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306화 (306/334)

EP.307 이부 십일장 - 전쟁, 초야 (6)

* * *

구구절절한 설명을 뚝 떼어 말하자면, 이어진 회의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현 맹주인 견궐이 그리 만들었다.

“구시대가 저물 때가 온 듯하오.”

그는 그런 말로 서두를 열었다.

“25여년 전의 혈사, 그리고 7년 전의 정마전쟁. 절대 작다 말할 수 없는 전쟁이 두 번에 걸쳐 있었소. 우리의 세대에 그랬소.”

이 자리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중역들이 그랬다.

그 시대를 살았고, 또한 헤쳐나와 이곳까지 올라온 이들이었다.

“첫 혈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강호동도들의 죽음을 넘어야 했소. 그리 영광에 살아 정마전쟁에서 숨을 거둔 동도들이 있소. 나는 그들이 조금은 부럽소.”

논란이 될 수도 있는 발언이었음에도 견궐은 거침이 없었다.

드러나는 것은 진솔함뿐이다.

가라앉은 그의 눈은 비아냥 따윈 조금도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다.

“백도 무림의 미래를 위해, 그리 죽은 동도들이오.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오.”

침잠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것은 곧, 견궐의 말이 그 개인이 품은 후회만은 아니라는 말과 같았다.

“항상 후배들에게 평화로운 강호를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소. 백도 무림이 이리도 굳건하여 지킬 가치가 있음을 말하고자 했소. 나의 협은 그랬소.”

이어지는 것은 딱딱하기 그지없는 표현이었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오. 패배는 그리지 않소. 다만 이 백도 무림이 지금과는 다르겠지. 전쟁 이후를 그리는 것은 우리가 아닐 테니.”

견궐의 기파가 은은하게 회의장에 깔렸다.

후배들을 위해, 무림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다가올 전쟁의 승리를 위해.

거창한 말이 꽤 있었으나, 그는 그것들을 다 삼키고 다만 한마디를 내뱉었다.

“죽으러 갑시다. 우리 시대는 여기까지오.”

몰아치는 환란을 껴안고 죽겠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견궐의 연설은 그리 끝을 맺었다.

*

가타부타 더해지는 말은 없었다.

미사여구를 꾸민 백 마디 말보다 강력한 것이 한마디의 진심이리라.

이후의 회의는 신강 너머로 진격하는 과정과 그 속에서 병력을 어찌 배분하고 전략을 어찌 짤 것인지.

각 역할을 어떤 집단에서 맡을 것인지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끝나니 노을이 지는 시간.

“목아우! 어서 오시게!”

1기 용봉단과 2기 용봉단이 모이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제 전쟁이 시작되면 다들 흩어질 것이니만큼 미리 안면을 익히고 조언을 주고받는 것이다.

“금방 가겠소!”

라고 말하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멈칫―

목리원의 걸음이 멎었다.

익숙한 기파가 전해져오는 까닭이었다.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객잔 창가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찾는다.

이윽고 목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곳에서 전음을 보내오는 것은.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름아닌 백련교주 단지선이었기 때문이다.

“목아우?”

제갈산의 부름에 목리원은 답했다.

“먼저 가시오! 내 잠시 볼 일만 보고 가겠소!”

“알겠네! 너무 늦진 말게나!”

목리원은 그제야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객잔으로 들어섰다.

*

객잔 내부로 들어선 목리원을 반긴 것은 단지선과 그의 호위였다.

호위는 전에 만났던 때와 같이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고, 단지선은 조금 달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우선 이리 멋대로 찾아온 것에 대해 사과드려야겠지요.”

그의 몸이 전보다는 조금 더 건강해보였다.

그래봐야 툭 치면 숨넘어갈 것 같은 체격은 그대로였지만, 생기가 조금 더 도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목리원은 그의 조심스러운 말투에 작게 웃으며 답했다.

“되었소. 이쯤이면 찾아오지 않을까 했으니.”

“으음.”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소. 당신들도 더 미룰 수 없는 것이겠지.”

중원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천마신교와 악연이 있는 것이 바로 저들 백련교다.

내내 현 천마신교에 관한 것을 조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들이 전쟁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을 리가 없이 않은가.

목리원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찾아낸 것은 있으시오?”

“…예, 정확히는 현 교주인 위광천이 노리는 바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노리는 바라면….”

“대법을 준비 중일 것입니다.”

목리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가 치를 대법이라 하니 역성대법부터 떠올랐던 까닭이다.

하나 단지선은 고개를 저었다.

