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5 이부 구장 - 유산, 증명 (1)
* * *
절강의 한 야산, 폭포수가 부서져 내리는 계곡을 세로로 그어 올리는 기파가 있었다.
쿠구구궁!
떨어져 내리는 폭포가 두 갈래로 나뉘어 치솟는다.
그 아래, 드러난 폭포 뒤로 날붙이로 그어 내린 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일순간 풍경이 정지, 그리고 다시 흘러간다.
쏴아아아아!!!
거칠게 흘러내린 물소리가 공간의 모든 소리를 씻어냈다.
그 모든 일을 행한 전직 무림맹주, 창성 사백운은 호흡을 고르며 기세를 가라앉혔다.
“일가에 올랐구나.”
마일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백운은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작은 성취가 있었소.”
“작긴 개뿔이, 이젠 그 남궁가 놈도 널 무시하지 못하겠어.”
“검왕께 실례가 되는 말이구려. 그분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
“멀기는, 그 등신 같은 놈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치켜세워 주느냐.”
마일석이 사타구니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사백운은 껄껄 웃음 소리를 냈다.
“그보다 요새 통 보이지 않으시더니 어딜 다녀오신 것이오.”
정말 어딜 다녀온 지를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이리 함께 지내기 시작한 게 몇 년, 마일석은 드문드문 실종되는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온갖 무림의 정보들을 수집해 가져왔다.
이번 역시 그러리란 판단에 기대감이 샘솟는다.
아무렴, 마지막으로 들었던 무림의 정보가 1년 전의 것이니 슬슬 새것이 필요한 참이다.
마일석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알면서 묻기는. 원이가 무림에 돌아왔다.”
“오오!”
“그 검왕 놈 손자도 돌아왔다. 둘이 청룡비무제의 결승에서 만났더군.”
“그런 재밌는 일이!”
사백운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은 아이의 것처럼 맑고 순수했다.
후배 무인들의 경사는 사백운에게 무엇보다 기쁜 소식이었다.
“하여 누가 이겼소?”
“당연히 우리 원이가 이겼지. 그 과정에서 검왕의 손자는 초월에 달했다.”
“허어…!”
“별호가 검치란다. 검치. 지 할애비도 못한 걸 해낸 게지.”
“이런 경사가 또 있을까! 내 참으로 격세지감을 실감하오. 이제 우리도 장강의 뒷물결이라는 것이겠지.”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문득 마일석의 목소리가 침잠해져 갔다.
사백운의 표정 또한 조금은 가라앉았다.
“…낭보만 있는 것은 아닌가 보구려.”
“그래.”
“마교요?”
“…그래.”
쏴아아아아―!
폭포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사백운은 눈을 감고 호흡을 정련했다.
“…그랬구려.”
올 것이 온 게로군.
창대를 쥔 사백운의 손등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마일석은 물었다.
“나서려느냐.”
“그렇소.”
“…나는 너를 말릴 수 없다.”
“그리 결론 내려주어 고맙소. 또한 죄송하오.”
“네가 죄송할 것이 무에 있겠느냐.”
마일석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걸렸다.
사백운은 그런 표정이 안타까웠다.
죄스러워야 할 것은, 이리 떠나온 이후 줄곧 자신이었기에.
“나는 확인해야만 하오. 백도 무림의 미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이해한다.”
“그러니 혹시나의 경우 원망은 달게 받겠소.”
사백운은 군청색의 장포를 입고 창을 둘러멨다.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었다.
마일석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가시려는 것이오?”
“내 입을 빌어 일어나게 될 일이니 그 끝을 내 눈으로 봐야겠지.”
사백운은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계곡을 나섰다.
하늘을 바라보며 기억 속 얼굴을 끄집어냈다.
-목리원입니다.
그 아이의 얼굴, 그리고 열정, 끝으로 협을 기억한다.
능히 다음 백도 무림의 미래라 일컬을 만한 기개를 가진 청년이었다.
하나 마냥 맡길 수만은 없는 이유는 하나.
‘천살성이라.’
이리 은거에 들어간 이후 마일석을 통해 들은 진실이었다.
그가 천살성의 아이였으며, 또한 목선오의 진전을 이은 제자라는 것.
고민이 있었고, 그것이 심마로 발전하여 속을 뒤집었다.
격정 속에서 살았고, 그런 고통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믿어주고 싶다.’
목선오가 어떤 사내였는지를 기억하기에 믿고 싶다.
‘하나, 신뢰를 변명 삼아 방만할 수는 없는 법.’
백도 무림의 아버지로서 가진 책임감은, 이리 맹주직에서 내려온 지금까지도 속에 잔류해 있었다.
그러니 확인이다.
그에게 내려진 천성, 그리고 그가 물려받은 협 중 목리원은 어느 쪽을 붙잡은 것인지.
끝끝내 그가 선택할 것은 무엇인지.
“가봅시다.”
사백운은 스스로의 창으로, 그 답을 갈구할 심산이었다.
7년의 침묵이 끝을 맺었다.
