러분을 내가 잊겠습니까?”
내 입에서 구체적이진 않지만, 제법 예쁜 모양의 당근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무서운 말이기도 했다.
살려는 준다는 말 뒤에 잊겠냐는 물음은 그들이 받아들이기에 따라 ‘빌려주지 않으면 잊지 않는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희숙 사장.
강영우의 성형수술을 도왔던 여자가 가장먼저 입을 열었다.
“내어드리겠습니다. 도련님.”
정희숙 사장의 몸뚱이에서 나오던 노란색 연기가 차츰차츰 초록색으로 물들고, 붉은색 연기를 피워올리는 사장단은 없다. 정희숙 사장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노란색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 말은, 어느정도 내게 굴복했음을 의미한다.
박무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예.”
“이곳 사채시장에 암암리에 규칙이란것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천혁수 회장님께서 대한민국 사채시장을 통합하시면서 지금의 사채시장의 사장들은 모두 천혁수 회장님을 쩐주로 모시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이지만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사채시장 피라미드 꼭대기에 근접한 우리들은 특히나 그 ‘규칙’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박무성의 말 뜻을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여러분께 20억을 빌리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는 액수고 회장님의 화를 피할길이 없으니, 살길을 열어달라?”
사장단이 작게 감탄한다.
박무성 또한 마찬가지인듯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회장님의 노기는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확답을 들었으니 되었습니까?”
박무성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다른 사장단도 모두 20억을 내놓겠다는 얘길 꺼냈다.
호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실장님.”
“예, 도련님.”
“직원들 보내서 깨끗한 20억으로 챙겨주세요.”
“예!”
호석이 잠시 뒤로 물러나 전화를 하는 사이, 사장단은 내게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인사하고는 박무성의 사무실을 벗어났다.
박무성과 눈이 마주쳤다.
“도련님.”
“예.”
“진심으로 도련님의 사건··· 강영우 놈의 그 음흉한 술수에 절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저는 천혁수 회장님께 목숨을 구원받은 놈입니다. 한데 감히 회장님을 배신? 제가 아무리 더러운 바닥에서 구르는 놈이라고 해도 그렇게 막장인생은 아닙니다.”
박무성의 몸에서 초록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심임을 난 깨달을 수 있었다. 돈에 대한 욕심은 사실이지만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을 넘보는 야욕가는 아닌 모양이다.
“예, 믿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억은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예.”
***
탕, 소리를 내며 SKY investment 사무실 테이블위에 올려진 007 서류가방.
강기태가 그것이 무엇이냐는 듯 날 바라본다.
“120억입니다. 빨래가 깨끗하게 된 놈이니 바로 달러로 우리 계좌에 입금하세요.”
“아···”
시계와 내가 가져온 돈 가방을 번갈아 쳐다보는 강기태. 120억을 만들어오는데 내게 필요한 시간은 고작 2시간이었다.
“포트폴리오는 완성 되었습니까?”
“예!”
강기태가 자신 있는 얼굴로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과연, 3시간을 말했지만 2시간 안에 완성해놓은 서류는 얼마나 완벽할지 기대가 되었다.
종목명부터 기대수익, 종목을 선택한 이유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투자에 대한 지식이 전문가에 미치지 못하는 내가 보아도 한눈에 알아볼만큼 매우 직관적인 ‘보고서’의 형태였다.
대충 훑기만 해도 아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에 의해 종목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절로 감탄이 나왔달까?
역시 강기태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맞았다.
나는 그에게 ‘확실한 정보’를 주고 강기태는 그 정보를 토대로 고수익을 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만든다.
아주 확실한 ‘캐시카우’가 분명했다.
촤락, 촤락.
서류를 다 넘기고 예상 수익률을 확인했다.
“최소 800퍼센트에서 2200퍼센트. 맞습니까?”
“예, 그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에 절대란 없고 수익률 확신은 없다.
8배와 22배라는 현격한 갭 차이도 그것에서 발생했을 터.
과연, 강기태가 짜온 포트폴리오로 운용하였을 때 얼마가 되어 돌아올지 그의 예상의 범주 안에 든 수익이 맞을지도 기대가 되었다.
당연히 손해는 생각하지 않았다.
클렌턴이 재선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나의 종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종목은 배제되어 있군요?”
“예, 카더라 통신이 많아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판단했습니다. 굳이 위험도를 따지면 극도의 초고위험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거 비중 40퍼센트 넣으세요.”
“······ 확신을 하시는군요.”
“예, 그의 섹스스캔들은 사실입니다.”
“알겠습니다.”
강기태는 두 말 않고 날 믿었다.
잠시 의아한 마음이 생겼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날, 강기태가 붙잡았다.
“저,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본부장.”
“제 연봉을 일시지급 가능하십니까?”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강기태의 눈을 보니 몇 시간전 내가 했던 얘기로 인해 심경에 변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이래서 ‘극도의 초고위험’이란 종목에 비중을 40퍼센트로 넣으라고 해도 ‘알겠다’고 대답한 모양.
“도박··· 그거 저도 해보고싶습니다. 7천만원짜리 인생으로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한다면 더 높은 연봉도 가능할텐데요?”
“아뇨, 그래봤자 월급쟁이의 한계는 명확할 것 같습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포트폴리오가 만족스러웠으니 연봉 일시지급과 더불어 인센티브를 미리 땡겨 드리죠, 1억.”
