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7 이부 구장 - 유산, 증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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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경사가 완만하다 느껴지는 산이었다.
하기야 가장 마지막으로 찾았던 산이 감숙의 공동산이니 당연한 일일까.
자연경관은 꽤 고즈넉한 편, 날씨도 맑았고 산짐승 같은 것은 기운이 잔잔하게 가라앉아 피부 위로 닿는 와중이다.
이곳 산의 끝에 마일석이 있다.
그런 만큼 감상에 빠져있고 싶은 기분이건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다름 아닌 거지 탓이었다.
“내 이렇게 대협을 모시게 되어 영광스럽수다. 이거 분타원들한테 자랑이라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소. 아,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구려. 개방의 섬서 분타주 창구라 하오.”
개방의 섬서 분타주 창구.
그는 그런 이름이었고, 참으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대화를 좋아한다기보단 자기 얘기를 남에게 하는 걸 좋아하는 쪽이라 해야 할까.
그덕에 목리원은 귀에 피딱지가 앉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섬서하면 화산, 종남을 들지만 그건 섭섭한 소리지. 이 천구개(千口丐) 창구님이 계신 데 개방은 생각지를 않는단 말이오. 이 얼마나 섭섭한 일이오? 내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래봐야 주변에 있는 것들이 개방보다 화산, 종남을 좋아하는 것들이라 꾹 참고 사느라 혼났수. 나 참….”
“우리 묵룡 대협도 아시다시피 개방이 참 사람 수가 많은 문파잖소? 중원 전역에 퍼져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 문파이기도 하고. 그런데 구파 중에서도 항상 말석에나 꼽히는 게 개탄스러운 일이오. 걸왕님께서 현역이실 때만 해도….”
“요즘은 구걸하는 거지를 보면 소박부터 놓는 인간들이 있소. 인심이 이리 흉흉해서야 우리 개방이 제대로 활동이나 할 수 있겠느냔 말이오. 내 그래서 생각한 게….”
참 귀에 안 들어오는 말만 했으나, 와중 목리원도 딱 두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창구는 개방을 사랑하며, 그 분타주 자리에 있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속한 집단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높이 사줄 만하나, 그와 별개로 호응해줄 말만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목리원으로서도 참 오랜만에 겪는 것이었다.
결국 하는 일이라곤 평소 곤란할 때처럼 어색하게 웃는 것뿐이다.
그런 순간이 한창이나 이어지던 중이었다.
“아휴, 대화하다 보니 벌써 도착했구려. 저 앞이오!”
창구가 손끝으로 완만한 봉우리를 가리켰다.
목리원은 해방감에 가까운 기쁨과 설렘을 느꼈다.
“안내해주어 고맙소. 그럼 나는 올라가봐도 되겠소?”
“그러시오. 마음 같아선 저기까지 안내해주고 싶은데 홀로 올려보내라는 걸왕님 명이 있으셔서 말이오.”
마일석에게 고마운 마음이 떠올랐다.
“알겠소. 그럼 또 뵙지.”
“아암, 성도로 오시면 내 찾아가겠소.”
창구가 떠났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목리원은 잠시 숨을 길게 내뱉다, 이내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렇게 도착한 봉우리 정상.
“왔느냐.”
기억 속 모습보다 아주 조금 더 늙은, 한량 같은 인상의 노인이 웃으며 목리원을 반겼다.
“걸왕님!”
“어허! 놔라, 이놈아!”
목리원은 한달음에 달려가 마일석을 껴안았다.
*
재회의 반가움이 가득한 가운데 목리원은 바위 위에 마일석과 마주보고 앉았다.
웃음이 연신 흘러나왔다.
마일석은 그런 목리원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뭐 주인님 만난 개새끼처럼 달려드는구나.”
“너무하십니다. 반가워서 그런 것인데. 7년 만에 보는 것인데 걸왕님은 제가 안 보고 싶으셨습니까?”
“일 없다 이놈아.”
멋쩍은 듯 마일석이 손사래를 쳤다.
하나 퉁명스러운 말로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그에게서 한껏 느껴지고 있었다.
목리원은 헤헤 웃으며 물었다.
“그간 어찌 지내셨습니까. 다시 강호로 나오니 걸왕님이 잠적하셨다 하여 참 놀랐습니다.”
“어떻게 지내긴, 그냥 산골에 처박혀서 유유자적 살았지.”
“안 그래도 오는 길에 안내를 도와준 분이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고놈 참 입이 가벼운 놈이구나. 거지는 귀는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 법인데. 에잉, 쯧.”
마일석이 혀를 찼다.
사소한 버릇이었으나 그의 상징과도 같은 행동이라 목리원은 반가움을 느꼈다.
그런 중이었다.
