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3 이부 십오장 - 형제 (4)
* * *
그 순간 사고와 시간이 모두 멎는 감각이었다.
외면하려고도 해봤고 부정하려고도 해봤고 결국 수용하게 되었던, 그리하여 없는 것으로 치부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목리원이 냉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입술을 벙긋거리며 세 사람을 바라본다.
대체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저 여인이 서여령, 모친이 맞다면 단지선은 왜 그 사실을 숨긴 것인가.
아니, 왜 자신과 그가 형제라는 것을 숨긴 것인가.
혼란이 차오른다.
해소될 수 없는 의문은 이윽고 답답함이 되어 가슴을 꽉 죄어온다.
그런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주 갑작스럽게, 또한 끔찍한 형태로 쏘아졌다.
푸확!
“크헉…?”
저 먼 거리에서 쏘아져온 것은 새빨갛고 끈적한 기파였다.
교주가 인식하지 못한 속도.
아니, 목리원조차 인식하지 못할 속도로 쏘아져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단지선의 얼굴 위로 피가 튀었다.
동공이 확장된다.
그 곁의 서여령은 안색이 하얗게 죽어버린다.
목리원 또한 멍한 상태였다.
현실감이 없었다.
하여 삐걱삐걱 고개가 돌아갔고, 그 끝에서 봤다.
“찾았군.”
봉두난발,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혈기를 줄줄 흘리는 광인.
소개조차 필요없었다.
“단천화…?”
그가 바로 혈천교의 주인, 혈마 단천화일 터였다.
거꾸로 피가 확 솟구치는 기분이다.
목리원은 이런 분노를 겪은 일이 목선오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천살성이 드물게 날뛰었다.
이리 통제를 벗어나는 살심이 깃드는 것 또한, 목선오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하나, 그의 검이 뽑히는 일은 없었다.
화아아악―!
문득 뒤집힌 시야가 그의 출수를 막았기에.
어지러워지는 정신이 천살성을 붙잡고, 막혀오는 숨이 움직임을 붙들었기에.
‘이건…!’
그렇게 새까맣게 눈앞이 가려진 후였다.
“누구십니까?”
목리원은 되돌아와 있었다.
이곳에 들어와, 처음 단지선을 만난 순간으로.
*
너무 갑작스러운 변화라 적응이 쉽지 않았다.
아직 감정은 백련교주… 부친의 가슴을 꿰뚫는 순간에 있는데 몸은 이미 다른 순간에 와있으니 당연하다.
“중원에서 오셨습니까?”
단지선이 미간을 좁히며 물어왔다.
목리원은 마른 세수를 했다.
‘진정….’
진정하자.
그래, 이곳은 환영이었다.
단지선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이고 어떠한 목적을 위해 지어진 공간인 만큼 이런 현상도 있을 법하다.
왜, 그런 의문은 무의미한 것이다.
‘같은 시간대를 반복하는 환영. 꽤 익숙하다.’
아닌 말로 진법이라는 것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정신 붕괴의 술수 중 하나다.
제갈산에게도 들은 바가 있어 잘 알았다.
의식이라 하나, 진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전인 만큼 탈출법도 아는 범주 내에 있으리라.
‘역린을 깨부수면 되는 것이지.’
본디 마음을 헤집는 진법이라 함은 그 원인을 헤쳐 나감으로서 이겨낼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이라 해서 무에 다를까.
더군다나 목적이 꽤 분명하게 눈앞에 있었다.
‘…혈마.’
혈마 단천화.
그를 이겨내는 것이 목표겠지.
목리원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몸의 감각을 되찾았다.
천살성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후우, 깊은 숨을 내쉬며 단지선을 바라봤다.
앳된 얼굴.
이제야 다시 말하길 형제의 어린 시절.
목리원은 그 사실이 참 어색하고 야속하게 다가와 빤히 단지선을 노려봤다.
“뭐, 뭡니까…?”
단지선이 움찔한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 어린아이한테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짜 단지선도 아닌 듯 보였다.
진짜라면 이런 어린아이같은 모습은 하지 않았을 테니.
목리원이 알기로 진법에 사람의 정신 연령을 낮추는 기능 따윈 없었다.
“…아니다. 미안하구나. 내 잠시 생각할 일이 있어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자 단지선이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여기선 그 변명을 사용해야겠지.
“…나는 중원에서 온 목가라 한단다. 백련교에 긴히 전할 말이 있어 왔건만, 혹 안내를 부탁할 수 있겠느냐?”
“여, 역시!”
단지선의 눈이 반짝였다.
하기야 예상이 맞아 떨어졌다니 기쁘겠지.
단지선은 크흠! 헛기침하며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당장 내전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근엄한 척 걷지만 아장아장 걷는 걸음이다.
목리원은 흐린 미소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겨우 인식하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인데, 그가 혈육이라 생각하니 왜인지 다르게만 보였다.
이제야 단지선이 자신에게 그리도 친절했던 이유를 깨닫는 참이었다.
‘진실을 숨긴 이유는….’
