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2 이부 십일장 - 전쟁, 초야 (1))
* * *
강호에서 약속은 허투루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찍이 목선오와 마일석이 어린 시절부터 목리원에게 교육한 사실이었다.
이유인즉슨 일반적인 세상과 다르게 강호 무림이 힘의 논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약속의 무게는 목숨의 무게와도 같은 법이며, 허투른 약조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아, 약조를 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신중하거라. 무인끼리의 것이라면 더욱이.
새삼 그 말이 떠올랐다.
그에 목리원은 속으로 답했다.
‘하지만 스승님, 지키면 괜찮은 일이 아닙니까.’
목리원은 7년 전 이미 약속의 무거움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흑사련주 도은강과 언약을 맺었다.
협의 실존함을 증명하겠다는 약속이었고, 그 기일이 되었음에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늘이었다.
장소는 무한에서도 가장 구석진 어느 허름한 객잔.
점소이는 삼류 무인, 주방장은 이류 무인.
저들이 도은강이 무한에 심어둔 흑도의 끄나풀임은 부정할 도리가 없는 사실이었다.
도은강은 그 특유의 무감하게 얼어붙은 기색으로 말했다.
“강해졌군.”
“7년이 지났으니 말이오. 그러는 흑사련주께서도 정진하셨구려.”
“영약을 먹었다.”
“그뿐만은 아닌 듯한데.”
“답해줄 의무가 있나?”
“없지.”
“한 잔 들지.”
도은강이 술을 권했다.
목리원은 잔을 들었다.
분명 허름한 병에 담겨있었을진대, 풍겨오는 향부터가 상당한 고급 주종의 것이었다.
나름 손님 취급은 해주는 것인가?
흘금 그를 바라보니, 도은강은 단번에 잔을 털어 넣곤 눈을 마주쳐왔다.
목리원은 잔을 목뒤로 넘겼다.
“…좋은 술이구려.”
그 순간 안주가 나왔다.
이 역시 허름한 가게와는 맞지 않는 진미였다.
“먹지.”
도은강은 그리 필요한 말만 하며 평범한 식사 자리를 연출했다.
목리원은 따랐다.
별달리 그가 독을 이용할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만약 암살이 목적이라 해도 그가 행할 암살법으로 마주 앉아 하는 식사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목리원은 도은강이 어떤 인물인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내다.
그렇기에 모든 일에 있어 오로지 철저한 이성적 판단만을 근거로 삼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 나름의 생존법일 터였다.
타고난 무재와 별개로 인간 사이에서 그들을 부리며 살아가기에 감정을 느끼지 못함은 단점으로 작용할 테니 말이다.
여하튼, 결론만 말하자면 그런 얘기였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는 대화를 하러 왔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랬다.
도은강이 공허한 눈으로 목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조한 7년이 지났다. 한데 네놈의 행적은 7년간 폐관. 겨우 강호로 나와서 비무제 한 번. 임무를 표방하여 여러 장소를 오간 것이 끝이다.”
“조사를 잘 하셨구려.”
“네놈은 약조한 증명 중 무엇을 해냈나.”
목리원은 작게 웃었다.
초월에 이른 자들끼리의 비무를 통한 교감은 불가하다.
검을 나누지 않아도, 목리원은 도은강과 비무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여 말했다.
“초월에 이르렀지.”
“더 이상 내가 우월하지 않으니 강짜를 부려보겠다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오. 증명에 필요한 것 중 하나를 끝냈다는 말이었소.”
도은강의 미간이 살며시 좁아졌다.
그는 순수하게 목리원의 말뜻을 고민하고 있었다.
“협의와 무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나?”
“나는 겨우 내 뜻을 펼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는 말이오. 강호 무림은 힘의 법도로 돌아가는 법이오. 한데 그 힘도 갖추지 않은 채 나의 신념을 세상에 펼쳐봐야 무엇이 바뀌겠소? 바뀌려면 이제부터겠지. 나는 내 신념을 부르짖을 수 있는 위치에 올랐으니.”
“그 말은 변명이군.”
도은강이 술잔을 다시 채웠다.
“네놈은 유예를 말하고 있다.”
“꼭 유예라고 할 것은 없소만.”
“약조한 기간을 늘려달라는 말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은 단호한 어조였다.
“네놈이 무력의 상승을 도모하고 이제야 증명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 반박할 수 없다. 네놈과 내가 같은 수준의 무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구태여 싸움을 해봐야 나만 손해가 되는 것 아닌가.
하나, 그것은 약조한 일에서만큼은 확실히 네놈의 패배가 된다는 말이다. 네놈이 나를 무릎 꿇린 수단이 협이 아닌 무력이기 때문이다.”
도은강은 조리 있게 말했다.
그의 논리는 참으로 이성적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맞는 말.
목리원은 구태여 그에 반박하지 않았다.
