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2 이부 십육장 - 결자해지 (5) (본편 完)
* * *
길었던 전쟁이 끝났다.
혈사 이후 20여 년, 거기서 다시 7년을 더 써서 겨우 끝낸 전쟁이었다.
여느 전쟁이 그렇듯 영웅이 나왔고, 희생자가 나왔다.
대표적인 희생자들은 혈사의 영웅들이었고, 새로운 영웅들은 그 빈자리를 속속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새로운 초월의 무인 둘, 검치 남궁진천과 묵성 목리원의 이름이 중원 강호에 울려퍼진 것이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다녀왔다.”
남궁진천은 안휘로 돌아왔다.
조부 남궁혁, 그리고 동생 남궁소아와 함께.
“다녀왔소이까!”
딸 남궁영이 도도도 뛰어와 남궁진천의 품에 안겼다.
서예가 뒤이어 나타났다.
그녀는 두 사람의 두 번째 결실로 배가 부풀어 있는 상태였다.
“무사히 돌아왔네요.”
“네가 여기 있으니까.”
“어머?”
서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런 낭만적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잠시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고, 이내 남궁진천이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임을 깨달았다.
표정이 그랬다.
심드렁하게 내려앉은 얼굴.
그 바보천치 남궁진천이니 되는 대로 말한 것이겠지.
하지만 좋았다.
그야말로 숨김없는 진심을 전해왔다는 말이니까.
서예는 남궁진천의 귀에 속삭였다.
“밤에 봐요.”
남궁진천은 오소소 등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안정을 취할 시기….”
“안정기.”
“….”
서예는 덜덜 떨리는 남궁진천의 손끝을 봤다.
이렇게 지식이 없어서야.
“농담이에요. 그냥 같이 자고 싶어서.”
하는 짓 하나하나가 귀여웠다.
어느새 기색을 회복한 남궁진천은 말했다.
“…그랬던가.”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
전쟁으로 혼란했던 강호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혈사 때 그랬듯, 완전한 승리가 백도 무림의 기세를 드높였기 때문이다.
출정 전까지 기승을 부리던 흑도는 얌전해졌다.
백련교의 세력은 이젠 찾을래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강호를 떠났다.
맹은 여전히 견궐의 치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이 위명을 앞세워 주춤했던 지역 장악을 다시 해나가기 시작했다.
언제나의 강호.
그 어딘가의 산골에는 네 노인이 모여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우린 이제 어찌 살아야겠더냐.”
마일석이 말했다.
그에 사백운과 염소소, 진건이 순서대로 답했다.
“나는 저 호수 근처에서 낚시나 하며 살려 하오.”
“나는 살곡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슬슬 후계자도 키워야지.”
“큰돈 한번 만졌수다. 실컷 쓰러 가야지.”
마일석은 그들의 답에 푸흐흐 하고 웃었다.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도 참 다사다난한 시기를 살지 않았더냐?”
혈사, 1차 정마대전, 2차 정마대전.
살아오며 치른 대전쟁만 3개다.
강호 여느 시기의 고수들도 이만큼이나 힘겨운 때를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일석의 말에 세 사람이 웃었다.
그리하며 하나같이 답하길.
“지켰으니 되었다. 물려주었으니 떠나야지. 우리도 이제 시대 뒤편의 역사일 테니.”
무림인으로서 족적을 새겼으니 그것이면 되었다고.
다만 그런 의미였다.
마일석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다들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인가.’
어쩌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자신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탓이었다.
마일석은 아직 떠난 목선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텅 빈 가슴 한구석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나 감내해야 할 터.
‘남은 것은 있다.’
목선오의 유산이 있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손주 놈이 있었다.
‘그놈은 뭣하고 있으려나.’
마일석은 회상했다.
-잠시 강호를 떠나겠습니다.
그런 말만 남긴 채로, 당화서와 함께 떠난 목리원을.
*
서역 어딘가에 있는 백련교의 본단은 고요했다.
다만 침잠하게 가라앉았다기보다, 그것은 한없이 낮게 깔린 기쁨이었다.
그럴 수밖에, 교주의 몸을 갉아먹던 천형이 사라지고 잃을 줄로만 알았던 직계가 돌아오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교의 모든 이가 사랑했던 서여령의 유해를 드디어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장례의 엄숙함을 유지하면서도 기쁨에 잠겨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어느 오후였다.
“또 이곳에 있느냐.”
단지선은 정원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던 목리원에게 말했다.
목리원은 그제야 싱긋 웃으며 답했다.
“바람이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소. 아마, 늘상 이런 곳이었겠지.”
이 자리는 단지선의 환각 속에 있던 바로 그 정원이었다.
단지선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다만 그게 전처럼 병적이진 않았는데, 이유는 파마성이 사라지며 그의 몸에 활기가 가득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본이 초절정 상류에 해당하는 고수였다.
