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4화 (4/458)

< 제 4화. >

“제 놈의 잘못이 알려질 것을 깨닫고 얼굴을 고친 뒤, 새 신분을 파 해외로 도피했을걸로 추정됩니다. 부산과 인천 세관을 통해 현물로 바꾼 재산을 빼돌렸겠죠.”

뿌듯한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끄덕이는 할아버지.

“들었어? 들었냐고 이것들아!”

“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사람들.

“이 어린아이도 아는 짓을 네 놈들이 내 눈을 속이고 도움을 줘? 어떻게 할 거야?”

모두가 덜덜 몸을 떨었는데, 그 중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셋은 특히 그 표정이 거무죽죽하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3일, 3일 내로 강영우 그놈 신변확보해. 여기 앉아 있는 네 놈들 주머니, 그게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것들인지 똑똑히 기억들 하고, 알았어?”

“예!”

밍기적 거리는 그들에게 할아버지의 호통이 다시 터져나왔다.

“뭣들하고 있어! 그렇게 여유있어?”

그제서야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집을 벗어났다.

“철웅아.”

“예, 회장님.”

“애들 다 불러서 저 놈들 하나도 빠짐없이 관리해, 무슨 말인지 알지?”

운전기사 노릇을 하던 인물의 이름이 철웅인가 보다.

“예!”

“네 놈은 저 놈들처럼 실수 하지 마.”

“예!”

“그래.”

“호석아.”

처음 조폭들의 손가락을 부러뜨렸던 사내가 대답했다.

“예, 회장님.”

날 가리키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피식 웃으며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이놈이랑 관계되어 있는 모든 정보 모아오고, 안기부 놈들도 움직이라 그러고, 채널 새로 하나 파서 강영우 그놈 모가지 들고 와.”

“예!”

아무래도 아까의 그 인물들을 믿을 수 없었는지, 자신도 나름대로 손을 쓰려는 모양이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의 행보에 공감했다.

아주 확실한 일처리.

교차검증을 통한 확인은 늘 넘쳐도 부족한 법.

또한, 아랫사람을 쉽게 믿는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 수 있었다.

“며칠간은 집에 있을테니까 철웅이 네 놈도 나가서 일 봐, 나가게 되면 따로 전화 할테니.”

“예! 회장님.”

할아버지의 두 자루의 칼이 완전히 집 밖으로 나가고. 할아버지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 혈액형 검사 결과가 나왔다.”

그 말에 침을 꼴깍 삼키며 절로 긴장되는 심장을 어루만지곤,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내 아들놈과 며느리, 그리고 나까지 모두 O형이다. 네 놈도 O형이더구나.”

한단계를 통과 한 것 같았으나 대한민국 18살의 남아중 O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어디 나 뿐일까? 그저 확률을 조금 좁힌 정도일터.

“당연하죠, 전 할아버지 손자가 맞으니까요.”

“하, 그래.”

내 대답이 어이는 없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은 표정. 주변에 자신을 신처럼 떠받드는 아랫사람들이 없기 때문일까? 조금은 사람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

“아산댁, 시장하군.”

“예, 회장님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있는 듯 없는듯, 어딘가에서 서 있던 아산댁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와 할아버지는 식탁으로 향했다.

식기로 쓰기에는 요란한 그릇들.

누런 것이 놋쇠인가 싶었지만, 내 촉이 말하길 이것은 ‘금’이라고 얘기한다.

표정에서 의중을 읽은 것일까?

“맞다. 금이야.”

“하.”

어이없다는 내 웃음에 피식 웃은 할아버지.

“왜, 욕심나는게냐?”

“아니요? 어차피 언젠가 제것들이 될 것에 미련하게 헛된 욕심을 품겠습니까?”

“뭐라? 네것이 된다?”

“예, 제가 할아버지 유일한 혈육이잖아요?”

“빨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느냐?”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천년만년 사시다가 증손자 고손자까지 보고 가셔야지.”

“뭐라? 하하, 이 놈 혓바닥 놀리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기분이 좋았는지 호탕하게 웃었고 그런 할아버지에게 아산댁이 긴 젓가락으로 산적 하나를 할아버지의 앞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

“어머, 회장님 정말 오랜만에 웃으시네요.”

