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323화 (323/334)

EP.324 이부 십오장 - 형제 (5)

* * *

단우선, 단우선, 단우선.

세 번 속으로 이름을 되뇐 뒤 목리원은 상상했다.

일어날 수 없는 만약으로, 자신이 만약 목리원이 아닌 단우선으로 살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 저기 나오시네요.”

서여령이 환히 웃으며 먼 곳을 바라봤다.

백련교주가 이쪽을 향해오고 있었다.

마침 그림에 필요한 사람 둘이 다 있었다.

본 바로 가정을 소중히 하는 백련교주는 좋은 아버지였겠지. 단지선의 성격으로 미뤄보면, 아이에게 어른에 대한 환상을 심어줄 정도로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터다.

서여령은 맘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어머니였을 터, 단지선을 꼭 안아주던 모습이나 낯선 이를 두고 아이를 먼저 걱정하는 모습,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타인에게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는 점이나 태어나지 않은 자신을 사랑으로 보듬어주는 점까지 모든 것이 그랬다.

형제 사이도 좋았겠지.

단지선이 동생에 대한 기대를 그리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백련교의 정원은 고즈넉하니 아름답다.

낮에는 그곳에서 놀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하루 일을 재잘거리다 잠드는 아이가 아니었을까.

때때로 조금 장난기가 넘쳐 보이는 서여령에게 골탕을 먹지 않을까.

단지선은 그럴 때면 어른인 척 서여령을 혼내려 들었을 것이다.

행복을 그렸다.

다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행복일 것이기에 상상하는 순간이 씁쓸했다.

목리원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이런 형태로나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낭군!”

“부인, 옆의 그분은….”

당혹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며 목리원은 포권을 취했다.

이해받지 못할 감정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중원 무림맹의 목리원이라 하오. 백련교주님이 맞으신지?”

건넨 인사에 아버지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드는 모습이 기꺼운 종류는 아니었다.

티 내지 않으려 했고, 연신 노력하니 이번은 생각보다 쉬웠다.

“내가 백련교주가 맞소. 한데 맹에서 나왔다 함은….”

“예상하시는 바가 맞을 터요. 혈마 단천화. 그에 관한 용건으로 왔소.”

그의 얼굴 위로 참담함이 걸린다.

어딘가의 환영이라 한들, 자신과의 만남이 아버지를 슬프게 만든다는 것은 참 속을 저릿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한들 어찌할까, 이렇게하지 않으면 대화조차 할 수 없는 것을.

“…일단 안으로 드시겠소?”

“환대에 감사하오.”

목리원은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백련교주와의 대담은 전과 같은 양상이었다.

그는 단천화의 혈사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사실상 그 스스로가 잘못한 일은 무엇도 없음에도, 다만 피가 이어진 형제라는 이유로 중원에 고개를 숙인 것이다.

의로운 사람이다.

목리원도 그걸 알 수 있었다.

하여 그의 사과를 사양하였고, 다만 앞으로의 일을 기계적으로 의논했다.

하는 일이라곤, 이곳을 나서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그 얼굴을 깊이 새기는 것뿐이다.

이후조차 마찬가지였다.

콰과광―!

습격이 일었다.

“교주님! 습격입니다!”

교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새하얘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 정원으로 내달렸다.

위기의 상황에서 가족을 먼저 떠올린 것이다.

목리원은 그를 뒤따랐다.

여전히 가슴속의 슬픔은 지워내지 못한 채였다.

그리하여 정원.

“부인! 지선아!”

그의 외침과 동시에,

푸확―!

죽음이 찾아온다.

숨이 틀어막히는 광경이었다.

이를 데 없이 차오르는 증오, 분노 따위의 감정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단천화를 향한다.

하지만 무엇도 더할 수 없다.

“아버지―!”

단지선의 새된 비명과 동시에 세상은 다시 한번 되감김으로.

화악!

목리원은 이번 역시 가족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약 두 번, 목리원은 같은 과정을 더 거쳤다.

이 환영을 깨고 나서는 법을 알게 된 것은 그것보다 더 전, 두 번째 교주의 죽음 이후였음에도 말이다.

“지선아!”

서여령이 정원으로 온다.

단지선과 마주하던 목리원은 다가오는 그녀를 봤다.

속에 얼굴을 새긴다.

그리하다 경계하는 그녀에게 말한다.

“목가라 하오. 중원에서 왔소.”

포권을 취하며 인사, 이후에는 또 같은 일이 일어나겠지.

서여령은 경계심을 품은 채로 자신을 대하다 당화서와의 일을 말하면 곧장 동정심을 느끼며 경계를 거둘 터였다.