“가, 감사합니다!”
어쩐지 귓가에 ‘강기태의 충성도가 상승했습니다.’하는 알림음이 들린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호석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벼운 일처리들은 끝냈다.
하지만 진짜 일이 남아있었다.
‘천년묵은 영물 호랑이.’
할아버지 천혁수 회장.
슬쩍 온 몸에 긴장감이 올라온다.
“가시죠.”
“예!”
정호석의 우직한 대답과 함께, 이제는 ‘우리 집’이 되어버린 그곳으로 차량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과연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까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정호석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도련님, 강기태씨가 1억의 인센티브와 7천만원의 연봉을 일시지급 받을 만큼··· 벌써 신뢰를 쌓았습니까?”
정호석의 질문은 ‘함부로 사람을 믿으면 안된다’와 ‘1억7천만원이 적은돈은 아니다’를 포함하고 있었다.
“실장님 눈에는 아직, 그저 그런사람일지 모릅니다만 내 눈에는 제법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까?”
한국의 경제위기 이후, 600배라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린 그는 ‘매국노’타이틀에 결국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고 이후, 포브스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아시아인 101에 뽑히는 사람이 된다.
그러고 나서야 욕했던 사람들도 조금씩 강기태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의 투자기법에 찬사를 쏟아냈었다.
어쨌든, 납득하지 못한 호석에게 난 웃으며 말했다.
“나는 강기태에게 기회를 던졌고 그는 물었습니다. 겨우 인센티브 1억과 연봉의 선지급으로 돈도 아꼈죠, 그가 올해 벌어들일 돈의 인센티브가 어마어마 할 겁니다.”
“확신하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그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죠, 내가 선 지급한 1억이라는 돈이 결코 ‘1억’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겁니다.”
“예?”
“내가 준 1억이 8억일지 22억일지 그건 그의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알고 있는 겁니다. 선 지급 인센티브가 결코 작지 않음을.”
정호석은 어려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는 선지급 인센티브 1억과 일시지급 연봉 7천만원을 ‘은혜’로 생각하게 될 겁니다.”
“은혜요?”
“예, 그러니까 나는 강기태씨의 ‘마음’을 산 겁니다.”
“1억7천으로 마음을 사셨단 얘깁니까?”
“하하, 1억 7천이 아니라 그 8배 혹은 22배가 될지도 모르죠.”
***
끼익.
사이드브레이크를 채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정호석이 서둘러 차량의 문을 열어주었다.
차고의 계단을 오르니 정원이 보이고 그 정원의 중앙 목재 테이블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최대한 밝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부지.”
“이리 앉아라.”
차가운 명령.
온 몸으로 심기가 좋지 않음을 표하고 있었다.
여전히 좋은 표정을 유지하고 할아버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백철웅이 친절하게 내 앞에 놓인 접시 위에 숯불에 바로 구운 스테이크를 올려준다. 이내 가니쉬 몇 개가 더 올라오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먹자.”
“예.”
말 없이 달그락 거리는 식기소리가 요란한 테이블. 철웅은 계속 고기를 구우며 나와 할아버지의 접시에 채워주길 반복했다.
어느새 배가 불러오고, 할아버지가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가글하시더니 포크를 내려 놓으셨다.
나도 배가 불렀기에 포크를 내려 놓았다.
“배는 다 찼느냐?”
“예, 할아버지 맛있었습니다.”
“그래.”
“항상 배가 든든해야 한단다 그래야 다른 것들을 비워낼 수도 있음이다.”
남은 와인마저 비워낸 할아버지가 날 똑바로 쳐다보고는 말했다.
“옛날, 그러니까 벌서 수십년이 지난 그때 이 땅에 일제가 남아있었단다.”
조용히 할아버지의 말을 경청했다.
“당시 배를 곯던 아이가 어디 나 뿐이겠더냐? 하루하루 입에 풀칠이라도 하면 다행인 시대였지, 그 때부터 나는 ‘돈’을 벌어야 함을 깨달았단다. 돈이란 그 귀신같은 놈은 사람의 욕심을 끝도 없이 불러일으켜 조금만 어떻게 하면 더 많아질 것 같고, 조금만 머리를 쓰면 더 크게 벌 수 있을것 같더구나.”
허투루 말을 하는 할아버지가 아니니 들으면서도 계속 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려 노력해야했다.
“처음엔 단순히 돈을 벌어야 배불리 먹을 수 있었기에 돈을 벌었다.”
우선 자신이 ‘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얘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저기 철웅이 나이쯤이 되어서야 배고픔을 잊을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돈’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지··· 옛날엔 그저 ‘배가 부르면 좋겠다’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내가, 어느덧 아귀처럼 ‘돈’만 밝히는 철면피가 되어 있었던게지.”
철웅이 할아버지가 말씀을 길게 하니 그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돈이라는 놈이 얼마나 무서운 ‘요물’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더욱 큰 돈을 벌기가 쉬워지더구나.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규칙’을 정했고, 그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단다. 어느덧 내 규칙은 대한민국 사채시장의 규칙이 되었고, 이제는 그것들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지.”
이제 본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그 규칙을 나의 손자가, 이 천혁수의 핏줄이 깨버렸더구나.”
타오를 듯 뜨거운 눈동자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네 놈을 이렇게 배불리 먹인 이유를 알겠더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할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 제 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