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318화 (318/334)

EP.319 이부 십사장 - 침입, 격전 (5)

* * *

일운은 조금은 멀어진 과거의 일을 되새겼다.

16세의 용봉지회 때였다.

-무당의 현공이라 합니다.

그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신선을 연상케 하는 허허로운 사내였다.

미소는 옅었고, 피부나 몸은 새하얬으며, 또한 공력은 극도로 안정된 상태였다.

불문에 몸담은 제자로서 도가 계열 문파의 선두에 서있다 평해지는 무당은 불편하다.

일운 또한 나고 자라며 그랬고,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싸워보고 싶다.’

무학을 통해 이해해보고 싶다고.

친우가 되어보고 싶다고.

아직은 어렸던 일운은 지금보다 혈기가 강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표하는 법으로 주먹질을 꼽았고, 현공은 꽤 그에 잘 어울리는 상대였다.

무심코 생각하길, 어쩌면 몸담은 문파와 별개로 그와는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이야기였다.

스릉―

한때 선룡 현공이라 불렸고, 문파를 배신해 마룡 사마공이라는 이름을 떨친 적이 검을 뽑는다.

그날의 허허로운 미소는 간데없고 깊게 가라앉은 살의만이 그의 얼굴 위로 잔뜩 묻어나 있었다.

“지긋지긋하군. 예까지 쫓아왔나.”

검신이 붉다. 특이한 철을 쓴 듯하다.

일운은 잠시 생각했고, 이내 검의 간격, 사마공의 제공권과 그가 사용할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감상은 영 줄어들질 않는다.

“묻겠습니다.”

“무엇을?”

“왜 배신하였습니까?”

일운의 목소리엔 노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수한 의문과도 같은 기색으로 화했다.

“그게 궁금한가?”

사마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일운은 웃었다.

“무당이 당신을 해하였습니까?”

“….”

“다시 이 마기가 득실거리는 땅으로 돌아와야 했을 정도로 그들이 미웠습니까?”

“….”

“무당으로는 모자랐습니까? 백도는 당신을 담을 수 없었습니까? 그도 아니면….”

잠시 말을 멈춘 일운은, 어느새 얼굴 위로 슬픈 기색을 띠며 말했다.

“…혹여 간자라는 것이 들켜, 그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싫었던 것은 아닐는지요.”

그저 바람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한때 그리 자신을 패배감에 휩싸이게 했던 적수가, 언젠가는 꼭 넘어보고 싶었던 사내가 자신과 같은 길을 바라봤길 바라는 마음.

화아아악!

사마공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넘실거리는 검붉은 기운은 노골적인 불쾌함을 드러냈다.

직후였다.

쿵!

삽시간에 지척까지 다가온 사마공이 검을 휘둘렀다.

일운은 손날을 들어 강건하게 검을 막았다.

“철사장입니다. 소림의 승들은 내외공의 자유로운 조화를 본으로 알며 이렇듯 육신의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지요.”

어릴 적, 참으로 뜨겁고 아파 싫었던 수련이었다.

외공으로 단단하게 만든 표피 위에 내공을 덧씌운 파괴력을 알게 됐을 때야 기쁨으로 화할 수 있었던 과거가 있었다.

“무당은 어땠습니까? 그곳의 수련법은 잘 모르겠군요. 이젠 알 수도 없지요.”

“닥쳐라.”

쾅!

충격과 함께 두 사람이 멀어졌다.

사마공이 검을 고쳐쥐었다.

그의 눈빛에 얼핏 마기가 스쳐 지나갔다.

광포했다.

일운이 아는 현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주절주절 말이 많구나. 버러지 같은 땡중 놈아.”

이윽고 검이 짓쳐 든다.

포악한 기운, 정면으로 맞섰다간 피해를 입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일운은 정면을 선택했다.

언젠가처럼, 그 초식이 너무나도 익숙했기에.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무당의 무학을.”

째앵!

검과 손이 맞붙었다기엔 너무나도 날 선 소리가 울렸다.

철사장으로 단단해진 손날 위로 씐 공력은 그 자체가 검이었다.

맥동하는 근육은 충격을 온전히 흡수해 피해를 줄여줬다.

일운은 사마공을 가만 바라봤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무학을 흡수하는 마공입니까? 그런 게 있는 줄로 압니다. 예, 답은 알 듯합니다.”

“한데 왜 묻나?”

“당신이 버리지 못한 미련이 있는 듯하여.”

사마공의 눈이 좁아졌다.

그의 머리가 차갑게 식은 듯했다.

물론 감정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가엾게도, 이성과 외면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곧 무욕의 시작이라 합니다. 저의 스승이셨던 원명 대사께선 그 방법으로 수용을 이르셨습니다.”

바라보지 않는 것은 단절이다.

외면은 무엇도 해결하지 못한다.

차오르는 오욕과 칠정은 오롯이 그것을 받아들여 무던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일운은 그 일에 성공했다.

사마공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적이 되어 안타깝습니다. 다만 추억 속에 계신 분이니, 최소한의 예를 다하겠습니다.”

일운의 금빛 내공이 종소리처럼 묵직하고 고요하게 공간 위를 뒤덮었다.

그것은 끝없는 번뇌 끝에 마침내 깨달아 얻은 손짓이었다.

