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5 이부 십오장 - 형제 (6)
* * *
단지선은 고작 단어 하나에 약에 취한 듯 풀려 있던 정신을 되찾았다.
아니, 되찾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이 미몽 속에서 단지선을 이끌었던 요소 하나가 유독 도드라지게 튀어 오르며 인지를 흐트러뜨린 것일 뿐이었다.
단지선을 ‘형님’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직전까지 낯설게만 느껴지던 중원 복식의 사내가 묘하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익숙해진다 정도가 아니다.
이 남성에게서 어머니와 같은 분위기가, 온기가, 그리고 눈빛이 보였다.
그쯤 단지선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렀다.
새겨진다.
순간에 매몰되어 영영 재회와 이별을 반복하던 정신은 그 다음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여지껏 되감겼던 시간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끝으로 이 사내의 정체를 온전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우선아.”
앳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어린 몸에 가둬져있으니 당연한 일일까.
“우선, 단우선….”
그리 불러보았다.
목리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말했다.
“목리원이오. 형님 말대로 단우선일 수도 있었던.”
너무 차갑지 않게 현실을 일러주는 말은 가슴에 박혔다.
그런 순간이었다.
“말해주지 않은 일을 탓하지는 않겠소. 형님의 판단이 그랬다면 이유가 있겠지. 평생을 떨어져 살아온 나는 형님을 모르오. 우리 이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목리원이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단지선은 시야가 흐릿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목리원이 말했다.
“나가야 하지 않겠소. 꿈은 꿈일 뿐이거늘.”
그랬지.
이곳은 너무 달콤하여 현실을 잊고 싶게 만드는, 또한 너무 서글퍼 나를 잊고 싶게 만드는 꿈이었지.
그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란 얼마나 사나운가.
단지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가서….”
겨우 말문을 열었다.
어째서 그가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자신과의 관계를 알게 되었으며 이곳을 빠져 나갈 방법은 아는지.
그 외에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까지 많은 의문이 있었으나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그럤다.
“…나가서 다 말하겠습니다.”
비밀을 만들어두었던 것을 사죄하는 말이었다.
목리원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
“지선아!”
서여령이 온다.
목리원은 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단지선은 말했다.
“활기찬 분이셨습니다. 정이 많아 조금만 마음을 열면 친절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런 것 같았소.”
“장난기도 많았지요.”
“이미 한 번은 당했소.”
서여령이 코앞에 도착했다.
“이분은?”
“손님입니다. 중원에서 오셨다는군요.”
단지선으로선 적당히 선택한 변명.
하나, 목리원으로선 ‘변함없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성격이 어릴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나보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웃음이 튀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목리원은 포권을 취했다.
“목가라….”
말문이 막혔다.
이게 끝이라면, 다른 이름을 대도 되지 않을까.
흘긋 단지선을 바라봤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락도 끝난 차에 말을 내뱉었다.
“단우선이라 하오.”
서여령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단지선은 말했다.
“아우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단지선의 손이 부푼 서여령의 배에 닿았다.
서여령은 뺨을 맑게 불태우며 말했다.
“그렇구나.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입까지 틀어막으며 호들갑을 떨던 서여령은 이내 웃으며 말을 더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죄송해요. 사실 뱃속의 아이가 남자아이면 그런 이름을 하기로 했어서.”
“소교주에게 들었소. 거 신기한 우연도 다 있구나 싶더구려.”
부드럽게 대화가 넘어간다.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묻는 서여령의 얼굴에는 걱정이 얼핏 자리해 있었다.
목리원은 이번에도 단지선을 바라봤다.
단천화를 막기 위해선 처음부터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있는 게 좋다.
불시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목리원은 고민 후 말했다.
“중원의 혈사를 틈타 도주한 죄인을 찾으러 왔소. 서역으로 도망쳤다는 정황을 찾은지라.”
서여령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단천화와 직접적 연관이 없는 얘기라는 것에 안도하는 걸까.
“죄인이라면 어떤 죄인이죠?”
이어지는 서여령의 질문도 부드럽게 받아냈다.
“아녀자를….”
대화하며 시간을 보낸다.
서여령의 얼굴을 끝으로 가슴에 새긴다.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또한 나를 낳은 사람이라는 것을.
뒤이어 아버지가 나타난 순간도 그랬다.
“지선아! 부인!”
“낭군!”
그가 얼마나 겸손을 아는 사람이며 의로움을 아는 사람인지, 가족으로서 얼마나 울타리 안의 것을 보듬는 일을 진심으로 여기는지 마음에 새겼다.
목리원이 홀로 해내는 이별 준비였다.
만남조차 없었던 이별이라, 그것이 참 묘하다는 생각에 빠져있던 중이었다.
꾸욱―
단지선이 목리원의 옷깃을 잡았다.
신호였다.
‘알고 있소.’
이제 이런 순간도 끝이겠지.
콰아앙―!
폭음과 함께 진동이 인다.
혈기라 불러야 할 것이 피부 위로 닿는다.