“음? 무슨소리야? 나 웃음이 많은 사람인데.”

“호호호, 가짜 말고요 진짜배기.”

“하, 내가 그랬어?”

“예, 지금도 그러시잖아요?”

유일하게 아산댁만이 우리 할아버지를 정말 편하게 대한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저 여인의 힘도 적지 않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었다.

“크흠, 군식구 하나 늘었다고 확실히 집에 생기가 도는 것 같구만.”

민망한지 시선을 다른곳에 두고 하는말에 아산댁이 입을 가리고 작게 웃더니 내게도 산적 하나를 내민다.

“회장님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꼭 저녁반찬엔 이게 올라와야 하죠, 전세계 그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는 놈이에요 내가 직접 만드는 거거든.”

“아,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래요, 많이 들어요 한창 먹을 나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왜 안 먹어?”

그런 날 바라보며 묻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드셔야죠?”

“뭐? 그놈 고아로 자랐다더니 잘 배웠구나. 오냐 자, 먹었다 이제 양껏 먹거라.”

“예 잘 먹겠습니다!”

정말 모든 음식이 산해진미라고 불러도 될 만큼 맛있었다. 아주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음식들이었는데, 그 맛이 정말 대단했다.

어쩐지 아산댁이 총애를 받는 이유중에는 이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한 공기를 비워내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가사도우미가 순식간에 밥을 한 공기 더 내왔다.

그리고 그런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조금 전까지 노호성을 터트리던 노인이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 어쩐지 서글픈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손수 젓가락을 들어 산적을 하나 접시로 옮겨드리고는 말했다.

“얼른 잡수세요 할아버지, 한국인은 밥심!”

“그래 먹자, 먹어야 살지.”

그제야 할아버지도 수저를 뜨며 식사를 이어나가셨다.

***

식사가 끝나고 식탁위로 구수한 숭늉이 올라왔다.

“어지간한 차보다 이놈이 제일이지, 자 마시자.”

“예.”

후룹 소리를 내며 따뜻한 숭늉을 한 모금 마시니, 식사로 텁텁해진 입이 한결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이름이 천우진이라고?”

“예, 클 우에 참 진자를 씁니다.”

“그래, 좋은 이름이구나. ‘천’씨는 어떻게 쓰게 되었느냐?”

“보육원 원장님이 ‘천’씨 성을 쓰셨습니다.”

“그렇구나··· 공교롭지만 다행이구나.”

“예.”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고, 할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꿈이 있더냐?”

“예.”

“무엇이냐?”

“세상을 발 아래 두는 것.”

“세상을 발 아래 둔다? 이놈, 꿈이 크구나.”

“못 이룰 꿈이라 생각하십니까?”

진지한 내 눈에 할아버지가 눈을 빛내며 날 바라본다.

“네 놈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예.”

“어째서?”

“할아버지 손자니까요.”

어쩐지 날 바라보는 표정이 뿌듯해 보이는 할아버지.

“곧··· 한국에 위기가 찾아 올 겁니다.”

“뭐라?”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난 말을 이었다.

“하수는 두배를 벌테요, 고수는 열배를 벌겁니다.”

“뭐라? 하, 총명하다가도 이렇게 한번씩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는구나, 그러면 네 놈은 고수니 열배를 벌게 되느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하, 세상을 발 아래 둔다더니 그럼 하수라서 고작 두배더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배기는 돈을 보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도통 무슨 얘기인지.”

“할아버지는 꿈이 있으십니까?”

“있지, 더럽다 손가락질 받는 일 말고 존경받고, 찬양받는 일로 돈을 버는 것.”

어쩐지 단전 깊은 곳부터 올라오는 회한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우습지 않으냐?”

“전혀요.”

“나는 세상이 우습단다.”

“연유를 여쭤도 될까요?”

“내 돈으로 세를 키운 놈들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필요할 땐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 같이 굴던 놈들이 조금만 머리가 크면 날 비아냥 거리며 쳐다 봐, 제 놈들은 깨끗하게 돈을 벌었냐면 그건 또 아니야.”

화가나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숭늉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말을 잇는다.

