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1 이부 십장 - 맹주 (2)
* * *
“따라오시게.”
라고 말한 견궐이 목리원을 데리고 온 곳은 언젠가 사백운과 술잔을 나눴던 정자였다.
여전히 맑은 공기와 정순한 기가 유영하는 한가운데.
견궐이 물었다.
“무슨 용무인가.”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목리원은 그에 품속에서 서신을 꺼냈다.
“이, 이걸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무슨 서신이지?”
“전대 맹주님께서 부탁하신 서신입니다.”
그 순간 견궐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흥미? 그도 아니면 짜증?
표정 변화가 옅어 기색을 눈치채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견궐은 다만 서신을 받아 그 자리에서 펼쳤다.
찬찬히 서신을 읽어내린 후, 그런 질문을 건넸다.
“내용을 읽어보았는가?”
“…아닙니다.”
“알겠네.”
견궐이 서신을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목리원이 입을 다물고 있자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교와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일세.”
“아, 예….”
“궁금해하질 않는군.”
목리원은 몸을 흠칫 떨었다.
궁금해했어야 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견궐에 대한 어색함이 치솟았다.
당최 표정 변화도 없고 어조의 고저도 없으니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답을 하지 않기엔 예의가 없는 일로 느껴져, 목리원은 말했다.
“제게 허락되지 않은 이야기라면 듣지 않겠습니다.”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또 침묵이 감돌았다.
목리원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어색한 침묵은 목리원으로서도 오랜만에 겪는 것이었다.
‘대, 대체 무슨 말을 해야하는 것이냐!’
혼란이 가득 차오르는 중이었다.
견궐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나 묻지.”
“예, 옙!”
“자네는 맹의 요직에 앉을 생각이 있나?”
“요직이라 함은….”
“대주, 각주, 그걸 넘어 이 맹주전까지. 맹의 심부에 요직으로 앉을 생각은 없느냐는 말일세.”
이 역시 의미 모를 말이었다.
하나 답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음, 없습니다.”
견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어째서지? 명예욕이 있어 보였는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나, 직위에서 오는 명예를 좇고자 함은 아닙니다. 협객으로서 강호를 주행해 그저 협을 알리고 싶을 뿐이지요.”
목리원은 자신감 있게 답했다.
이에 관한 답은 이미 처음 강호에 나온 순간부터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맹에 있는 것은 그 또한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생각 탓입니다. 하지만 제가 요직에 앉게 된다면 어느 순간 협과 현실 사이에 갈팡질팡하게 될 일이 생기겠지요. 그런 일을 바라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행정에 그리 눈이 밝지 않은 이유도 있습니다.”
조금은 머쓱한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그제야 목리원은 견궐을 바라봤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가만 목리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목리원은 괜히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자네는 철이 없는 편이군.”
“….”
“그럼에도 올바르고.”
칭찬인지 욕인지 확실히 해주었으면.
속으로 되뇌는 중 견궐이 말했다.
“알지 모르겠군. 처음 용봉단이 생길 적, 그러니까 내각주 자리에 있을 적엔 자네들을 맹에서 퇴출하고자 했네.”
그저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견궐의 입에서 나왔다.
목리원의 눈이 큼직하게 뜨이는 와중이었다.
“다만 명가의 자제들, 혹은 무공의 수위가 높은 이들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영웅화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이유네. 혈사가 끝난 지 고작 20년, 새로운 위협에 새로운 이름이 강호에 울려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네.”
“그것은….”
“강호를 지키는 것은 힘이 아닌 의지임을 믿기 때문이네.”
견궐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 일에 대해 사과하지. 자네는 올곧은 이가 맞네.”
“마, 말하지 않으셔도 되었을 일입니다. 고개를….”
“비겁한 일을 하였으니 사과해야 함이 옳네.”
“그, 그래도 고개는….”
“되었네.”
당황스러운 중에도 목리원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예민해진 기감이 전해오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지였다.
초월에 달한 무인들이기에 가능한 교감이었고, 물아일체의 지경에서야 관측할 수 있는 삶의 궤적이었다.
목리원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 견궐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고 각자가 견궐의 다른 면모를 말했으나, 이 순간 목리원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맹주시구나.’
그는 무림 맹주였다.
사백운과는 다른 느낌이지만, 분명 백도 무림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서 있는 정상이었다.
그가 무림을 지키는 방법이 이것일지도 몰랐다.
외부의 많은 것들을 경계하며, 시험하고, 또한 통제하는 것으로 성벽을 두텁게 쌓아 올리는 방법.