목리원은 문득 떠오른 사실이 있어 입을 열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전대 맹주님과 함께 지내신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잘 계십니까?”
순간 마일석의 움직임이 멎었다.
얼굴 위로는 굳은 기색이 떠올랐다가, 이내 씁쓸한 미소로 변모했다.
목리원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말했다.
“…잘 지냈다고는 말 못하겠구나.”
“무슨 변고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목리원의 어조가 사뭇 조심스러워졌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치솟는 것이었다.
그에 마일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결국 입을 열길.
“…사실 같이 왔다.”
그것은 목리원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말이었다.
목리원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당장 근처에서 기감에 잡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 어디 계시단 말입니까?”
“봉우리 몇 개를 더 가야 한다.”
“어찌 같이 오지 않으시고….”
“원아.”
마일석의 목소리가 진중했다.
목리원의 표정도 덩달아 진중해졌다.
“…예.”
“지금부터 백운이 놈을 만나러 갈 것이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니.”
그저 만나기만 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 하기엔 마일석의 기색이 너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리원의 속에 긴장이 들어찼다.
그 순간이었다.
“백운이 놈을 조금만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자세한 것은 말해줄 수가 없구나.”
마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그가 손짓했다.
“따라오거라. 안내해줄 터이니.”
목리원은 머뭇머뭇 따라 일어나, 그를 뒤쫓았다.
*
산맥의 한 봉우리, 사백운은 가부좌를 튼 채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심신을 가다듬는 과정이었다.
‘오고 있구나.’
목리원과 마일석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이곳에 당도할 터였다.
속에 심란함이 있었다.
사백운은 그것들을 털어내기 위해 힘써야만 했다.
‘확인해야만 한다.’
떠올리는 것은 이 심란함의 시작점이었다.
-원이가 형님의 제자다.
시작은 마일석이 어느 날 던진 한마디였다.
사백운은 그가 형님으로 모시는 것이 검성 목선오 뿐임을 알았다.
그런 만큼 목선오의 제자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본래 알고 있던 목리원의 인상과 충돌하여 심란함을 속에 심었다.
하물며 목리원이 보통 천살성인 것도 아니란다.
-본디 자미성을 타고났던 아이다. 혈천교와 단천화가 시행한 어떤 대법 때문에 그 별이 뒤집힌 게다. 가엾지 않느냐?
타고난 것은 자미성, 혈마 단천화에 의해 그것이 뒤집혀 천살성으로 바뀐 것이라는데 실제 마일석이 증거로 제시한 것이 있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당연 목리원을 향한 안타까움도 존재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하여 그리된 것이 아니지 않던가.
목리원도 누군가의 악행에 희생된 희생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리 밝게 자라나 준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사백운이 아는 목리원은 협을 알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알고,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는 법을 알았다.
그런 아이로 자라게끔 지도해준 것이 목선오이니 과연 스승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는 성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온전한 허락을 말할 것이었으면 애초에 혈사가 끝나던 날 목리원을 살리는 일에 찬성했을 것이다.
사백운이 걱정하는 것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만약 목리원이 천살성을 이기지 못해 살기에 잡아먹힌다면?
혹은 살기를 억누르는 일을 스스로 포기해버린다면?
그리하여 천마신교의 편으로 돌아선다면?
그 모든 것이 망상에 가까운 가정이었으나,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뭐가 됐든 지금 목리원이 이고 있는 별은 천살이다.
당장의 일이라면, 그 가능성을 점쳐야만 했다.
결국은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대비하지 않더라도, 그 가능성을 확인을 해보아야 했다.
사백운은 사람의 속을 완벽히 들여다보는 일은 불가능함을 알았다.
대표적인 예로 이젠 마룡이라 불리는 사마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 세상 누가 그를 천마신교의 수족으로 알았나.
모두가 그저 정파의 미래라 그를 치켜세워주기 바빴다.
사백운 본인조차 그랬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그토록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이미 초월에 닿은 목리원이라면 더더욱이 그랬다.
사마공을 알지 못한 일이 무당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목리원이 마교로 돌아선다면 중원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강박에 가까운 불안감이 사백운의 이유였다.
사백운은 기세를 날카롭게 벼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리니 목리원과 마일석이 보인다.
목리원은 뺨을 말갛게 물들이며 포권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맹주님!”
순간 결심이 흔들린다.
그러기 전에.
쿵!
창끝으로 기파를 쏘아내 목리원의 뺨을 그었다.
“…어?”
목리원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만들었다.
사백운은 그에 죄스러움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물어 겉으로는 분노를 표방했다.
“검을 뽑아라.”
사백운은 진심을 가장하며 기파를 부풀렸다.
“천살성.”
목리원의 몸이 우뚝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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