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화. >
내 요구로 인해 며칠간 식탁 위에는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산댁 아주머니만 계시던 것에서 호석아재와 철웅아재가 함께했다.
할아버지도 처음엔 어색해했고 호석아재와 철웅아재의 경우에는 저러다 체하는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어색함을 보였지만 어느새 식사가 끝나고 간단한 다과상과 안주, 차와 술상이 차려지자 그 어색함이 한 풀 사라진 뒤였다.
“자, 이제 얘기 해 보거라.”
심신의 안정을 찾아준다는 자스민차를 몇 모금 호로록 마시고선 할아버지의 말에 대답하듯 말했다.
“우선, 철웅아재와 호석아재의 자기소개부터 듣고 싶습니다.”
“고놈 참.”
할아버지의 말에 멋쩍게 말했다.
“아직 성씨도 몰라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철웅아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백철웅이고 올해 마흔 셋이 되었습니다. 제 부친께서는 도련님의 할아버님, 그러니까 우리 회장님의 든든한 오른팔이셨습니다.”
“무슨 소리야? 오른팔은 우리 아버지지!”
호석아재가 불쑥 끼어들었다.
할아버지는 그 둘의 모습에 피식 웃어버렸다.
“이 놈들이 아직도 서열정리 하는게냐?”
철웅아재와 호석아재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회장님.”
탁주를 한 사발 들이킨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들 두 놈의 부친, 백가놈이랑 정가놈은 내 친우였어! 오른팔, 왼팔 그딴건 없다고 내가 누누히 말 했잖느냐? 두 놈이 가던 날부터 나는 단 하루도 두 놈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할아버지의 말에서 진한 진심이 느껴졌지만 내 눈에는 할아버지의 몸에서 나오는 노란색 연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둘 중 한명을 진짜 오른팔로 생각했거나··· 아니면 친우라고 생각했던 말이 거짓인가?’
뭐가 거짓인지는 모르지만, 진실과 거짓이 복잡하게 섞여있는 것 같았다.
아랫사람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모습. 철웅아재와 호석아재가 눈을 빛내며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할아버지의 눈은 내게 닿아 있었다.
‘보이느냐? 이것이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는 서열정리 하지마, 네들 두 놈도 죽마고우처럼 자라서는 그깟걸로 우애가 상해서야 되겠느냐?”
“예, 회장님.”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치워! 여기서는 백부라고 불러 지금 일하는 시간 아니니까 나는 아들놈들, 손주놈이랑 밥먹고 술마시는거지 아랫놈들이랑 술마시고 밥먹은게 아니야.”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아랫것과는 겸상하지 않는다는 고집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저 말은 적어도 철웅아재와 호석아재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다시 날 바라보며 말하는 할아버지.
“네 놈도 이 자리에서 ‘아재’라는 호칭 쓰지 말고 ‘삼촌’이라는 호칭을 써, 철웅이랑 호석이를 감히 아랫것 다루듯 하지 말란 얘기니까 명심하고!”
날 빤히 바라보는 할아버지.
몸 주위에서 나오는 노란색 연기가 할아버지 말씀의 진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아직은 네 것이 아니다.’
분명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아직 저 둘은 내 사람이 아니니 감히 함부로 하지 말라는 그런 얘기일터.
“네~ 할아버지, 너무 노여워마시고 이 손자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자신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날 살피며 술잔을 들어올리는 할아버지.
술잔 가득 술을 따랐다.
웃으며 철웅과 호석을 바라보았다.
“자~ 우리 삼촌들도 한잔씩 받으시죠?”
굳이 삼촌이란 호칭으로 그들에게 술을 따라주려 하였다.
철웅도, 호석도 어정쩡하게 있었다.
과연 ‘삼촌’으로서 술을 받아야 할지, ‘아랫것’으로 술잔을 받아야할지 할아버지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런 부분에서 내 능력이 돋보인다.
난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할아버지의 의중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으니까.
‘정말 좋은 능력이야.’
피식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조카놈이 주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아요?”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얘기였다.
그제야 철웅이 왼 손을 스윽 뒤로 빼 가슴께에 올려놓는다. 이 정도 예의가 지금 상황에는 시의적절했다.
호석도 철웅을 따라 같은 자세를 취했다.
확실히, 철웅의 부친 ‘백’가놈이라 불린 그 사람이 할아버지의 오른팔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호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석 삼촌 소개도 좀 해주세요.”
“아, 그럴까?”
