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3 이부 십삼장 - 십만대산, 척후 (4)
* * *
당혹이나 허무함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에 젖어있을 틈은 없었다.
딱 봐도 이 모든 현상의 원흉으로 보이는 제단과 백 단위의 마인들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감히 추측하길, 이대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이곳은 표류한 시간이 조금만더 길었더라면 예기치 않게 쏟아지는 공격에 해를 입었으리라.
물론 그것이 목숨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겠으나 전쟁에 방해가 될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네 사람은 곧장 전투에 돌입했다.
마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말했다.
“쳐라아아!!!”
하나하나가 절정, 혹은 초절정.
합격진은 지독하리만치 촘촘했고 마인들의 목숨을 불사하는 기개는 적임에도 분명 인정해줄 만했으나, 딱 거기까지의 얘기였다.
서걱―
초월 셋, 그리고 진법의 고수 하나.
승부가 성립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데구르르―
수장의 목이 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각이 채 되지 않았다.
막 비수를 갈무리한 염소소가 말했다.
“주변을 살피거라. 혹시 남아있는 적이나 맹의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의식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기감이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다.
기에 의한 판단을 믿을 수 없는 만큼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
그것은 실로 옳았다.
“살성님! 찾았습니다!”
목리원이었다.
께름칙한 제단 주변을 살피고, 제단 아래를 헤집으며 한참이나 생존자를 찾던 목리원은 흙에 반쯤 파묻힌 채 기절해있던 맹의 무인하나를 찾았다.
그의 꼴음 참으로 처참했다.
“이건….”
“그래, 그 악귀가 이리 만들어졌나보구나.”
염소소는 눈살을 찌푸렸다.
흙 속에 파묻혀 있던 무인의 팔 한쪽이 검은 오물이 되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마 더 시간을 끌었다간 여태 상대했던 그 악귀들과 완전히 같은 꼴이 되었을 터다.
당장 처치할 방법은 많지 않았다.
서걱―
염소소는 무인의 어깨 아래를 완전히 잘라냈다.
감염의 정도가 심해지는 일을 겨우 막은 것이다.
점혈을 찍고 절단면을 꽉 묶어 처치를 마친 염소소는 제갈산에게 말했다.
“제단을 살펴볼 수 있겠느냐?”
“예.”
“그래, 부탁하마. 그동안 너희 두 놈은 쉬고 있거라. 밤이 얼마나 더 길지도 모르니.”
일단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
진과 법술의 기본은 음양과 오행의 조화와 상생이다.
진법에 관하여 배울 때면 가장 먼저 교육받는 사실이다.
제갈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 제단은 참으로 께름칙한 면이 있었다.
‘진법과 원리가 다르다.’
조금 더 삿된… 그러니까 괴력난신에 가까운 기전을 통해 발동되는 의식이다.
특히 생명력을 빨아당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것을 어찌 해주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방어하며,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가.
생각이 오갔으나 확실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다만 추측할 만한 것은 하나.
‘제단이 이것으로 끝은 아닐 터다.’
십만대산의 광범위한 땅에 모두 펼쳐진 진법이다.
아마 한곳에서만 이런 의식을 한 게 아니라, 일정 범위마다 곳곳에서 같은 의식을 펼쳐 십만대산 전체를 이것과 같은 제단으로 방어한다 보는 것이 옳았다.
‘무턱대고 진입했다간 곤욕을 치렀겠군.’
상상만 해도 조금 아찔해지는 미래다.
제갈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당장 밝혀진 해주법은 정면에서 부수는 것.’
제갈산의 시선이 하품을 쩍쩍 해대는 남궁진천을 향했다.
그의 무식함이 이리 작전에 도움이 된 게 참으로 묘하게만 다가온다.
뭐, 그건 그거고.
‘우리는 척후로서의 역할을 더 해야 한다.’
의식이 얼마나 더 많은 곳에서 진행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의식을 깨부수는 방법이 공간 자체에 흉을 내는 것뿐이다.
즉, 초월의 무인이 마교 전체의 이목을 끌며 제단을 부수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본대가 이곳까지 쉬이 올라올 수 있을 테니까.
‘척후는 현재의 구성이 좋다.’
머리를 쓸 자신, 무력 둘, 지휘 하나.
이대로 움직인다면 천마신교가 있는 본산까지 길을 뚫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판단을 내리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으으음….”
기절해있던 맹의 무인이 의식을 되찾았다.
*
눈을 뜬 무인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끔뻑끔뻑 눈꺼풀을 들썩이며 눈의 초점을 잡길 잠시, 그러다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고, 이내 “아아아악!”하며 비명을 지르다 남궁진천이 명치를 때리자 그제야 얌전해졌다.