이제까지 파마성 탓에 발휘할 수 없었다곤 하나, 근골이 꽤 빼어났던 것이다.
“얼마든지 있어도 좋다. 네가 돌아올 곳은 이곳이니.”
단지선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풀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에서 형제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둘 모두가 알았다.
이런 순간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임을.
입을 연 것은 목리원이었다.
“…장례가 끝나는 대로 떠날 것이오.”
“…그렇더냐.”
“나는 중원인이니까.”
“네 마음이 그곳에 있다면.”
“협사로 살다 죽으려 하오. 온실 속이 아니라.”
“그 또한 너의 길일 테니.”
목리원은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하나, 아직 구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남은 별을 찾아다닐 테지.”
세상엔 별로 고통받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성련의 문주로서 그 책임을 다하려 할 것이다.
그리도 올곧은 마음을 품었으니까.
단지선은 더 붙잡는 게 의미업음을 알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거라.”
“그리 말해주어 고맙소.”
목리원이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당화서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멈칫, 단지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굳어버렸다.
단지선도 마찬가지였다.
“….”
“….”
이제야 단지선의 정체가 다 밝혀진 상황.
두 사람은 어색했다.
아니, 당화서가 일방적으로 단지선을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리 독기 넘치는 눈빛을 쏴댔던 일이 후회로 돌아온 까닭이다.
“아주버….”
“그런 호칭을 허락한 적은 없습니다.”
“….”
솔직한 말로 그랬다.
단지선은 아직 당화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앞서 이른 것처럼, 아버지를 너무 닮아서.
어머니를 닮은 목리원이 저 아버지를 닮은 여인에게 뺨을 붉히고 사랑을 속삭일 것을 생각하면 속에 천불이 다 날 지경.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지 못하는 게 단지선의 유일한 슬픔이었다.
“소저!”
목리원은 그런 목리원의 속마음도 모르고 당화서에게 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화서는 단지선의 눈치를 보다, 이내 그를 외면하곤 목리원의 품에 고개를 박았다.
단지선은 속이 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
초월 너머의 경지에 도달한 이후 목리원에겐 한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선계와의 연결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곤란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끌림에 몸을 맡겼다간 등선, 그것을 애써 저항했다간 자멸이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었다.
목리원은 가만 앉아 호흡을 안정시키는 것만으로도 삼라만상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경이적이며 괴로운 일이었다.
본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알면 망가져버리는 법이니 말이다.
이어 떠오르는 상념.
어쩌면 신선이라는 이들은 인간의 마음을 상실하여 수행만을 쫓게 된 이들이 아닐까.
그러한 고민이 이어진 끝에 내린 결론이 있었다.
‘경지를 봉해야겠구나.’
이 땅에 이 이상의 위협은 없을 터였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봉인을 풀면 그만, 목리원은 드높은 경지의 선인이 아닌, 인간 협객으로 남길 선택했다.
눈을 감고 호흡을 들이마셨다.
전해지는 삼라만상의 정보로부터 스스로를 봉했다.
그리하여 초월로 경지를 낮췄다.
과정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경지의 봉인 또한, 삼라만상 내에 존재하는 일이었기에.
그런 일이 끝나고 나서야 목리원은 백련교를 완전히 떠날 준비를 마쳤다.
“신세 많이 졌소. 형님.”
이젠 그 환영 속 아버지처럼 인자한 얼굴이 된 단지선이 눈앞에 있었다.
미련이 남은 표정이었다.
목리원은 작게 웃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올 것이오. 하나뿐인 혈육이 아니오. 우리는.”
“…항상 기다리마.”
“너무 긴 작별은 하지 않겠소.”
단지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리원은 그런 그에게서 돌아섰다.
환각이 아닌 현실의 백련교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태어난 곳에 추억 한 점을 떨어뜨리곤 입구에 나와있던 당화서와 마주했다.
“오셨습니까.”
당화서가 웃었다.
목리원은 봇짐을 고쳐 매며 말했다.
“형님과는 인사를 나누지 않소?”
“…따로 성의를 표했습니다.”
“음?”
“그보다 가지요. 짐은 다 챙긴 게 맞습니까?”
“그렇소, 필요한 보패나 영약도 몇 개 받았구려.”
“그럼….”
“우리는 약속한 여행을 떠나는 것이지.”
목리원은 당화서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미소는 맑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걸음을 옮겼다.
언젠가, 밝은 미래를 꿈꾸며 그 첫발로 약속했던 것처럼 서역을 향해.
단둘이서 세상을 둘러보기 위해.
묵성 목리원의 이야기는 그렇게 꽤 긴 여정을 새로이 쓰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로서 본편이 끝났습니다.
돌아오는 목요일 종장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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