“네~”
눈치를 보면서 반말을 내뱉었으나 할아버지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그것은 아직은 ‘호석’과 ‘철웅’이 내 사람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사람임을 명심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는 정호석이고, 나이는 철웅이와 같은 마흔 셋, 우리 아버님도 언제나 백부님 곁을 지키시던 분이셨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삼촌들의 가족관계나 담당하는 업무같은 것들도 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호석이 철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 나는 말주변이 영 없어서 철웅이 네가 설명해주는게 좋지 않겠냐?”
철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와 호석이는 어떻게 하다보니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녀석들도 하나같이 짜기라도 했는지 나이가 같아 아들놈들은 18살, 딸내미들은 16살.”
“오, 아들들이 저랑 동갑이네요?”
“하하, 그렇구나.”
“딸들이 삼촌들을 닮진 않았죠? 그러면 큰일인데.”
“큽.”
중간중간 끼어들어 농을 던지곤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었다.
“하여튼, 가족관계는 그렇고 대기업의 전략기획실과 비서실에 대해서 알고 있니?”
“예, 대충은 알고있습니다.”
“그럼 설명이 쉽겠구나 나와 호석이는 그 두가지 일을 다 하는 편이란다. 다만, 나는 대외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고 호석이는 좀 비밀스럽게 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철웅은 칼을 겨누는 일을 하고, 호석은 칼을 찌르는 일을 하는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소개는 이쯤이면 된 것 같고, 이제 본론을 말 해 보거라.”
의중을 샅샅이 꿰뚫어 보겠다는 강렬한 눈빛이다. 나는 최대한 여유로워 보이게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한들, 할아버지는 믿기 어려우실겁니다.”
“어째서냐? 네가 내 핏줄인데?”
“할아버지 눈에는 아직 귀여운 손자일뿐이잖습니까?”
“하하, 글쎄 네 놈이 귀여운 손자놈인지 골치아픈 손자놈인지는 아직 모르겠구나.”
확실히 아직 내 할아버지 천혁수 회장에게 어떠한 ‘신뢰’관계를 형성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제가 오히려 할아버지께 여쭙고 싶습니다. 이 손자가 무엇을 해야 할아버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글쎄···”
내가 어떻게 해야 자신이 기쁠지에 대한 것 까지 맞혀보라는 신호다.
망할 재벌놈들에게 세뇌 받고 교육받은 이 몸뚱이가, 또 이 눈치가 할아버지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었다.
“제게 돈 버는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해드리면 어떨까요?”
***
할아버지의 명으로, 정호석이 내 곁에 붙었다.
철웅이란 인물보다는 차라리 좋았다.
내 일거수일투족은 정호석이란 인물의 입을 통해 할아버지 귀에 들어갈 터, 고지식한 보고는 그만큼 내게 모순되게도 ‘자유도’를 줄테다.
“삼촌.”
“예, 도련님.”
“있는 그대로 보고 하셔도 됩니다. 눈치보지 마세요.”
“아··· 예.”
지금처럼.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정호석은 날 신뢰하진 않는 것 같았다.
그저 할아버지의 핏줄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쳐다보지 않는다.
노란색 연기.
그것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민망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호석.
“도련님, 말씀하신 강기태씨 수배되었습니다.”
그 말에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다.
머릿속에 가득한 미래 정보들을 바탕으로 나 대신 황금 알을 낳아줄 거위를 찾았다 하니 나타난 반응이다.
“그래요? 그럼 바로 보러갈까요?”
“예, 강영우의 사무실로 모시겠습니다.”
할아버지에겐 죄송하지만 난 내기에서 질 자신이 없었다.
문득 어제일이 다시 떠올랐다.
“돈 버는 능력?”
“예, 제게도 할아버지의 피가 흐릅니다. 맨 바닥에서 지금의 부를 이루신 할아버지의 그 뜨거운 피가 제게도 흐르고 있습니다.”
“하! 손수 내 핏줄임을 증명해보이겠다?”
“예.”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푸들푸들 떨린다.
분명 웃고 싶은데 참고 있음이었다.
기분 좋게 탁주를 한 사발 들이켜고는 말한다.
“어떻게 돈을 벌 셈이더냐?”
자스민차를 마치 탁주를 마시듯 벌컥벌컥 마시고는 말했다.
“정답을 알려드리면 재미있겠습니까?”
“망할놈, 아주 할애비 놀리는데 재미가 붙었구나.”
“어차피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입니다 할아버지.”
“오냐, 자신감이 제법이니 내가 기대를 해보마.”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술상위로 탁하니 강영우의 파일철을 꺼내었다.
“그것은 왜 꺼내느냐? 술맛 떨어지게.”
슬쩍 정호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석삼촌, 강영우는 어떻게 됐죠?”
“이제 이 세상엔 없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 놈이 제게 한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겠습니다.”
“뭐라, 보상?”
