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살검협-298화 (298/334)

EP.299 이부 구장 - 유산, 증명 (5)

* * *

상황이 정리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일석의 주도였다.

“내가 말했잖느냐! 걱정할 일은 없다고!”

마일석은 내내 조마조마한 얼굴을 하더니 이제야 빵긋 웃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목리원과 사백운의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기운이 아직 감돌았다.

“이것들이 하나같이 빠져가지고 말이다!”

하며 호통친 마일석이 두 사람을 이끌고 간 곳은 작은 암자였다.

“되었으면 이제 술이나 마시거라! 하여튼 별 시답잖은 걸로 이리 난리들이니.”

“시답잖은 것은 아니었소. 걸왕.”

“에잉, 말대꾸는!”

목리원은 화기애애해지는 분위기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해는 다 풀리신 건가.’

그랬으면 좋을 텐데.

아니, 저 편안한 미소를 보니 분명 그런 것이리라.

와중 사백운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내 꼭 해야만 했던 일인지라.”

“아닙니다. 그저 오해가 풀리셨다니 다행이지요. 사실 맹주님께서는 당연히 하실만 한 고민이고….”

사백운은 허허 웃으며 손사래쳤다.

“실례를 저지른 것이 맞으니 겸양 떨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이젠 맹주가 아니니 그리 부를 필요가 없네.”

“제겐 여전히 맹주님입니다.”

“그걸 견가에게 말해도 되겠나.”

목리원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견가는 현 무림맹주인 해파검 견궐을 일컫는 말이었다.

목리원이 바짝 굳자 사백운의 웃음소리가 드높아졌다.

“농담일세. 기색을 보니 아직 견가와는 따로 인사를 나누지 않은 듯하군?”

“예에….”

인사를 할 수도 없는 게, 애초에 그쪽에서 목리원을 부르지 않았다.

견궐은 무림맹주다.

고작 단주에 불과한 목리원이 개인적으로 만나기엔 너무 높은 자리에 있었다.

물론 용봉단의 특수성과 목리원 개인의 무력을 생각하면 면담을 요청해도 될 테지만 구도가 문제였다.

‘무력을 앞세워 이유도 없이 만나자 할 수도 없는 일이니.’

무력을 떠나 무림의 배분상 견궐은 목리원의 아득한 선배였다.

사사로운 이유로 그의 시간을 빼앗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런 점을 사백운도 아는 듯했다.

그는 술잔을 채워 목리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부담 갖지 말고 찾아가 보시게. 견가가 그리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네.”

“아니긴, 내 생전 그놈보다 꽉 막힌 놈을 본 적이 없는데.”

“걸왕께서는 누굴 봐도 그러시지 않소. 자, 묵룡. 이것부터 받으시게.”

“아, 감사합니다.”

목리원은 술잔을 받아 든 상태로 생각했다.

‘진정 찾아뵈어도 괜찮은 건가?’

암만 생각해도 실례일 것 같은데.

고민에 빠져있으니 사백운이 한 마디를 더했다.

“이보게 묵룡.”

“예?”

“영 실례가 될 것 같다면 내 핑계를 만들어주겠네. 이 서신을 견가에게 전해주게나.”

사백운이 잘 밀봉된 서신을 들이밀었다.

딱 봐도 중요해 보이는 서신이었다.

목리원은 물었다.

“어찌 직접 건네드리지 않고….”

“맹으로 갈 생각은 없기 때문일세.”

목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맹으로 돌아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찌 장강의 뒷물결이 흐름을 거슬러 역행할 수 있겠나.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이들에게 맡겨야 하는 법일진대.”

“하지만….”

“아주 강호를 떠나는 것은 아닐세.”

사백운은 반으로 쪼개진 창대를 매만졌다.

그의 입가엔 지긋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곧 강호가 우리를 필요로 할 순간이 올 테지. 그땐 손을 거들 것일세.”

마교와의 전쟁을 말하는 것일 터.

사백운은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

그의 시선이 목리원을 향했다.

“묵룡.”

“…예.”

“하나만 약조해줄 수 있겠나?”

“무엇입니까?”

“자네가 어떤 사람인 줄은 이제 잘 아네. 자네의 검이 무슨 뜻을 담았는지도 알고.”

그는 대뜸 그런 칭찬을 해오더니, 이내 참 진중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마음을 잊지 말아주게. 검성께서 남긴 유산이 아닌가.”

끝끝내 다 지워내지 못한 일말의 노파심일까.

목리원은 그에 싱긋 웃으며 답했다.

“절대 이 마음이 꺾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마음이 꺾인다면 그는 목선오에게 너무 죄스러운 일일 터이기에.

“혹여 그리 된다면, 그땐 정말 제 심장에 창을 찔러 넣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목리원이 장난스레 말했고, 그에 사백운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많이 능글맞아졌군.”

갑작스러운 비무는 그렇게 결말이 났다.