서여령의 안색이 새하얘진다. 백련교주의 눈빛은 흔들린다.
목리원은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내 만나는 이들의 끝이 불행은 아닌 것이.
꿈에라도 그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목리원은 검자루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젠 예비할 수 있는 첫 공격을 기다렸다.
직후였다.
캉!
섬전처럼 쏘아져 나간 목리원이 검을 뽑아 들어 마기를 쳐냈다.
검과 검붉은 마기가 격렬하게 드잡이질했고, 이내 묵색과 검붉은색이 얽히며 허공에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틔워냈다.
“무, 무슨!”
“피하시오들.”
목리원은 기수식을 취하며 가족에게 말했다.
흘긋 고개를 돌리니 놀란 얼굴의 두 사람, 아프게 인상을 찌푸린 단지선이 있었다.
목리원은 환히 웃었다.
“마침 내가 찾는 죄인이 왔구려.”
그리 말하자, 세 사람의 숨이 멎었다.
그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목리원은 그 말미에 기대 마지막 인사말을 골랐다.
“반가웠소. 정말로.”
진심으로, 이런 사고가 너무 감사할 정도로.
“당신들을 만나, 참으로 다행이오.”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은 접어두었다.
교주와 서여령은 당황하다, 이내 단지선을 품에 안고 뒤로 물러났다.
“증원을 불러오겠소!”
다만 버리고 가지않겠다는 듯 의로운 말.
목리원은 무시하고 정면을 바라봤다.
단천화가 오고 있었다.
*
목리원은 언젠가 마일석에게 물었다.
-걸왕님! 혈마는 얼마나 강했습니까?
어릴 적의 일이었다.
목선오가 얼마나 대단한 협객인지를 막 들었던 시기.
영웅적인 협객의 대표가 그라는 사실에 목리원은 괜히 뿌듯해했고, 또한 목선오의 이야기를 듣는 일에 심취했다.
마일석은 좋은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때때로 이제와서야 알게 된 과장된 몇몇 비유를 더 해가며 혈사의 끝을 말했다.
-형님은 검초 한 번에 산을 베어내는 기교를 부릴 줄 아신다. 하지만 혈마를 상대할 때는 그리하지 않았지. 그 힘을 온전히 검안에 가두어 혈마에게만 쏟아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우, 우와!
-혈마는 그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그것은 끔찍할 정도의 마기를 몸에 두른 채로 공간 전체에 극독을 뿌린 듯한 광경을 자아낼 때가 있었지. 형님은 고민헀다. 그 공간에서 살아나기기 위해, 혈마를 죽이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지. 그 순간 깨달음이 치밀어 심검(心劍)을 발현했고, 그것으로 마(魔) 자체를 베어내며….
-원아, 저거 다 거짓말이다.
-혀, 형님?!
-아이를 그리 괴롭혀서야 쓰겠느냐.
그날의 목선오는 껄껄 웃었다.
그리하며 말하길,
-그저 끔찍한 강자였다. 다만 마공을 사용해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마기를 발아래두는 고수였지. 그래, 마공으로 초월에 올라 그 다음을 엿보는… 초월 중에서도 끝자락에 있는 고수라 말하는 게 옳겠구나.
-그, 그정도로 고수였다니…! 하면 스승님께선 어떻게 혈마를 이기신 건가요?!
-두려울 정도였으나 도망칠 수는 없었단다.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고.
목리원은 목선오의 목소리에 깃든 결연함을 기억했다.
그가 머리 위로 손을 얹으며 전했던 온기를, 굳은살의 느낌을 기억했다.
-지킬 것이 있는 이는 강하단다. 그렇기에 협객이 강한 것이지.
목선오는 웃으며 가르쳤다.
-원아, 세상 전체를 등 뒤에 두고 적과 맞서는 이를 감히 누가 이길 수 있겠더냐.
그것은 혈마를 이기는 방법이었다.
-협객이 되어라. 그리한다면 누구도 너를 이길 수 없을 터이니.
스릉―
목리원은 검을 고쳐쥐었다.
단천화가 오고 있다.
그 옛날 스승 목선오와 대적했던 중원의 악적이, 자신의 원수가.
“네놈은 무엇이냐.”
그의 물음에 목리원은 입술을 달싹였다.
단우선, 그런 이름으로 그를 베어낼 것인가.
다만 개인의 복수로서 그에게 맞설 것인가.
‘…아니.’
목리원은 웃었다.
그에게 단천화를 이겨낼 이름은 하나였다.
화악!
묵색의 검기가 실처럼 뻗어 검위를 감쌌다.
검사, 그것이 겹겹이 뭉쳐 검환, 이윽고 단단하게 굳어져 별을 칼등 위에 새기니 검강.
시리도록 차갑게 빛나는 묵색의 별이 단천화의 목을 겨냥했다.
“성련문주(星聯門主).”
협(俠), 그런 이름으로.
“당신 목을 가져가도록 하지.”
목리원은 스승의 적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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