일찍이, 남궁진천과의 비무에서는 참아내었던.

우우웅―

공력이 팔처럼 뻗어나간다.

형상을 취했고, 이내 일운의 손짓에 따라 유영한다.

“백보신권…?”

사마공이 경계하듯 중얼거렸다.

거리를 좁혀들고자 한다.

일운은 웃었다.

“설마요.”

다만 자애로움을 담아, 모든 것을 수용하고 또한 흘려내는 손짓이라 이르러.

“여래신장(如來神掌)이라 합니다.”

우웅―!

울림과 함께 공력으로 지어진 손이 바닥을 찍어내린다.

쾅!

여래신장이 사마공의 머리 위에서부터 땅거죽을 뒤집으며 폭음을 자아냈다.

흙먼지가 비산하며 시야를 가렸다.

하나 일운은 알았다.

이것이 곧장 그를 해하지 못했음을.

스으으―

걷힌 흙먼지 뒤로 사마공의 신영이 드러났다.

그 순간 일운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이내 호선을 그렸다.

들린 검의 각도, 변한 공력의 운용, 또다시 보법이 이르는 길.

마지막으로, 처참하게 구겨진 그의 미소.

일운은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태극혜검.”

무엇도 버리지 못했음이 겨우 드러난 듯하다.

“그러니, 다시금 잘 부탁드립니다.”

번뇌를 수용하며 끝내 미련으로 남았던 하나.

이제야 해결하길.

“이제 승패를 가르지요.”

처음 용봉지회에서 패배한 날 이후, 지난하게도 이어져 왔던 악연의 매듭을 지을 때였다.

*

쓰지 않으려 했다.

그저 불쾌한 기억으로 남겨두어야만 했으니까.

그러지 않는다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으니까.

“찢어죽일 놈.”

사마공은 이를 짓씹으며 말했다.

번들거리는 눈이 일운을 똑바로 응시했다.

화악!

마기가 증폭한다.

그 순간 일운의 장이 뻗쳐 나왔다.

꽝!

본능적으로 쓰게 된다.

태극혜검(太極慧劍).

이화접목의 끝에 다다라 쏘아지는 모든 것을 흘려내 극성에선 공간조차 굽어낸다는 무당의 절기였다.

사마공은 이것을 6성까지 익혔다.

6성은 공력의 반탄이다.

퉁!

포악한 마기로도 부드러움을 자아내 여래신장을 되돌린다.

그리하면 일운은 또 다른 장으로 돌아오는 공격을 상쇄한다.

반복이었다.

적어도 전투의 향방만은 일방적인 반복으로 보이고 있었다.

쾅! 쾅! 쾅!

다만 다르다.

그런 순간이 이어질수록, 본신의 힘을 발하게 된다.

태극혜검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7년간 형과 식 중 식만을 익혀 텅 비워낸 것에, 다시 그 순간의 의념으로 이끌리게 된다.

지워두었던 기억이 다시금 선명해진다.

스러져가는 순간, 배에 검이 꽂힌 채로 피를 토해내는 태허진인을.

꺼져가는 눈빛 속에 깃들어 있던 것을.

내뱉는 말을.

쾅!

소리와 동시에 사마공은 환청 따위를 들었다.

-…너는, 태극혜검을 사랑하느냐?

무공에 사랑 따위는 품지 않는다.

-무당은, 너에게 따스한 집이었느냐?

끔찍한 곳이었다.

끔찍하리만치 고요해서 듣기 싫은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이었다.

자신을 돌아보게만 만드는 곳이었다.

천뇌문의 사마공이 아닌 무당의 현공을 만드는 곳이었다.

독이다. 나른하게 퍼지는 독은 너무 편안하여 자신을 안주하게만 만들었다.

쾅!

-그랬으면 좋겠구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절대.

-…내게 너는 자랑스러운 무당의 아이였다.

…절대.

푸확!

상념이 깨져나간다.

사마공의 몸이 멎었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직전까지 검을 쥐고 있던 손이, 팔이, 어깨가 통째로 찢겨나갔으므로.

일운은 기수식을 정리했다.

사마공의 눈빛이 흐려졌다.

몸이 기울었다.

털썩, 쓰러지며 사마공은 흐린 시야 속으로 또 환영을 봤다.

-현공아, 또 명상에 빠져 있더냐.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살 이후로, 언제나 윙윙 울리던 웃음소리가.

사마공은 입술을 달싹였다.

뻐끔거리며 숨을 토해냈다.

‘예.’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말을 한다.

‘명상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적이니까.

‘어떻게 당신들을 해할지를 생각했습니다.’

당신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아무 것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했다면….’

조금만 더 편히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어떤 연유로 끝끝내 미소를 지으셨는지 그것만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

죄스러워서.

-아느냐, 공아.

당신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아서.

-모든 것은 순환한다. 되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흐름이 되니, 그것을 이르러 말한다.

순간을 붙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태극. 우리는 평생 태극을 좇아 그릴 것이다.

일운이 가까워진다.

그가 말한다.

“아미타불.”

현공은 삐걱삐걱 힘겹게 웃었다.

휙, 숨을 내쉬며 입술을 달싹인다.

‘…무량수불.’

사마공의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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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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