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1 이부 십육장 - 결자해지 (4)
* * *
묵색의 고리는 은은하게 목리원을 감싸고, 이내 그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이후 피부 위로 실금이 번졌다.
쩌적, 쩌저적―
굳어버린 살점이 떨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잿가루처럼 타들어 가 벗겨져 나갔다.
안으로는 상처를 모두 치유한 뽀얀 피부, 그리고 정광이 깃든 눈이 드러났다.
헤아릴 수 없는 거력이 상쇄돼 스러졌다.
공간을 메우는 것은 아득한 고요였다.
위광천은 눈을 부릅 떴다.
다만 같은 경지에 올랐음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 순간 발악했음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앞서 탈마의 경지에 올랐기에 그 변화를 면밀히 관측할 수 있었다.
아득히 늘어져 쪼개어진 찰나 속에서 위광천은 목리원의 기질이 변한 과정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주마등 속에서 답을 찾은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말이 깨달음으로 치환된 것인가.
…아니, 중요치 않았다.
위광천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것이었군.”
개화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은 경이적이다.
꽃봉오리가 펼쳐지는 순간의 움직임은 섬세하며, 소름이 끼쳐왔다.
기질이 아닌 본질을 바라보기에 초월 이상, 그것에 마(魔)조차 개입할 수 없기에 탈마.
무용하다 느꼈던 것이 껍질을 깨고 나온 순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미있어짐에 위광천은 깨달았다.
이선은 이런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이라는 사실을.
“어찌하였느냐.”
위광천은 물었다.
“무엇을 보았느냐. 무엇이 너를 그리 화려하게 피워냈느냐.”
저릿했다.
세상에 목리원만 남아 존재감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감각이었다.
숨이 틀어막혔고, 터질듯한 해방감이 몰려왔다.
확신할 수 있었다.
등선한다면 목리원과 같은 수준, 그 이상의 적을 만날 수는 있어도 이리 상대의 존재감만으로 온 세상이 채워지는 듯한 감각은 느낄 수 없으리라고.
이것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겪을 수 없을 생사결이라고.
“좋다.”
위광천은 더 말하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목리원은 부드럽게 허공을 그어 공력을 해소했다.
역으로 목리원이 검을 쏘아냈다.
위광천은 해소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부딪쳤다.
꽈아아아앙―!
굉음과 동시에,
쩌어어어엉―!
천마전이 무너져내렸다.
그것을 감싸던 의식과 함께.
*
무를 넘어 의념의 경지, 그것을 다시 넘어 일체의 경지.
목리원은 온 세상이 몸안에 가둬지고 몸이 세상으로 흩어지는 듯한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 있었다.
자칫 정신을 놓았다간 이대로 등선에 들지도 몰랐다.
경지의 수습이 안 되었기에 목리원의 상태는 그리도 아슬아슬했다.
하나, 그것은 위광천도 마찬가지일 터.
다른 점이라곤 그는 이 이후 스스로가 어찌되든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목리원은 타오르는 눈으로 위광천을 응시했다.
검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나있었다.
심검(心劒).
휘두르지 않아도 그것이 상대를 베려 한다면 검이다.
삼라만상이 손에 쥐어진 날붙이였고, 공세를 막는 방패였다.
이기어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극상승의 경지에 있었으나 통제는 그의 몇배로 쉬웠다.
목리원은 심상을 부딪치며 속으로 되뇌었다.
‘생.’
사, 그리고 삶.
몸을 이루는 것은 기억이었다.
경험이었고, 혼백이었다.
아울러 이르길 목리원의 족적은 인간이 강호의 무림인으로서 남기는 삶이었다.
목리원은 그것의 끝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하나, 이 삶의 시련으로 위광천을 마주했다.
위광천은 반대였다.
“네놈을 이기고 넘어간다.”
입으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마음과 마음이 부딪쳐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번 뿐인 생사결이다. 이것이 나를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위광천은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는 응어리져있던 심마를 완전히 떨쳐낸 듯 해방감에 떨고 있었다.
“벽이다. 그렇다면 넘는다. 언제나 그랬듯.”
꽝!
위광천의 패도는 그의 의념에 따라 목리원을 찢어발기려 했다.
아니, 다만 목리원 뿐만 아닌 하늘 너머를 깨부수고자 했다.
목리원은 하나만을 봤다.
위광천을 이기는 것만을 생각했다.
사고가 아득히 멀어진다.
시야는 일점으로 좁혀진다.
그러다 감긴다.
그리하나 위광천만은 느껴진다.
검지 끝이 그리는 궤도는 검무를 따르고 있었다.
목리원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궤도였다.
묵색의 기파가 맥동하듯 퍼진다.
새하얀 별들이 촘촘히 유성우처럼 박힌다.
그것이 증식하고, 폭발하며 위광천을 위협했다.
위광천은 천마기를 운용하여 기파의 씨름을 걸었다.
뭉클 솟은 기파가 하늘 높이 뻗쳐올라갔다.
오감은 의념의 영역에 들어서며 한없이 하찮아졌다.
자웅을 겨루는 것은 오로지 서로의 신념이었다.
