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6 이부 십일장 - 전쟁, 초야 (5)
* * *
그것은 후회일 때도 있고, 수치심일 때도 있고, 또한 아쉬움일 때도 있다.
천살성을 이고 난 목리원은 대체로 셋 중 후회를 느꼈고, 오늘은 특이하게 수치심을 느꼈다.
“…아침 해가 밝았구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목리원이 말했다.
몸이 붉었고, 곳곳에 흉이 져 있었으며, 주변은 참 너저분했다.
머리가 핑핑 도는 채였다.
간밤의 일이 이제야 실감 되니 새삼 부끄러워진 것이다.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던 스스로가 참 바보 같았고, 그럼에도 행복한 기분에 시선이 멍하니 당화서를 좇았다.
당화서는 먼저 씻고 나와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목 소협.”
“예, 옙!”
“…후회하십니까?”
당화서의 목소리엔 옅은 망설임이 있었다.
표정 또한 조심스러웠다.
부끄러움이 있었고, 미안함과 들뜸이 그에 섞여 있었다.
답을 듣고싶지 않아 하는 것도 같았다.
그제야 목리원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을 느꼈다.
‘아.’
이렇게 함께 밤을 보내고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면 당화서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일 터다.
분명 시작은 그녀였으나, 응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 일의 책임은 양쪽에게 있었고, 더 많은 것을 내어준 쪽은 당화서였다.
그녀는 순결을 바쳤으니까.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런 태도는 옳지 않았다.
“아니오! 후회하지 않소!”
목리원은 벌떡 일어나 말했다.
“좋았소! 소저와 그런… 걸 할 수 있어서! 허락받아서!”
이따금 당신을 보며 그런 욕구를 느낀 일이 있다는 말까지 토해지고 말았다.
그제야 속이 후련했다.
당화서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 이내 감동받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목리원을 부드럽게 껴안았고, 그렇게 두 사람의 체온이 겹쳤다.
“감사합니다. 그리 말해주셔서.”
“아니오. 정말….”
“일단 옷부터 갖춰 입으시겠습니까?”
덜컥, 목리원의 몸이 떨렸다.
지금 자신이 나신임을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홍시처럼 전신이 달아오른 와중, 당화서가 장난스레 말했다.
“조금 더 하고 싶으십니까?”
“그, 그읏…!”
“후후, 농담입니다. 오늘은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회의부터 참석하셔야 하는 걸요.”
그제야 목리원의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와중 그녀의 말에 조금은 실망했다면 너무 부끄러운 일일까.
당화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뺨에 홍조를 띄우다, 귓가에 속삭이듯 한마디를 건넸다.
“해가 지면 다시 뵙지요.”
목리원은 음험한 상상력을, 이젠 기억이 된 몇몇 일들을 밀어내기 위해 힘써야 했다.
*
어수선한 마음으로 출근한 맹은 분주했다.
평소 맹을 돌아다니던 맹원들 외에도 수많은 외부의 손님들이 왔기 때문이다.
“구파일방이 다 모였군! 저기 오대세가도…!”
누군가의 말처럼 7년 전 전쟁 이후 세를 죽이고 살았던 백도 무림의 기둥들이 다시금 그 세력을 과시하며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몇 보였고, 그에 목리원이 지그시 웃던 중이었다.
“그런데 단주님, 목에 그 상처는 뭐예요?”
남궁소아가 문득 목덜미에 관해 물었다.
그것은 전날 당화서가 입술로 남긴 자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목리원은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참기 위해 애썼다.
“모, 모기가 있더구나.”
“모기요? 단주님이 모기한테 물려요?”
“내가기공은 열심히 수련했으나 피부는 조금 무른 편이다. 모기에 당하는 일이 왕왕 있단다.”
어찌 이리 자연스레 변명이 나오는지 목리원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여하튼 다행인 것은 남궁소아가 금방 수긍했다는 것 정도.
목리원은 아예 화제를 돌리기 위해 남궁소아에게 물었다.
“하, 한데 너는 왜 남궁가에 가지 않고 여기 있느냐.”
“저 말고도 다 여기 있잖아요. 저희는 용봉단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는 걸요.”
“아하.”
그랬었지.
자신이 단주가 되며 용봉단의 입지가 올라, 이번만큼은 단원 전체가 별개의 소속으로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
7년 전 회의 땐 모든 단원들이 본래 소속으로 돌아갔던지라 무심코 목리원은 착각을 했다.
“어휴, 단주님 오늘 진짜 이상하네.”
하며 또 남궁소아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순간이었다.
“묵룡 대협.”
늙수그레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목리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장문인!”
그곳엔 얼마 전 들렸던 공동파의 장문인인 우선자가 있었다.
지그시 웃는 얼굴로 다가온 그가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리고 경오야, 너도 오랜만에 보는구나.”
백경오가 까딱 고개를 숙였다.
아직 우선자와는 어색한 걸까.
