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7 이부 십사장 - 침입, 격전 (3)
* * *
한기가 뼛속까지 치민다.
정타를 맞은 것도 아닌 조갑으로 흘린 타격에서 이 정도 한기가 치밀어오르니 제갈산은 단번에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체질이 꽤 특이하신가 보오?”
제갈산은 애써 웃으며 물었다.
태을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답.
이리 한기를 치솟게하는 체질, 더불어 북해빙궁의 소속.
제갈산도 아는 바가 있었다.
‘구음절맥(九陰切脈)!’
타고난 음기가 경맥을 해할 정도로 강성하여 천의 무재와 단명할 운명을 동시에 이게 되는 체질이다.
그런 이들의 한가지 특징이 더 있다.
바로 빙정, 단전에 쌓인 음기가 내단처럼 굳어져 하나의 성질을 띄는 현상.
‘자, 생각해보자.’
‘태을’이라는 성씨로 보아 빙궁의 직계는 아니다.
한데 사용하는 무공은 꽤 수준이 높은 빙공, 아마 그쪽에서도 꽤 명망있는 가문 출신일 터.
한데 그런 이가 왜 이곳에 있고, 어찌 단명할 팔자인 구음절맥을 인 채로 아직까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제갈산은 추측에 가까운 답으로 태을벽을 떠봤다.
“음, 버려졌구려?”
흠칫―
태을벽의 어깨가 흔들렸다.
제갈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역공에 들어갔다.
촤악!
옷깃을 찢어냈다.
이것이다. 이자를 흔들 약점이.
“무엇이오? 내 보기엔 후계 다툼이었겠구려. 명망있는 가문, 타고난 무재와 단명할 팔자. 하여 형제 중 아무도 당신을 신경 쓰지 않았겠지? 그게 문제가 되어버린 것일 터요. 당신이 너무 오래 살았어.”
절맥증을 해법은 모른다.
아니, 절맥을 마교에서 고쳐주어 이곳으로 투신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글쎄, 태을벽의 꼴을 보면 순전한 자신의 의지로 마교에 투신한 것은 아니었을 터다.
“무엇을 약속받았소? 복수? 아니면….”
“닥쳐라.”
쩌어어엉!
공간이 얼어붙었다.
제갈산은 빠르게 몸을 물렸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그대로 몸 어디가 얼어서 깨졌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간극.
이리 추운데도 등에 식은땀이 난다.
“히야, 꽤 난폭하구려.”
하며 자세를 가다듬길 잠시.
태을벽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공간 전체를 진동시키는 한기에 움직임이 불편해질 정도.
콰아앙!
부지불식간 쏘아진 태을벽의 주먹에 제갈산이 맞았다.
정확히 명치가,
푸욱!
꿰뚫렸고, 이윽고 제갈산의 신형이 사라졌다.
태을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의 입을 빌어 허망한 숨이 삐져나왔다.
직후, 키득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공간 전체를 울리는 속삭임이 일었다.
제갈산의 것이었다.
“걸렸다.”
노리는 바가 통했다.
“내가 이래 봬도 진법가요. 무공보단 진법에 조금 더 능한 편이지. 못 들어보셨소? 신기제갈(神機諸葛)이라고.”
막 전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내 준비해왔던 환영진이었다.
태을벽을 도발해 집중력을 흩어내면서까지 조금씩, 차근차근 갉아먹듯 완성한 진은 이제 태을벽 홀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되어 공간을 감싸안았다.
완성된 것은 정확히 태을벽이 뛰쳐나오던 그 순간.
즉, 그와 제갈산의 무공 수위처럼 아슬아슬한 간극.
한 발만 늦었더라면 정말 명치가 꿰뚫려 죽었으리라.
하지만 실전에 만약은 없다.
태을벽이 기감을 벼리는 것에 제갈산은 말했다.
“날 찾을 수 없소. 그런 진이니까.”
한마디 이후 곧장 움직였다.
다만 농락하는 일은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기에.
푸욱!
제갈산은 그의 등 뒤로 돌아 부드럽게 가슴을 꿰뚫었다.
“커헉…!”
“사적인 원한은 없소. 그래도 우리가 적진이지 않소? 너무 날 원망 마시오.”
쑥 조갑을 뽑아내니 태을벽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동자가 제갈산을 담았다.
제갈산은 끝까지 그것을 마주 봤다.
이 자가 누군지 정확히 모른다.
자신의 추측이 그저 마음에 안 들어서 덤벼든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추측이 옳은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중요치 않았다.
무림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
상대를 알고 죽이는 일보단 모른 채로 싸워 죽이는 일이 더 잦다.
그렇기에 피를 먹는 숲인 것이다.
“돌아가 술 한잔 기울이며 당신과의 비무를 추억하지. 우리 사이에 그거면 충분한 듯하오. 마두.”
제갈산은 생긋 웃으며 그리 말한 후 돌아섰다.
직후,
쿵!
태을벽이 쓰러졌다.
*
몽화루(夢華壘).
양고혜가 기거하는 전각이자 현재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는 조금의 틈도 없었다.
만약 살아있는 이가 있다면, 도망칠 틈이.
콰과과광!
백색과 검붉은 색의 기파가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지독한 소모전이자, 전면전이었다.