“정치한다는 놈들 뒷꽁무니에 돈 찌르고, 나랏일 한다는 놈들 주머니에도 두둑히 꽂아 주고,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서민들 등골 빨아 먹어서 부를 쌓는 놈들이 날 손가락질 해, 악성 고리나 뜯는 그런 놈으로 치부하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양지로 가고 싶구나··· 내 노력을 내가 손수 일군 이 부를··· 당당히 떠벌리고 싶구나.”

할아버지의 눈.

까마득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그 눈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억울함’이었다.

난 다짐 하듯 말했다.

“그 꿈, 제가 이뤄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 천혁수가 한참을 날 뚫어지게 쳐다본다.

이내 피식 웃더니 말했다.

“고놈 참··· 오랜만에 이 노인네 가슴을 뛰게 만드는구나.”

기쁨과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할아버지.

내가 어느새 그에게 이렇게 편안한 사람이 되었을까? 호랑이와 같던 맹수는 어디가고 편안한 동네 할아버지가 된 것 같았다.

“입발린 소리라도, 듣기는 좋구나.”

아직은.

아직까지는 고작 ‘입발린 소리’취급이지만, 정말 난 자신 있었다.

곧 대한민국엔 커다란 사건이 찾아올테니까.

더 설명해봤자 어차피 들리지 않을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역정을 내실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아직 어리고, 기회는 많으니까.

진짜 친자 일지도 ‘모른다’라는 가정이 아니라, 모든게 밝혀지면, 그때는 정말 내 말에 귀기울여 주실테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

솔직히 나 스스로는 ‘강영우’가 도피했다는 소식에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 천혁수의 친 손자임을.

***

“아버지 이름도 몰라요 저는··· 할아버지가 천혁수라는 것 밖에는.”

“애비 이름도 모르고, 애미 이름도 모르고 그렇게 살고 있었던게야? 내 핏줄이? 이 천혁수의 핏줄이!”

세상에 호통을 치듯 말하지만 할아버지의 몸 주변으로 초록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주변에 사람이 있어 감정을 모두 드러내진 않았지만, 조부의 눈이 꽤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것으로도 난 충분했다.

진심을 다해 날 생각하는 ‘가족’이란게 생겼음을 의미하니까.

물을 건너간 나와 나의 부모님의 혈액샘플, 그리고 할아버지 천혁수의 혈액샘플과 모발.

그것들은 ‘친손자’임을 증명하는 서류가 되어서 돌아왔다.

현재의 기술은 큰 확률의 오차가 있지만, 할아버지와 내게는 이미 ‘강영우’란 놈의 도피행각으로 무시해도 좋을 확률이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잠시 다른 일부터 처리하실까요?”

내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 할아버지가 내게 보내던 그 따뜻한 눈과는 전혀다르게 모든걸 꿰뚫어 볼 것만 같은 눈으로 장내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우진이 네가 한 번 처리해보거라.”

고작 18살.

그런 나에게 할아버지는 친히 기회를 주신다.

내 아랫사람들이 될 사람들에게 ‘나’를 단단히 각인시켜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할아버지 천혁수 회장님의 정통 후계자 천우진입니다.”

할아버지는 뿌듯한 눈으로 가만히 계셨다.

정통 후계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장내가 쥐 죽은듯 고요했다.

“인사 안 합니까?”

내 말에 가장먼저 나선 것은 할아버지의 두자루의 칼 철웅이란 인물과 호석이란 인물이었다.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도련님!”

“성심을 다 해 모시겠습니다 도련님!”

그제야 ‘사장단’이라 일컫는 사채시장의 거두들이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인사드립니다 도련님!”

각양 각색의 인사지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내가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음이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우고 천천히 사장단의 선두에 무릎 꿇고 있는 놈에게 다가갔다.

사지를 찢어도 결코 가슴속 한 맺힌 분함을 지워낼 수 없게 만들어 준 놈.

날 혈육하나 없는 천애고아로 만들었던 바로 그놈.

“강영우 사장.”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려 날 바라본다.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날 올려다보는 남자.

얼굴은 조금 달라졌지만 저 눈빛은 잊을 수가 없다.

언젠가 보았던 그 눈 그대로다.

“나 알지?”

< 제 4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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