하고자 하면 무력으로 그를 무릎 꿇릴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유예를 영원토록 늘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했다간 7년 전 스스로 약조한 일을 져버리는 행위가 된다.
협의 실존하지 않음을, 신념 따위는 중요치 않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꼴인 것이다.
“그럼 이제 내가 말할 차례요?”
“그렇다.”
“답하겠소. 당신은 더 기다릴 필요가 없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라.”
“우리가 약조한 7년, 정확히 일자까지 맞춰서 치자면 얼마나 남은 것이오?”
“…약 한 달.”
“그렇다면 그 안에 나는 보여줄 것이오. 협이 삶에 실질적으로 끼칠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를.”
그가 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그것이었다.
협이라는 허상이 아닌, 그 허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의 증명.
“대자보는 보셨소?”
“질리지도 않고 마교와 전쟁을 하더군.”
“그럼 더 이야기하기 쉽겠지.”
목리원은 어느새 다시 차오른 잔을 들었다.
도은강의 눈을 똑바로 보며 웃었다.
“련주께선 한 달 안에 협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을 눈으로 볼 것이오.”
단언하는 말을 끝으로, 목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달 뒤에 뵙지.”
도은강은 그 순간까지도 알 수 없는 기색으로 술잔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려 한다.
하나, 갑작스럽지만은 않은 전쟁이었다.
7년 전, 그리도 많은 강호인들이 신강의 경계에서 죽어 넘어갔던 순간부터, 아니, 청룡비무제에서 위광천이 날뛰던 순간부터, 그걸 넘어서 천하상단이라는 이름으로 마교가 중원에 암습해있던 순간부터 정해진 전쟁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다만 지난 전쟁과 다른 점은 한 가지였다.
중원이 방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참했던 패배를 기억하는 수많은 이들이 오늘만을 위하여 칼을 갈았다.
백도 무림의 기둥이라 일컬어지는 구파가 봉문을 풀고 나왔다.
강호의 거인들이라 불리우는 오대세가가 출전을 천명했다.
그들을 뒤따라 수많은 군소 방파가 검을 높이 들었으며, 그 한가운데.
“백도 무림의 동도들은 들으라!”
백도 무림맹이 있었다.
“다시 한번 마교의 악적들을 물리칠 것이다! 7년 전과 같은 패배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한 시간이었으므로! 두 번의 패배는 치욕과도 같으므로!”
어느 날 울려 퍼진 연설에 강호가 서쪽으로 걸어갔다.
목리원은 그런 와중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목 아우!”
1기 용봉단이었다.
다시 한번 개최된 대회의에 강호 명문의 주력들인 그들이 무한을 찾은 것이다.
“제갈 형!”
“목 시주님, 오랜만입니다. 제갈 시주님도 오랜만이군요.”
제갈산이 가장 먼저, 뒤이어 일운이 합장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 뒤로 혜운이 나타났다.
“소식 들었어요. 제갈씨, 애 있는 아녀자들 희롱하고 다닌다면서?”
“두 가지가 틀렸수. 아녀자‘들’이 아니고 아녀자. 희롱이 아니라 연애.”
“와, 뻔뻔해라.”
혜운이 질린 얼굴을 만들었다.
당화서는 할 말이 많은 얼굴으로 혜운을 바라봤다.
혜운이 툴툴대는 어조로 말했다.
“뭐, 왜요.”
“…아닙니다. 이제 단원도 아닌데 신경 꺼야지.”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짜증나는 거 알아요?”
“짜증나면 어쩌실 생각인지?”
한심함이 뚝뚝 묻어나는 당화서의 어조에 혜운이 반박하길 멈췄다.
목리원은 여전한 모습들에 웃음을 흘렸다.
무림 전체가 날이 서 있는 시기에도 변함없는 모습이 왜인지 속을 편하게 해주는 까닭이다.
“그래서 목 시주님, 우리 후배들은 잘 있남?”
혜운의 물음에 목리원은 답했다.
“말도 마시오. 곧 전쟁이라고 하니 다들 수련하겠다고 연무장을 나오질 않소.”
“뭔 비무대회 나가나? 아주 주접들을 떠네.”
“7년 전엔 혜운 스님도 그리하셨잖소.”
“다시 말해볼래요?”
“….”
목리원의 입이 꾹 다물리는 순간이었다.
“오, 저기 오는구만.”
“저 인간은 항상 늦네.”
제갈산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고, 그에 혜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목리원도 그 방향을 바라봤다.
참 익숙한 얼굴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표정 진짜 바보 같네.”
혜운이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무어라 했나.”
남궁진천.
그가 근엄한 얼굴로 되물었고,
“아빠야 바보래!”
등에 업혀 있던 남궁영이 꺄르륵 웃으며 대신 답해주었다.
“아빠야 바보야?”
“그렇지 않다.”
검치 남궁진천의 충격적인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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