혜운은 쉬지 않았다.
이런 식의 소모전이 제게 불리함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와중 속으로 진저리를 치며 생각했다.
‘얼마나 빨아 처먹은 거야?’
이젠 다 가루가 되어버린 사내들의 시신을 보면 얼추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이 한순간의 승부를 위해 양고혜가 얼마나 많은 선천진기를 흡기한 것인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양고혜의 무공은 소수마공, 근접전이 되는 순간 한 번의 스침이 절명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하여 거리를 유지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내공이 모자라.’
흡공으로 공력을 쌓은 양고혜의 내력이 더 여유로울 것은 두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그 질이 나쁘고 통제가 서툴다 해도 절대적인 양의 차이는 비슷한 수준에서 꽤 치명적이다.
본래라면 이 정도 준비를 해온 양고혜를 이길 수 없을 터였다.
다행인 일이었다.
혜운에게도 노려볼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은.
‘한순간에 너무 내공을 빨았어. 육신이 버티지 못하고 있단 말이지.’
양고혜는 이 한 번의 전투를 위해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내력을 빨아들인 상태다.
즉, 거대한 흐름을 통제하지 못한 몸에 반발이 일어나고 있단 말이다.
이대로 쉴 틈을 주지 않으면 자멸이다.
실제로 양고혜의 얼굴 위론 얼핏 주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혜운은 씨익 웃으며 도발했다.
“할망구, 이젠 진짜 할망구 되고 있네?”
“닥쳐라!!!”
꽈아아앙!
마기가 혜운의 옷자락을 스쳤다.
닿은 부분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혜운은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아차차, 닭장냄새 묻었다.”
서걱!
오염이 퍼지기 전 옷자락을 자른다.
양고혜의 얼굴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호재다.
‘더 화내라고.’
더욱 통제를 잃어야 한다.
제아무리 폭주한 상태에서 더 강한 마공이라 한들, 그 한계는 있을 터이니.
“이녀어어언!!!”
꽈아아앙!
양고혜가 본격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거리조절이 더욱 힘들어졌다.
그럴수록 혜운은 도발에 힘을 더했다.
쾅!
“만지지마요. 닭장냄새 옮잖아.”
쾅!
“만진다고 탱글탱글한 피부는 안 옮아. 포기해.”
쾅!
“으엑, 할망구 냄새. 떨어져랏!”
쾅!
그 어느 순간 혜운은 발견했다.
양고혜의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슬슬….’
시작된다.
“끄아아아악!!!”
양고혜의 눈이 뒤집어지며 흰자위가 드러났다.
흰자위가 검붉게 물들었고, 이내 푸확! 하고 터지며 피눈물을 쏟아냈다.
마기가 뇌수까지 뻗친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언젠가 진건은 말했다.
-마두 놈들이 미친놈이다, 미친놈이다. 말이 참 많은데 말이다. 사실 그 상태에서도 초식을 휘두른다면 진짜 미친 게 아니지. 가짜 광기란 말이다.
마두가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관한 말이었다.
-제대로 마기가 뇌수에 뻗치기 시작하면 초식이 없어져. 특히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축기를 한 놈이라면 더하지. 마공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거다.
그 말대로였다.
양고혜의 마공이 그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손에 국한되어있던 흰 기운이 전신으로 뻗쳐 피부가 도자기처럼 창백하고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이녀어어언!!!”
쾅!
승부수였다.
혜운은 검을 역수로 쥐었다.
발을 어깨너비보다 넓게, 무릎은 굽히고 상체는 앞으로 기울인다.
가늘게 숨을 내쉰다.
“스으으….”
아미파의 무공이 아니었다.
바람처럼 날카롭고 가볍게 벼려지는 순백의 기파는 7년의 수행 중 겨우 빼앗아 온 도왕의 절기였다.
완전한 정지 상태.
오로지 몸에 가둔 기파만이 경맥을 파멸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전신의 긴장감을 머리끝까지 채워 올려 단 한 순간 폭발시키는 기예.
‘지금!’
진건 식, 일도섬단(一刀殲斷).
혜운의 신형이 일순 흐트러졌다.
서걱―!
양고혜의 모가지가 하늘을 날아 팽그르르 구르며 검은 피를 쏟아냈다.
툭!
머리가 땅에 떨어진다.
혜운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애써 바로 세우며 혜운은 어깨를 돌렸다.
표정은 한껏 찌푸려진 채였다.
“아으, 죽겠네. 진짜.”
무공이란 한 수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배운 절기였으나, 육신의 부담감이 너무 심하여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무공이었다.
애초에 진건의 무공이라는 것이 본인이 아니면 쓰기 힘들 정도로 괴악한 구석도 있었고.
이해되는 것이 있었다.
‘그 아저씨는 이런 거나 써대니까 그렇게 술을 마시지.’
아아, 술이 마시고 싶다.
차라리 취해 있다면 이 욱씬거림이 덜할 텐데.
생각하며 혜운은 난장판이 된 꼭대기층을 둘러봤다.
술은 무슨, 가구도 죄다 가루가 되어서 뭐 하나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쩝, 할망구라 그런가. 술은 안 하나보네.”
괜히 한 번 더 죽은 양고혜를 들쑤신 혜운은 돌아서서 전각을 떠났다.
승전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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