그리하면 자신은 그녀의 온기에 기대 사사로운 이야기를 들을 것이고, 백련교주와 대담하다 그의 죽음을 볼 것이다.

‘아마도….’

아니, 확실히.

이 환영을 나서는 방법은 그의 죽음을 막는 것일 터다.

나아가 단지선에겐 무엇보다 끔찍했을 기억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일 터다.

싸우면 된다.

알고도 곧장 행하지 않은 것은 이 순간이 영영 끝날 것이라는 안타까움 탓에.

기껏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가슴에 그것을 새길 말미 정도는 얻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 탓에.

목리원은 같은 일을 반복했고, 세 번의 죽음을 더 목도했다.

푸확!

“아버지!!!”

그렇게 되감겼다.

또 정원이다.

목리원은 어린 단지선과 마주했다.

“누구십니까?”

뽀얀 얼굴로 물어오는 것이 어린 형님이다.

목리원은 깊게 가라앉아 피폐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단지선이 흠칫 몸을 움츠렸다.

아, 기색이 바뀌니 바로 아는 것이구나.

목리원은 쓰게 웃었다.

달싹, 입술을 뻐끔거리다 이내 다물었다.

같은 말을 또 하려다 참은 것이었다.

‘여기서 또 같은 일을 반복했다간 영영 나갈 수 없을 터다.’

겸허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아마, 되감기는 회차가 많아질수록 나가는 일은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매몰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지.

하나만 더, 하나만 더, 그런 마음이 이들을 향한 집착을 더욱 키우기만 할 것 아닌가.

끔찍한 환영이었다.

비극이 예정되어있음을 알면서도 그걸 막지 않게 만든다.

그렇게라도 안주하게만 만든다.

목리원은 언젠가 일운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집착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수용하여 무던해질 뿐이지요.

되묻고 싶었다.

이 순간이 끝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산다면, 그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이냐고.

찰나의 행복과 불행에 얼마나 더 허우적대야 무던해질 수 있는 것이냐고.

물론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분명 이것은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목리원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늘을 봤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여 밉살스러웠다.

결심을 세우는 일은 겨우였다.

‘그만두거라.’

스스로에게 말했다.

붙잡을 수 없는 과거에 저를 묶어두지 않기 위하여 그리했다.

일운처럼 무뎌지는 법은 모른다.

하나, 목리원은 나아가는 법을 알았다.

너무나 사랑하는 이에게 그것을 배웠다.

-원아.

‘예, 스승님.’

-협객이라 함은….

…구태여 가장 어려운 길을 걷는 사람이겠지요.

“이, 이보십시오.”

단지선이 겨우 용기 내 한마디를 건넸다.

목리원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미안하오. 생각할 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길로 스스로를 몰아넣는 것이 곧 협객일진저, 목리원은 그리 따르기로 했다.

이별이 어렵다면 이별을 따를 터였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망설임은 지울 요량이었다.

다만, 속에 품은 말을 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일 것만 같아서 그에게 일렀다.

“이 못된 사람을 보았나.”

“무, 무슨 소립니까…?”

“침묵이 어찌 좋은 답이라 생각하오. 진심은 부딪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법인데.”

너무 야박하게 홀로 다 짊어지려고 한 것이 그를 그리도 피폐한 꼴로 만든 게 아닐까.

“언제까지 꿈속에 있을 작정이오.”

단지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처음, 목리원에게도 그가 자신이 아는 단지선과는 다르리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가 어린아이를 연기하고 있다 가정하는 것이 더 힘들지 않던가.

하나 상황이 이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선의 꿈일진대, 그가 이 소년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꿈에 왜 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하여 나온 결론이 그러했다.

“그만 일어나시오. 잠꼬대는 그만하고.”

그 또한 매몰된 것일 뿐일 터였다.

꿈속 어느 시간대에 표류하여 스스로를 잃어버린 것이겠지.

실제로 겪어보았기에 아는 것이다.

목리원도 스스로 이 굴레를 끊어내지 않았다면, 여전한 미련 속에서 같은 일을 반복했다면 중원 무림맹의 전령 목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단지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뒷걸음질 쳤고, 목리원은 어깨를 더욱 붙들어 매어 그를 붙잡았다.

눈을 마주했다.

목리원이 마주한 단지선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무엇을 향한 두려움인지를 어찌 모를까.

그리던 순간에서 벗어나는 것은 끔찍하리만치 괴롭겠지.

그 끝이 비극이더라도 안주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목리원은 한마디를 했다.

“형님, 내가 당신을 그리 부를 수 있게 해주시오. 꿈이 아닌 나를 봐주시오.”

씁쓸히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조금씩 단지선의 눈가가 일그러지니.

“형…님?”

아주 천천히, 그가 미몽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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