할아버지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기위해 얼른 탁주를 들이켰다.
“예, 개한테 물렸으니, 주인에게 깽 값을 받아야죠.”
“그 주인이 나고?”
“죽은 개 한테 치료비 내놓으라고 할 순 없잖습니까?”
호석을 바라보며 말하는 할아버지.
“이 놈이 아주 작심을 한 모양이다. 안 그러냐?”
“아주 백부님을 빼다 박았습니다. 명동 사장들이 이 모습을 봤어야하는데··· 아쉽습니다.”
“그러냐? 나를 빼다 박았어?”
“예, 정말입니다. 제 고등학생 시절, 백부님을 보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 했습니다.”
“철웅이도 같은 소리를 하더니··· 내가 젊었을적에 저렇게 막돼먹은 놈이었어?”
“어휴, 백부님이 막돼먹다뇨? 누가 그런소리를 합니까? 세상 무서운 것 없이 대쪽같던 백부님 성품을 꼭 빼닮았다는 얘기였습니다.”
씨익 웃으며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그래서, 네 놈 그 깽값이 얼마더냐?”
침착하게 서류를 하나하나 넘기며 설명했다.
“금고에 있던 현금과 무기명 채권, 금괴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철웅을 힐끗 쳐다보았다.
철웅은 준비라도 해 온 것 처럼 바로 입을 열었다.
“약 60억정도 됩니다 회장님.”
어느새 철웅의 입에서는 ‘백부님’이 아닌 ‘회장님’이란 호칭이 튀어나왔다.
그 말은 지금부터 이것은 공적인 자리라는 선포와 같았으며 할아버지는 오히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예, 뿌려놓았던 채권과 기명채권까지 더한다면 120억이 넘어갑니다.”
“하, 이 놈이 아주 알짜배기만 골라왔다는 소리구나.”
“예.”
눈에서 레이저라도 쏘아질 듯, 강렬하게 날 바라보지만 몸 주변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초록색 연기는 끝 없는 ‘선의’에 가까웠다.
“제법 보는 눈은 있나보구나.”
“할아버지가 반, 제가 반, 아주 공평하지 않습니까?”
“퍽이나 공평하구나.”
“아니죠, 이게 공평하죠! 할아버지는 그 채권들을 받아낼 능력이 있으시고, 저는 없거든요.”
픽 웃으며 말한다.
“오냐, 그래 60억 내어주마, 그 돈으로 너는 얼마를 불려 올 셈이냐?”
“내기 한 번 하시겠습니까?”
“이 놈이, 이 할애비랑 내기를?”
“예, 할아버지 60억이 얼마가 되고, 제 60억이 얼마가 될지요.”
“파하하하하.”
할아버지가 진심으로 크게 웃었다.
말로만 듣던 박장대소와도 차원이 다르다.
‘파안대소.’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언뜻 광기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광소의 끝.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더이상 할아버지가 아닌 맹수의 왕 호랑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보통의 호랑이가 아닌, 천년묵은 영물 호랑이.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철웅과 호석도 긴장한 얼굴이다.
“아주, 아주아주 오래전에 했던 내기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구나··· 내기라, 그래 분명 그런것이 있었지.”
절로 세상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목소리였다.
나도, 호석도, 철웅도 할아버지에게 집중했다.
“옛날 이 사채시장이 우후죽순 생겨날때 피가 너무 진하게 흐르니 사장들끼리 구역과 시장을 가지고 내기를 했지, 그리고 그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모든것을 가졌어.”
몰랐다.
아마 까마득히 먼 과거이고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인듯 싶었다.
“우진아.”
“예.”
“이 할애비는 단 한번도 그 내기에서 져본적이 없단다, 세상 천지에 나보다 돈을 더 잘 불리는 놈은 없었거든.”
“그렇습니까?”
“오냐, 그 내기에 응해주마, 어디 한 번 이 노인네를 이겨먹어 보아라.”
나는 짙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기면 할아버지의 모든것을 갖는 것입니까?”
‘흥! 어딜감히.’하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할아버지.
“형평성이 맞지 않는구나?”
“하면, 제가 진 다면 제 젊음을 할아버지에게 드리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긴다면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네 놈의 소원이 내 전부이더냐?”
“아닙니다. 형평성에 맞는 소원을 빌겠습니다.”
“오냐 그래 해 보자! 철웅이 호석이, 네 놈들이 증인이야 알겠느냐?”
“예! 회장님.”
“예! 회장님!”
할아버지가 제왕의 눈을 하고는 날 바라보며 웃으신다. 나도 그런 할아버지의 눈을 마주보고 웃어보였다.
자신이 없다.
질 자신이.
< 제 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