돌아가서 들으면 될 일이겠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지선아?”
벌써인가.
목리원은 고개를 돌렸다.
서여령, 만삭의… 그러니까 자신을 뱃속에 품은 모친이 그곳에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낯설다.
타인일 때보다 그녀가 더욱 어렵게 느껴졌다.
“옆에 있는 분은…?”
환각인 것을 알면서도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감정이란 게 참 쉽지가 않았다.
목리원은 무너져내리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포권을 취했다.
“…중원에서 온 목가라 합니다. 백도 무림맹의 일로 교를 방문했을진대, 혹 교주를 뵐 수 있겠습니까?”
서여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반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어물쩡대던 전과 달리 목적을 바로 말하니 경계가 조금은 옅어진 기분이었다.
“…중원 무림맹 말인가요.”
서여령의 미간이 곱게 찌푸려졌다.
그 순간에야 목리원은 왜 이렇게까지 그녀의 얼굴에서 기시감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를 닮았구나.’
정확히는, 자신이 모친을 닮아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면 생기는 주름이 그랬다.
당화서가 이 일에 관하여 말을 해주었기에 아는 사실이었다.
-아십니까? 소협은 인상을 찌푸릴 때면 미간에 내 천(川)자에 가로줄 하나가 더 그어진 주름이 생깁니다.
그 말이 신기해 동경을 봤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것이 서여령에게도 나타나고 있으니 이젠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다.
진짜 모친이었다.
두개골로만 봤던 유해가 아닌, 살아 숨쉬는 모친.
“…이쪽으로 오시지요.”
서여령이 목리원보다 한발 앞서 걸었다.
목리원의 시선은 절로 그녀의 배를 향했다.
자신이 저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던 까닭이다.
기억하는 첫 순간은 목선오의 품 속이었다.
신선처럼 웃던 스승의 모습 이전에 저런 순간이 있음을 되새기며 태동의 때를 기억에 새긴다.
한데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걸까.
“…만삭입니다. 걸음걸이가 느려서 문제라면….”
“아, 아니오! 그런 것이…!”
목리원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차, 그제야 자신이 외인의 입장을 하고 있음을 목리원은 이해했다.
“…그저 아이가 궁금하여.”
“생전 처음보는 사이가 아닌가요?”
“…아이를 좋아하는 편이오.”
“흐음….”
이 순간 당화서를 팔면 너무 나쁜 사람일까.
생각하면서도 입은 절로 움직였다.
“혼인을 약조한 사람이 있소. 전쟁이 끝나면 식을 올리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불임이오. 그런 이유인 듯하오.”
서여령에게 서려 있는 경계가 걷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비겁하게도 결국 당화서를 팔아버린 것이다.
환각이니 용서해주길.
그리 속으로 사죄한 순간이었다.
“아…!”
서여령이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듯 크게 뜨인 눈, 이어서 동정을 담기 시작하는 눈빛과 흩어진 경계심.
“?”
“그런 일이….”
문득 생각하게 되고 만다.
‘경계가 이렇게 쉽게 풀려도 되는 것이오?’
모친의 경계심이 너무 허술한 것 아닌가.
떨떠름함이 이는 순간이었다.
“참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어요!”
탁!
서여령이 손을 붙잡아왔다.
와중 놀라운 점이라면 그녀가 다가오는 동작을 곧장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무재가 모친에게서 온 것이었군.’
다만 천살성에 의한 무재가 아니란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걸까.
목리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뭐가 됐든 잘 풀렸다는 생각에.
*
“아직 교주님께선 회의에 참석 중이신지라.”
첫 번째보다 빠른 이동과 조우였기에 회의가 덜 끝난 듯하다.
목리원은 서여령과 이야기를 나눌 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주로 단지선과 뱃속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후후 웃는 미소는 역시, 기시감이 일 정도로 자신과 닮아 있었다.
“지선이는 어서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죠. 보셨다시피 그리 철이 없는데도 말이에요. 동생이 생긴 뒤론 더해졌죠.”
서여령이 부른 배를 쓸었다.
목리원의 시선도 절로 그곳을 향했다.
“남동생이면 좋겠다고 얼마나 노래를 부르는지. 저는 딸아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랬소?”
“네.”
하고 답한 서여령이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조금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뱃속의 아이는 특별한 운명을 타고 났답니다.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될 거예요. 하늘이 그리 점지해주었으니까요.”
희게 웃는 미소에 목리원의 주먹이 꽉 쥐여졌다.
얘써 웃으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지금 표정이 어떨까.
만약, 정말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자신은 그 앞에서 떳떳할 수 있었을까.
괜히 슬픈 기분을 억누르며, 목리원은 말을 돌렸다.
“…자랑스럽겠구려.”
“아기때는 고생 좀 하겠지만요.”
서여령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사내 아이일 것 같아요. 느낌이 그래.”
톡톡, 서여령이 검지로 배를 두드렸다.
“단우선, 사내 아이라면 그런 이름이랍니다.”
목리원은 이날, 자신이 본래 받았어야 했을 이름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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