생각하는 중 우선자가 말했다.
“무한으로 나오는 일은 참 오랜만이라 어색함이 있군요.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나야 잘 지냈소. 공동은 어땠소?”
“그날의 일로 조금 바빴습니다. 상단을 털고도 남아있던 꼬리가 있어 꾸준히 추격했지요. 지금도 추격 중입니다.”
“다 해결하진 못한 것이구려….”
“마교의 뿌리가 참 깊습니다.”
우선자의 얼굴 위로 옅게 씁쓸함이 걸렸다.
직후 그것을 지워낸 그가 말했다.
“여하튼 따로 인사를 드릴 수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곧 회의가 시작하지요. 그때 뵙겠습니다.”
“아, 그리하지. 길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만.”
우선자는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백경오를 한 번 더 봤다.
그렇게 뒤돌아 우선자가 떠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은 순간이었다.
“으엑.”
남궁소아가 싫은 소리를 냈다.
표정도 꽤 일그러졌다.
왜 그런가 하고 보니 과연.
“남궁가가 오는구나.”
저 멀리서 남궁세가의 인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검왕 남궁혁과 그 품의 남궁영, 옆으로는 가주와 남궁운은 꺄륵꺄륵 웃는 남궁영을 보며 헤벌쭉해 있었고, 남궁진천은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궁혁이 목리원을 발견했다.
그대로 방향이 목리원 쪽으로 바뀌었고, 뒤따르던 대열이 꼬리를 물 듯 방향을 틀었다.
“앗! 삼촌이다!”
남궁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남궁혁은 근엄한 얼굴로 다짜고짜 말했다.
“정진했군.”
예전이라면 당황했겠으나, 목리원도 그간 경험이 있어 이 집 안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참이다.
대처는 빨랐다.
“검왕님을 뵙습니다.”
포권을 취하자 남궁혁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남궁소아를 바라봤다.
“저녁에는 가문 내에서 식사를 할 것이니 들어오거라.”
“네… 아니, 근데 영이는 왜 데려온 거예요?”
남궁소아가 핵심을 찔렀다!
“고모야!”
“응, 안녕 영아.”
“…나들이를 가고 싶다고 했다.”
“회의가 나들이에요?”
“밖으로 나오면 나들이인 것을.”
남궁혁이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를 죽였다.
목리원은 그제야 남궁혁이 손녀와 증손녀에게 참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기한 광경은 이어졌다.
남궁소아가 눈꼬리를 세우며 남궁혁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비단 남궁혁만이 아니었다.
“아니 아빠도 그렇고 삼촌도 그래요! 영이는 집에 두고 왔어야죠! 딱 보니까 알겠네! 응? 영이 떼어놓기 싫어서 당신들이 먼저 제안했지!”
“아, 아니 소아야….”
“진정해라.”
“오빠는 가만히 있어!”
“흠, 알겠다.”
남궁진천이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남궁영은 와중에도 남궁혁의 수염이나 잡아당기며 태상가주의 위엄을 훼손하고 있었다.
다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짚지 않은 점이 우스운 일일까.
“묵룡.”
남궁진천이 대뜸 목리원을 불렀다.
목리원은 그를 바라본 순간 흠칫 놀랐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목덜미로 가 있었기에.
“왜, 왜 부르시오?”
“….”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목리원은 무심코 손으로 목덜미를 가렸다.
그러자 남궁진천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왜인지 시비를 거는 것처럼도 보이는 표정.
그리고 일말의 측은함.
목리원은 도저히 그의 생각을 유추할 수 없었으나, 수치심만은 확실히 느꼈다.
“무, 뭐요!”
“아둔한 것.”
남궁진천이 이것만큼은 자신이 빨랐음에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목리원이 모를 일이다.
목리원은 가만 남궁진천을 노려봤고, 남궁세가의 촌극이 끝난 것은 조금 뒤였다.
“회의 때 보지.”
더 잔소리가 듣기 싫어진 걸까.
남궁혁은 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 떠나갔다.
남궁소아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며 불만을 토로했다.
“단주님, 이게 말이 돼요? 응? 천하제일가라는 가문 인간들이 저렇게 정신머리가 빠져있다구요!”
그렇다!
남궁세가는 현시점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라는 위명을 등에 업고 있었다!
검왕 남궁혁, 검치 남궁진천.
가문 내에만 백도 무림의 정상이 두 명이나 있기 때문이다.
목리원은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저딴 게 천하제일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었으나 그걸 가문에 속한 사람에게 말하긴 미안했던 까닭이다.
목리원은 회피를 선택했다.
“더 늦기 전에 가자꾸나. 곧 회의가 시작된다.”
“내가 앓느니 죽지!”
남궁세가의 소녀가장 남궁소아가 쾅쾅 가슴을 두드렸다.
강서휘가 “안 그래도 없는 가슴 다 닳아 사라지겠네”라는 시비를 걸어 두 사람이 주먹질을 한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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