*

이후는 그간의 일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목리원은 7년간 자신이 어떻게 지냈으며 무림으로 돌아와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백련교의 교주를 만난 일과 그 이후 알게된 출생의 비밀까지 모두 두 사람에게 말했다.

두 사람의 얼굴 위로는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허어, 단천화가 백련교의 교인 출신이었다?”

“이런 정보는 나도 처음이구나. 그저 마교의 배신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믿지 않을 수는 없겠구려. 백련교주가 하필 그 파마성의 주인이라 하니.”

혈사를 끝냈던 두 고수는 지난 전쟁의 비화에 남들보다 더 충격을 받았다.

이어 출생의 비밀에 대한 부분에서 마일석은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머뭇거리는 입술은 망설임을 품고 있었다.

목리원은 지그시 웃었다.

“제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아….”

“저는 괜찮습니다. 도리어 감사하고 있습니다.”

7년 전의 목리원에게 출생과 관련된 부분은 ‘몰라도 될 일’이었다.

미성숙하던 자신은 그 일을 알게 되어 봐야 그 속에서 분노나 증오만을 찾아낼 것이었다.

이리 많은 것을 겪고, 더 많은 것을 바라 볼 수 있게 된 후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마일석의 선택이 목리원에겐 도움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이 얘기는 그만하자꾸나.”

“예, 앞으로의 이야기나 하지요.”

술잔이 기울었다.

*

마일석과 사백운은 금방 떠날 채비를 했다.

목리원은 아쉬움에 물었다.

“어찌 이리 빠르게 떠나십니까.”

“네놈은 늙은이들이랑 놀아서 뭐가 좋다고 그리 아쉬워하느냐.”

마일석이 짓궂게 웃었다.

“강호 유람이나 다니려 한다. 백운이 저놈이 모아둔 재산이 꽤 있어 그 돈으로 나도 호의호식 좀 하는 게지.”

“걸왕, 그리 말하면 섭섭하오.”

“섭섭하기는, 적적하다고 같이 와달라 한 것이 네놈 아니냐?”

“거지가 무슨 유람이냐 거절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이라도….”

“떽! 암만 거지라 해도 늙어서는 따뜻하게 지내야지!”

“말로는 뭔들 못하겠소.”

마일석과 사백운이 투닥거림에 목리원은 작게 웃었다.

아쉬움이 더 커지긴 했으나, 그래도 마일석이 고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말년의 유람이라, 부디 좋은 휴식이 되어야 할 텐데.

“더 붙잡아도 의미가 없는 것이군요.”

“울상짓지 마라 이놈아. 드문드문 찾아갈 테니.”

“저는 무한에 계속 있겠습니다.”

“그래, 그럼 슬슬 가보마.”

“묵룡, 또 보지. 서신은 꼭 견가에게 전해주고.”

목리원이 포권을 취하자 두 노인도 마주 포권을 취하곤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목리원은 뒤늦게야 씁쓸함을 지우고 돌아섰다.

섬서에서 무한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유를 가졌다.

생각할 거리도 꽤 있었던 까닭이다.

‘맹주님과의 독대라….’

사실 견궐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아 부담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해파검 견궐은 혈사 이후로는 내정에만 힘썼고, 이리 맹주가 된 이후에도 필요한 대외행사가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실례를 끼치지 않으려면 무어라도 알아낼 필요가 있을 텐데.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맹으로 돌아와 있었다.

“단주님?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오, 소아구나. 한데 그건….”

“아, 이것들이요? 진원단으로 가서 비무랍시고 행패를 부리고 있길래.”

힘줄이 빠득빠득 돋아난 얼굴로, 남궁소아는 양손을 들었다.

백경오와 모용진이 뒷목을 잡힌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오셨습니까. 단주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사고는 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고는 안 쳤습니다. 비무만 했지.”

백경오의 뻔뻔함에 목리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과를 하는 것은 남궁소아였다.

“죄송해요. 제가 잘 막았어야 했는데.”

목리원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애초에 남궁소아가 막는다고 막힐 인간들도 아니었으니.

“진원단에는 내가 사과를 하고 오마. 오랜만에 진원단주의 얼굴도 볼….”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진원단주?”

“동강불괴가 왜요?”

목리원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아!”

그러고 보니 견동이 견궐의 손자였구나!

너무 인식이 달라서 깜빡 잊고 있었다!

‘그래! 진원단주께 여쭈어보면 될 것을!’

조손관계인 만큼 남들보다는 견궐에 대해 잘 알 터다.

목리원은 곧장 걸음을 돌렸다.

“그럼 나는 진원단에 좀 다녀오마!”

“앗! 단주님 잠시만요!”

“급한 게 아니라면 나중에!”

목리원은 그대로 경공을 발해 담을 뛰었다.

도착한 진원단의 전각.

“응? 무, 묵룡 대협?”

“단주! 오랜만이오!”

다행히 견동은 전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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