목리원은 지긋이 웃었다.
방식이 다르다 하여 그것을 그르다 할 수는 없는 법이기에.
“지난 일을 책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만 고개를 드시지요.”
“알겠네.”
다시 고개를 든 견궐은 무표정이었다.
하나 전처럼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것이 이해의 힘이었다.
목리원은 편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참, 진원단주님과는 얼마 전 술을 마신 일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내게 왜 하는 건가.”
“음? 조부님이시지 않습니까?”
“내놓은 자식이네.”
“….”
완전히 이해하긴 힘든 사람이군.
목리원은 차를 홀짝이는 견궐을 바라보며 다시금 어색하게 웃었다.
*
달이 휘영청 뜬 늦은 밤이었다.
견궐은 문득 먼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올곧은 이가 가득한 세상은 좋지. 하나, 모두가 그럴수는 없을 것이오.
그것은 신선을 연상케 하는 어떤 검수와의 담소였다.
-누군가는 어두운 일면을 바라봐야 하오. 볕 아래 있을 수많은 이들을 대신해 어두운 굴속을 정면으로 볼 줄 알아야 하오.
-그리 나를 위로할 셈이오?
-당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오. 스스로를 희생할 용기는 아무나 내지 못하는 것이니 말이오.
검성 목선오.
그의 말이었다.
때는 혈사가 끝나지 얼마 전이었다.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이들이 혈천교의 마인들에게 명을 달리하고, 또한 그들을 막으려던 이들이 암수에 당하던 때였다.
견궐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맹의 주역이었다.
해파검 견궐은 분명 혈사의 한가운데서 활약하던 백도 무림의 이름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의 주변을 노리는 이들은 많았다.
특히 병약했던 아들과 며느리를 노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였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거라.
-아버….
-그리 부르지 마라, 이 버러지 같은 놈.
견궐은 좋은 아버지와 좋은 무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 끝에서 내린 결정이 절연인 것이다.
마침 아들이 연고도 없는 여인을 사랑한다는 핑계가 생겼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음은 모른 척했다.
시간이 더 지나 며느리가 견동을 데려왔을 땐 끝끝내 끊지 못한 정이 있어 그를 품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뒤늦게 그 아이에게 정을 줘봐야 가증스러운 자위밖에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으므로.
여하튼 꽤 오랜 시간 견궐을 괴롭힌 것은 본인의 손으로 아들의 숨통을 끊었다는 죄책감이었다.
겸허히 수용하려 했으나, 자괴감이 치밀어 술잔을 기울인 날이 있었고 그날 목선오가 위로한 말이 그것이었다.
-옳다고는 하지 않겠소. 하지만, 당신은 용기 있었소.
쓰러져가는 견궐은 그 한 마디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아니, 그 말에라도 기대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좋은 아버지는 되지 못했다.
좋은 할아버지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버렸다면 무인으로서 올곧게.
견궐이 이리 일에 목매는 이유는 그것 하나였다.
회상하던 견궐은 눈을 감았다.
‘괜한 생각을.’
목리원과의 대화에서 문득 그가 떠올라버린 듯하다.
견궐은 코웃음 치며 품속에 있던 사백운의 서신을 꺼내 읽어내렸다.
『신강의 경계로 향할 것이네. 아무래도 흘러들어오는 마인들을 막기에 지금의 전력으로는 역부족한 듯하여서.
대외적으로는 알리지 말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될 즘엔 표시된 곳에 서신을 숨겨두게. 보름마다 확인하러 가겠네.』
전운이 다시 한번 감돈다.
마교의 활동이 또 한번 시작됐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견궐은 이제 최전선의 무인이 아닌, 백도 무림의 정상이었다.
‘책임을 져야겠지.’
견궐은 눈을 감았다.
구시대의 망령으로서 마지막 업무를 해야 할 때다.
*
맹에서 커다란 대자보를 붙였다.
그것은 단 한 문장이었다.
무림맹주 해파검 견궐이 직접 힘 있는 글씨로 써 내린.
[신강으로 향할 것이다.]
정의하여 선전포고였다.
백도 무림이 다시 한번 일어났다.
중원 전역이 오로지 그 소식에 미쳐 들끓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 날이었다.
목리원은 사내를 마주했다.
“약속한 7년, 지났다.”
흑의에 흑립, 홀로 움직임에도 100만을 이고 있는 듯한 기세와, 무엇도 담지 않은 허무를 동시에 품은 사내.
그는 흑사련주였다.
“따라오시오.”
목리원은 그와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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