“어억!”
“나, 남궁 형…!”
“고통은 고통으로 잊는 법이다.”
“허억! 허억!”
“봐라, 멀쩡해지지 않았나.”
…방법론이야 어쨌든 드디어 무인은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는 뒤늦게야 네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 대협…!”
“정신이 드시오? 아, 어깨는 미안하오. 웬 이상한 꼴이 되어있어서 잘랐소.”
“감사 인사는 필요 없다.”
“…혹시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겠소?”
그렇게 사건의 인과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 이상을 감지한 것은 막 십만대산에 들어와 골짜기 다섯 개를 넘었던 순간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만 같았습니다. 예, 함정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조원이었던 진법가에게 해주를 부탁했으나 그는 진법이 아니라 하더군요. 문득 두려움이 차올랐습니다. 마교의 사특한 술법에 당한 것이라면 살아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지요. 그때였습니다.”
무인은 소름이끼친다는 듯 하나 남은 팔로 목을 더듬으며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악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저희를 해쳤는데, 목숨은 끊지 않았던 게 기억이 납니다. 저희들은 모두 이곳 제단으로 끌려와 바닥에 묻혔고….”
무인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목리원은 그 이후의 일을 알 수 있었다.
아무렴, 직접 눈으로 본 만큼 당연했다.
“…조원들이 악귀로 변한 것이겠구려.”
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리원이 염소소를 바라봤다.
염소소는 심각한 얼굴로 턱을 쓸다, 이내 무언가 판단을 내리려 했다.
제갈산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살성님, 저희는 이곳에 남아 남은 제단을 모두 파괴해야 합니다.”
“…그래, 같은 생각을 했다.”
“이분은 본대로 보내 소식을 전하도록 하지요. 저희가 제단을 부수는 동안 본대의 진군 준비가 끝나야 할 테니.”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다.
이만큼 소란을 피웠으니 적의 방비는 더 단단해질 터였다.
만약 이와 같은 의식이 몇 가지나 더 있다면 시간을 지체할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중원 무림맹 측이다.
불상사를 막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해야, 잠시 기다리거라.”
염소소는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펼쳐 글귀를 적은 후 무인에게 건넸다.
“이걸 맹주에게 전하거라. 그놈이라면 알아서 채비를 마쳐줄 테니.”
“예, 옙…!”
“우리는 더 안쪽으로 갈 것이다. 너무 늦지 않게 지원이 올 수 있게 해다오.”
무인은 이를 빠득 갈았다.
눈빛에 차오르는 것은 분노였다.
하기야, 한순간에 동료와 팔을 잃었으니 마교를 향한 복수심이 드높이 차올랐을 것이다.
그는 크게 부복하며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 후였다.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이자꾸나.”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명확했다.
이곳을 달리다 보면 다시금 전과 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주변에 제단이 있다는 것일 테고, 그것을 파괴하면 이 께름칙한 공간도 점점 축소될 터다.
그리하여 또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바스락!
수풀이 들썩였다.
흠칫한 네 사람의 시선이 소음의 근원지로 향했다.
자연히 검이 뽑힌다.
그렇게 사람의 인영이 나타나는 순간 남궁진천이 검을 휘둘렀다.
하나, 그것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
쾅!
“목 아우?!”
제갈산은 황망한 얼굴로 목리원과, 그 뒤의 두 사내를 바라봤다.
하나는 곧 죽을 것처럼 말라붙은 인간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건장한 체격의 꽤 수가 있어 보이는 무인이었다.
“대체….”
암만봐도 알 수 없는 사람.
저렇게 특징적인 이들이 맹에 있었다면 제갈산이 기억하지 못했을 리가 만무하기에 의아함이 더 짙어졌다.
목리원이 입을 뗀 것은 그런 순간이었다.
“…적이 아니오.”
남궁진천의 몸이 굳었다.
다짜고짜 검을 휘두른 것이 꽤 무안해진 모양.
“…미리 말을 할 것을.”
스릉.
그가 검을 집어넣었다.
제갈산의 시선은 다시금 두 사내에게 향했다.
“이리 갑작스레 나타나 죄송합니다. 놀라셨겠지요.”
그는 직전 목숨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음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그 여유로움이 꽤나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중, 마른 사내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백련교주 단지선이라 합니다.”
듣고도 순간적으로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정체.
하나, 확실한 것은 백련교가 중원과 그리 친하지 않다는 것이다.
“역시 적인가.”
스릉―
남궁진천이 검을 뽑았다.
목리원이 빠르게 입을 열어 그를 말렸다.
“남궁 형, 내게 마교가 배교의 술법을 빼앗았다 알려준 이가 이 사람이오.”
스릉―
남궁진천이 납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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