*
무한은 언제나 활기차다.
애초에 사람이 참 많은 대도시에, 거기에 무림맹 본단이라는 특이점까지 겹쳐 무인들이 많이 몰리는 까닭이다.
그런만큼 사건사고랄 것이 끊이질 않고, 또한 길을 가다 우연히 시비가 걸린 사람이 절대고수인 불상사가 한 번씩 일어나는 편이었다.
오늘 역시 그랬다.
“무, 묵룡 대협을 뵙습니다!”
단원들과 외식이나 할까 하고 나온 차에 하필 시비가 걸려 정체를 드러내게 됐다.
시비를 걸었던 만취의 무인들은 공력까지 사용해 술기운을 몰아내곤 사과해왔으며, 주변의 이목은 한껏 집중되었다.
“괜찮으니 갈 길 가시게. 술은 적당히들 하시고.”
“옙!”
“자, 동도들도 각자 일 보시오. 재밌는 구경은 다 끝났소.”
넉살 좋게 말하며 목리원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곤란함과 피곤함이 혼재한 얼굴이었다.
“오….”
언혁이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흘렸다.
목리원은 그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야 정체를 숨긴 절대 고수, 시비에 걸려있던 중 정체를 밝히고 상대방의 사과를 받아낸다. 또한 주변의 이목을 끈다.
언혁의 심장을 설레게 할 만한 것들이 아닌가.
실제로 18세의 목리원도 그런 사고를 꿈꾼 일이 있었다.
‘물론 이제는 아니지만.’
세월을 통해 깨달은 것이었다.
목리원은 괜한 시비에 걸리는 일이 얼마나 귀찮은지를 알았고, 혹여 이목이 쏘리면 대외적인 인식을 생각해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어야 함을 안다.
주변을 신경쓰지 않는 편안한 시간의 중요성은 생각보다 컸다.
“어서 먹고 나가야겠구나. 더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단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목리원은 동의를 얻어내고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그렇게 전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로를 걸으니 곳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 유독 목리원의, 그리고 단원들의 이목을 끄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얘기 들었나? 안휘로 돌아간 검치가 검왕과 비무를 하다 전각 하나를 날려버렸다던데.
-초월끼리의 비무라니, 기회가 된다면 꼭 견식하고 싶건만….
-본다고 무얼 알겠나. 여하튼 그 일 때문에 안주인이 크게 격노했다는 뒷얘기가 있더군.
-검치가 잡혀 사는 거야 유명한 얘기 아닌가.
-캬, 검치! 검밖에 모르는 바보! 들을수록 별호를 잘 지은 것 같단 말일세. 누군지는 몰라도 상이라도 줘야겠어.
뒷담화다.
흘긋 목리원은 남궁소아를 바라봤다.
“이 인간이 가문 망신을 그냥…!”
빠득빠득 이를 갈며 분노를 끓어 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건들면 터져버릴 벽련탄과도 같았다.
괜히 자극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목리원은 물론 단원들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또 다른 곳에서 뒷담화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얘기 들었나? 제갈 가주가 하남의 어느 미망인과 입을 맞추는 모습이 목격됐다 하더군.
-으응? 허어… 그 인간이 결국은…!
-기억하나? 7년 전 그가 용봉단에 있던 시절 포목점이….
-끝끝내 선을 넘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제갈가주! 부럽… 아니, 실망이군!
-자네?
-…못 들은 걸로 하시게.
대체 이 인간들은 하나같이 뭘 하고 다니는 걸까.
목리원의 속에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쏘아지는 단원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목리원은 단원들을 보낸 후 슬슬 해가 저물어가는 무한의 전경을 바라봤다.
“으음.”
노을 진 풍경이 꽤나 아름답다.
하며 감상에 빠진다.
‘요즘은 참 여유롭구나.’
맹이 바쁘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달리 하달되는 임무가 없어 한가한 때를 보내고 있다.
당화서와의 관계도 순간순간 느껴지는 위기감만 빼면 참 괜찮은 상태고 단원들도 말을 잘 따라주니 흐뭇하다.
언제까지 이럴 수야 없겠지만 지금 닥친 상황이 이러니 마음도 절로 풀어헤쳐진다.
여유는 있을 때 즐겨야 하는 법.
생각하며 장원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아, 소협. 마침 잘 오셨습니다.”
당화서가 환하게 웃으며 목리원을 맞이했다.
유달리 반가운 기색이 짙어 목리원은 의아함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소? 표정이 밝아 보이는구려.”
“일이라기보단 손님이 있지요.”
“손님이라?”
“이리로.”
당화서가 손짓했다.
그녀가 저리 반가워할 손님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고, 끝내 목리원은 그 답을 내지 못했다.
…여하튼 가보면 알 일이겠지.
생각하며 안채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목리원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얼굴엔 반가움이 한껏 떠오르기 시작했다.
“살성님!”
염소소, 은거했다던 그녀가 안채에 가만 앉아 미소 짓고 있었다.
기억하는 인자한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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