수많은 허상의 수, 그 속에 오갔던 더 많은 치명적 공방.
모든 것이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지경의 것이었다.
그렇게 생사결은 끝으로 치달아갔다.
위광천은 주먹을 말아쥐며 앞으로 걸었다.
목리원은 손날을 세우며 앞으로 걸었다.
척!
두 사람이 동시에 기수식을 취했다.
시선이 오갔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한 수.
두 사람은 협의 하에 그런 것을 출수했다.
그 순간 세상은 한없이 정지에 가까워졌다.
두 사람 또한 서로의 수를 정지에 가깝게 봤고, 자신의 수를 정지에 가깝게 뻗어냈다.
부풀어 오르며 부딪치는 것은 역시 심상이었다.
각자의 강호가 충돌하는 것이다.
위광천은 패도를 바랐다.
하늘조차 깨부술 압도적 힘, 그것으로 말미암은 패자의 위계.
목리원은 닥친 시련일 뿐이었다.
적어도 포부의 크기만큼은, 심상의 크기만큼은 목리원의 것이 위광천에게 비할 바 못 되었다.
그러니 승리가 옳았다.
…상대가 목리원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나는 많은 것을 보지 않소. 보지 않았고, 보지 않을 것이오.”
목리원은 그런 의를 보냈다.
동시에 위광천에게 흘려보내는 것은 심상이었다.
목리원의 삶은 언제나 눈앞에 닥친 위기를 이겨내는 삶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제단에서 목선오를 만나지 못했다면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어린 날, 걸왕 마일석의 설득을 받아내지 못했더라면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이후로도 강호에 나와 언제나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며 살얼음판 위를 걸었다.
1차 정마대전 때는 스승의 죽음 앞에 폭주하여 죽을 뻔했고, 돌아온 강호에선 운명의 이끌림을 막지 못했다면 죽었을 것이다.
그 연장선이었다.
목리원은 살아온 삶에서 그랬던 것처럼 눈앞의 위기, 위광천만을 바라봤다.
자신보다 더 큰 의념과 심상을 가졌다 한들, 중요치 않았다.
목리원은 가진 모든 것을 위광천에게 쏟아냈다.
위광천은 가진 것 중 대부분을 목리원의 너머에 쏘아냈다.
낭비였다.
눈앞의 것을 물어뜯는 맹수에게 위대한 이상 따위는 보이지 않을 터이니.
서걱―
위광천의 심상이, 육신이, 마기가 베였다.
그 순간 묵색의 밤하늘이 떠올랐다.
십만대산 전체에.
*
“저것은….”
천마신교의 정문, 하나 둘 깨어나는 무인들은 하나같이 묵색의 밤하늘을 바라봤다.
쏟아져 내릴 것처럼 많은 별이 새겨진 밤하늘은 이들에게 너무 익숙했다.
즉, 저것이 밤하늘이 아닌, 무언가의 기파가 극도로 팽창한 형태라는 것을 이들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홀린 듯 무인들을 하늘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일렁임을, 누군가는 경이를,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희미하게 빛날 줄 밖에 모르는 작은 별들.
이르길 강호, 그것을 띄워낸 것이 개인이니 무인.
누군가가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어두웠으나, 그럼에도 묵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그것은 별이기에.
“…묵성(墨星).”
강호 무림에 떠오른 다섯 번째 별의 이름이 공간을 떠돌았다.
*
혼백이 무너져내리는 감각이었다.
위광천은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숙였다.
상체가 꼭 세상에서 지워져 버린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쿨럭!”
핏물이 입으로 토해져나왔다.
고개를 들었다.
목리원이 있었다.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을 보면서.
“…졌군.”
위광천은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곧장 죽여버릴 걸, 후회를 할까 했으나 영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 순간의 희열은 느끼지 못했을 터이기에.
죽음의 순간에야 삶은 되돌아볼 수 있는 법이었다.
위광천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천살의 업을 타고나 마의 본단으로, 뛰어넘고만 싶었던 벽을 만나 예상치 못한 이유로 좌절을, 그것을 딛고 와 겨우 이 자리.
패배.
총평하여 이선처럼 될 수 없었다.
그를 한없이 우러르고 뛰어넘으려 했으나, 위광천이 걸은 길은 휘청거리는 고난의 길이었다.
반듯한 패도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역시 천마가 아닌 광마가 더 어울렸다.
고작 흉내도 이리 힘들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피식 위광천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이 지경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리 미치광이처럼 날뛰기만 한 길에서 패도를 좇을 수 있다면.
진정한 패도의 이름으로 죽었던 사내를 흉내내어.
“네가 이겼다.”
화르륵―!
삼매진화가 위광천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선 채로 죽음을 맞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화상은 의외로 아프지 않았다.
감각이 이미 마비된 이유인 듯했다.
위광천은 숨이 다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목리원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무엇이?”
“마지막 한 수의 이름.”
목리원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협(俠).”
위광천은 그 단어를 음미했다.
그렇게 재가 되어 스러지기 전 평하니.
“훌륭하다.”
미치광이의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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