“다릅니다. 역성대법과는 다른 무언가를 시도 중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것은 목리원으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다른 것이라면….”

“배교를 아십니까.”

목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롭고 은밀한 주술을 파고든다는 신비 종교가 아니던가.

다만 그들의 주술이 밝혀진 면이 적어 중원에서의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목선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들의 대법은 참으로 신묘한 부분이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것과 통하는 듯한… 그런 주술을 엮은 대법이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목리원은 위광천의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별을 뒤집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구려?”

“배교를 찾아가 보았으나 그들이 워낙 폐쇄적인 터라 많은 정보를 얻진 못했습니다. 알아낸 바만 말씀드리자면, 5년 전 배교를 향한 습격이 있었고 그중 그들의 대법서 몇 가지가 유출됐습니다. 정확히는 그것을 노린 습격이었고, 배후로 지목되는 것이 위광천, 그 자라고 하덥니다.”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마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와의 결전에 들어갔다가 뒤통수라도 맞는다면 큰 일이니.

“혹 대처법이나 주의할 점이 있겠소?”

“이 부분은 조사가 더 필요합니다. 저희 교에서 수소문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소. 부탁하오.”

목리원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나 같이 쉬운 게 없었다.

대관절 무슨 일을 꾸미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은밀한지, 이제껏 의심한 일이 없었던 준비조차 문득 모자라다 느껴졌다.

그런 순간이었다.

“한데 말입니다.”

단지선이 조금 더 가벼워진 어조로 입을 뗐다.

목리원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엔 왜인지 모를 짜증 같은 것이 잔뜩 서려있었다.

“목의 그건 무엇입니까? 죄송합니다. 파마성 탓에 거짓말을 하지 못하여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겠더군요.”

덜컥 목리원이 들썩였다.

손은 절로 들려 목의 자국을 가렸다.

직전까지의 심각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어색함, 그리고 수치심.

목리원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 단지선의 눈초리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 옆 호위의 한숨 소리가 배경처럼 깔렸다.

“다, 당신께서 신경 쓸 바가 아니오.”

목리원은 어떻게든 답을 피했다.

빠드득 단지선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에 잘못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제 핏줄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목리원으로선 알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

신강, 천마신교 본단.

그곳의 중심 천마전.

“교주님, 중원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마공은 예를 갖춰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들진 않았다.

들 수도 없었고, 들어봐야 좋을 것도 없었다.

스스로에게 천마의 직위에 오를 자격이 없다 판단한 위광천이 태사의가 아닌 그 앞 맨바닥에 앉아버렸으므로.

다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명상에 빠져 가부좌를 틀고 있다는 것.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다가, 이윽고 길게 빠져나왔다는 것.

그런 순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깊게 가라앉은 위광천의 목소리가 울렸다.

“천살성은?”

“참여한다고 합니다.”

“그놈이 어디까지 올 수 있겠나.”

그의 무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황이 어찌 흘러갈지를 묻는 말도 아니었다.

언어 그대로의 의미다.

목리원이 자신에게 다다를 수 있겠느냐.

전투가 시작되면 그가 최전선에 서겠느냐.

사마공은 망설임없이 답했다.

“그리될 것입니다.”

“장담하는 이유는?”

“저희가 그리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획은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었다.

패웅추의 죽음을 이용해 신교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렸고, 미처 끊지 않았던 감숙에서의 끈을 이용해 중원의 선공을 유도했다.

아마 신강을 넘어 이 십만대산의 본산까지 맹의 병력이 쳐들어오리라.

이번 전투는 수성을 위주로 할 것이었으며, 이 거대한 산맥이 천혜의 요새가 되어 중원을 찢어발길 것이었다.

‘뭐, 이런 것엔 관심이 없겠지.’

사마공은 위광천을 알았다.

가장 오랜 시간 그의 곁에서 보좌를 지켰기에 아는 사실 몇 가지가 있는 까닭이었다.

위광천은 전쟁보다 개인이 중요했다.

뒤바뀐 별을 되찾는 일이 중요했고, 또한 전대 천마 이선의 그림자를 좇는 일에 미쳐있었다.

최악의 교주다.

그럼에도 최강의 교주다.

“고개를 들라.”

위광천의 명에 따라 사마공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자색으로 일렁이는 안광이 어찌 저리 소름끼칠까.

아니, 비단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

“대법의 준비는 끝이 나셨는지요?”

사마공은 그의 등 뒤, 태사의 너머로 설치되어 있는 웅장한 법진에 숨이 틀어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위광천이 읊조렸다.

“준비는 끝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마공은 그제야 자신의 몸이 벌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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