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8 이부 십이장 - 인연, 깨달음 (1)
* * *
“…그럼 나중에 또 찾아뵙지요.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끝까지 목덜미에 시선을 주던 단지선의 말이었다.
목리원은 이유 모를 머쓱함을 느끼면서 답했다.
“이렇게 빨리 말이오?”
“아무래도 저희 교가 중원 무림과 친히 지낼 수는 없는 실정인지라.”
“아아….”
하기야 백련교 자체가 마교의 전신이라는 인식이 중원 전체에 깔린 터라 대외적으로 함께하긴 힘들 터다.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그랬다.
‘파마성 탓에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 터다.’
당화서에게 들은 사실이었다.
절대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제약은 집단 대 집단의 알력 다툼에서 큰 약점이 된다던가.
본디 집단의 협력 관계란 적절한 거짓말과 몇몇 합의로 이뤄지는 법인데, 교주인 그가 그런 합의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관계에서의 우열이 상대 쪽에게 넘어갈 테니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였다.
단지선이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목리원은 구태여 그를 더 붙잡지 않았다.
“살펴 가시오.”
하며 작별을 고하자 단지선이 물끄럼 목리원을 바라봤다.
목리원은 괜히 움찔했다.
그러자 그가 말하길,
“묵룡.”
“음?”
“행복하십니까?”
그것은 참으로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다만 이유 없이 물어본 것은 아니리라.
목리원은 깊이 고민했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하오. 내게 주어진 인연들이 참으로 달가워서.”
언젠가 사람과 깊어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날이 있었다.
애초에 그런 천형이 몸에 배어 있는 만큼 희망의 끈을 놓게만 되는 순간도 있었고.
그런 순간마다 자신을 일으켜주는 것은 스스로의 신념보다도 타인이었다.
곁을 지켜주던 이들이었고, 스쳐 지나가며 깨달음을 줬던 사람들이었다.
“복 받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목리원은 솔직한 마음을 말했다.
그러자 단지선은 심기가 불편한 듯 한숨을 푹 내쉬다, 이내 그런 답을 줬다.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겠군요. 당신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영 모를 사람.
생각하는 중 단지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뵙지요.”
그가 객잔을 나섰다.
목리원은 떠나는 그와 호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으음, 이상하구나.’
정말 이상하게도, 그를 볼 때면 속에서 기시감 같은 것이 확 피어올랐다.
속이 왜 이렇게 울렁거리나 싶어 잠시 숨을 가다듬은 목리원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실은 아직 멀리 있었다.
*
그렇게 단지선과 헤어진 목리원은 일행들이 모여있는 객잔을 향했다.
층 하나를 통째로 빌려 조용히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환경.
언제나 객잔 1층의 식탁 하나를 두고 식사를 했던 목리원으로선 꽤 낯선 풍경이었다.
“오, 목아우! 어딜 다녀왔나.”
제갈산이 얼큰하게 취해 손을 흔들었다.
그 곁에는 백경오가 하얗게 죽은 얼굴로 혼이 빠져있었는데, 어찌 제갈산만 만나면 저런 얼굴이 되는지 보고 있으면 웃음이 피식피식 삐져나왔다.
목리원은 백경오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잠시 아는 사람을 만나서 말이오.”
“으음? 아는 사람이라면?”
“제갈형은 모르는 사람이오. 이번에 강호에 재출두하며 알게 된 이라.”
“흐음, 아우가 벌써 사적인 인연을 만들 나이가 됐구먼.”
제갈산이 감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취한 채로 아무 말이나 하는 듯해 흘려넘기니 이번엔 남궁영이 아장아장 걸어와 목리원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삼촌 안녕!”
하고 손을 들기에 목리원은 그 손을 잡아주며 남궁진천을 봤다.
과연 남궁영이 이곳에 온 이유가 있었다.
“취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나는 취하지 않았다.”
“아, 좀! 알겠다고!”
남궁진천이 시뻘개진 얼굴로 휘청거리며 숟가락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옆에선 혜운과 일운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언혁은 그 모습이 감명 깊은 것인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개판이구나.”
“개판!”
도착하자마자 이런 개판이라니.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기에 이렇게까지 흥에 차 있나 싶다.
답은 당화서에게서 돌아왔다.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닙니다. 서휘가 비싼 술을 몇 가지 가져와서 향을 음미하다보니 이리 되었지요.”
목리원의 시선이 강서휘를 향했다.
강서휘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가 보내주셨어요. 술을 모으는 게 취미셔서.”
“그렇구나.”
답하던 목리원은 그제야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한데 소아랑 진이는 어딜 갔느냐?”
남궁소아와 모용진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기라도 한 걸까?
아니, 모용진은 몰라도 남궁소아는 남궁진천이 저 꼴인데 홀로 갔을 리가 없는데….
“이모 저기!”
남궁영이 방구석을 가리켰다.
목리원은 헛웃음을 흘렸다.
“소아가 술이 약하구나.”
남궁소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미 술떡이 되어 기절한 모용진의 얼굴에 구토하고 있었다.
목리원은 새삼 무상함을 느끼며 천장을 바라봤다.
‘집에 갈까.’
…그래, 집에 가자.
목리원은 남궁영과 잠시 놀아주다가 조심스레 빠져나갔다.
당화서와 눈짓을 나누었는데, 그녀는 이 자리를 정리하고 갈 심산인지 먼저 가라는 전음을 보내왔다.
그렇게 객잔을 빠져나온 차였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기지개를 켜니 조금은 뻐근하던 몸이 확 시원해진다.
잠잠해져 가는 시장의 소란에 잠시 몸을 맡기니 새삼 때가 다가왔음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이 다가오는구나.’
자신이 몰랐던 탄생부터 쭉 이어져온 악연이 이제 완전히 끝을 맺으려 한다.
전쟁이다.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고, 또한 그보다 많은 이들이 슬퍼하겠지.
문득 목리원은 스승을 떠올렸다.
‘스승님, 스승님께선 어떤 마음으로 검을 드셨습니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검성 목선오는 위대한 협객이었다고.
목리원도 그 사실을 익히 알지만, 그 외에도 인간적인 목선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다.
목선오는 살생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야생 동물을 잡아먹을 때도 언제나 그에 감사함을 품어야 함을 말했고, 검으로 무언가를 베는 일엔 일 백번의 고민이 있어야 함을 말했다.
그런 목선오니 큰 전쟁을 앞두고 검을 들기 전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터였다.
혈사에서 수많은 마인을 벤 영웅이 되기까지.
누군가의 죽음에 한없이 슬퍼하던 의인이 되기까지 스스로를 참 많이 돌아보셨을 터다.
이리 전쟁에 나가며 당신은 마음 속에 무엇을 품으셨을는지.
협객으로서 무엇을 행하려 하셨는지.
이젠 답을 들을 수 없는 의문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저는 스승님 같은 협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감성에 차 속으로 물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모, 목 대협!”
누군가가 목리원을 불렀다.
목리원은 고개를 돌렸고, 이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곽 대협?!”
“으허허! 이런 곳에서 다 만나 뵙습니다. 그려!”
곽칠.
강호협객전의 저자이자, 7년 전 연을 맺었던 친우.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목리원은 어안이 벙벙한 심정이었다.
동시에 차오르는 것은 반가움이었다.
“무한에 계셨구려! 이리 우연히 만나다니!”
한껏 차오른 반가움에 목리원이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과, 곽형! 이곳에 계셨구려!”
“곽형! 갑자기 어딜 가나했… 아이고오~ 이런 우연이! 묵룡 대협 아니시오!”
“음? 진원단주?”
웬 모르는 사내 하나와 진원단주 견동이 콰당탕! 소음을 내며 골목에서 굴러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원.
목리원이 곽칠을 바라봤고 곽칠은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는 사이셨소?”
“아, 아암!”
견동이 벌떡 일어났다.
“우리 곽형이 묵룡 대협과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구려! 이렇게 된 거 인사드리겠소! 여기 곽형과 나, 그리고 왕 형까지 서로 의형제를 맺은 사이라오!”
평소보다 과장되게 근엄한 목소리로 견동이 말했다.
그러자 왕 형이라 불린 사내가 벌벌 떨며 말했다.
“무무무묵룡 대협을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저어는! 와와와왕삼이라고…!”
“에잇! 여기엔 왜 찾아온 겐가!”
곽칠이 버럭 성질을 냈다.
하지만 진심은 아닌 듯한 게, 세 사람은 그리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눈짓을 보내면서도 친밀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의형제라는 견동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목리원은 잠시 헛웃음을 흘리다, 이내 세 사람에게 말했다.
“이리 만난 것도 우연인데 잠시 술이라도 하겠소?”
정말 오랜만에 만난 곽칠이다.
이리 마음이 심란해 돌아가 봐야 잠은 못 잘 것 같아 권유했고.
“그, 그것참 좋은 생각입니다! 으허허! 제가 아는 집이 있으니 따라오시지요!”
곽칠이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견동과 왕삼도 벌떡 일어나 곽칠의 양옆으로 섰다.
서로 툭툭 찌르며 투닥대는데, 그 꼴을 흐뭇하게만 보던 목리원은 몰랐다.
-이, 이것들아! 내 대협이랑 잠시 이야기나 하려고 했더니 그걸 방해해?!
-내 곽 형만 기회를 잡게 둘 수 없지!
-아암! 나도 묵룡 대협이랑 술잔을 기울이고 싶단 말이오!
목리원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모인 세 사람.
그들은 지금 이 순간도 물밑에서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좋군! 그럼 안내 부탁하오!”
목리원은 그저 해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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